자유칼럼에서 글 쓴 지 10 년 [황경춘]


자유칼럼에서 글 쓴 지 10 년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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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칼럼에서 글 쓴 지 10 년

2018.01.31

제가 자유칼럼과 인연을 맺은 지 이달로 꼭 10년이 됩니다. 자유칼럼이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것이 재작년 9월이니, 자유칼럼이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지 약 1년 반 뒤에 식구가 된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여 자유칼럼에 입문하여 저의 인생 제2막의 꿈을 그리게 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미 이 칼럼에서 밝힌 바 있어 많은 이야기를 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자유칼럼이 저의 인생 제2막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관해서는 이 기회에 설명해 드릴 필요를 느낍니다.

1990년대 중반에 고정직에서는 일단 은퇴하였으나, 밀려오는 일감에,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 용돈 욕심에,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 때까지 외신 프리 랜서(free lancer)로서 심심치 않게 부업을 계속했습니다. 

건강에는 아직 자신이 있었지만, 그때 제 나이가 이미 78세, 아무리 나이를 따지지 않는 외신이지만 개인 생활에도 당연히 눈을 돌렸어야 할 때였습니다.이 무렵의 저의 계획성 없는 약간 방만한 생활태도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터졌습니다. 아이들 권유로 우연히 받은 건강검사에서 아내의 위암이 발견된 깃입니다. 아내의 여덟 시간에 가까운 수술과 3주일의 입원은 제게 많은 생각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무력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건강에 더욱 조심하고, 평소 은퇴 후에 꼭 하고 싶다고 다짐했던 우리말 공부와 글쓰기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을 맹서했습니다. 20년 이상 계속해 오던 국제 민간 친선단체의 봉사활동도 줄였습니다. 한때 한 해에 두세 번씩 자비로 해외여행을 하고 외국 손님을 국내에 초청하는 단체 운영일선에서 물러나고 더 많은 자기시간을 즐기도록 아내와 약속을 했습니다.

글 쓴다는 것은 제가 무슨 소설가나 수필가가 돼 보겠다는 뜻이 아니고, 제가 겪은 일제강점 때와 특수한 일본군 부대에서의 경험 그리고 광복 직후의 독특한 경험을 죽기 전에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어떻게 생각하면 맹랑하다고 할 수 있는 희망을 가졌던 것을 말합니다.

몇 번 이야기한 대로, 제가 한글을 배운 것은 일제 초등학교 6년 간,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극히 원시적인 교과서로 우리말에 깊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반(半)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된 조선인 교사 밑에서였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조선어 교육은 폐지되고, 광복된 조국에서는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후 사회에서는 주로 영어만을 사용하는 직장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일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우리말 신문이나 서적을 읽기는 했지만 한글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의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초등학교 졸업생 정도의 한글 실력밖에 없는 저를 자유칼럼 공동대표들이 받아 준 것입니다. 특히 방석순, 임철순 두 분은 매번 제 글 초고에 자세한 교정과 첨삭(添削)을 문법 해설과 함께 올려주어서, 저의 한글 실력은 이제 중학교 졸업생 정도는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칼럼 이름으로 지난 10년 동안 184편의 글을 독자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제가 얻은 약간의 최신 소식을 전하는 일본 관련 글이 많았습니다만, 제 주변에 관한 글도 많이 썼습니다. 따로 기회가 있어 다른 분들의 수기와 함께 저의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도 책으로 냈습니다.

‘100세 인생’이란 새로운 유행어가 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건강연령’이란 말도 돌고 있습니다. 자유칼럼과 인연을 맺은 지난 10년 동안 저 자신의 건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춘추의 소풍과 연말 모임에는 한 번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체력이나 기력의 변화는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 배웠던 문법규정을 오늘 잊는 실수를 예사로 범합니다. 뇌의 순발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 신체적 노화를 인지(認知)할 수 있는 지금이 아직은 행복한 시기라고 선인들은 말합니다.

이제 누가 등을 두들기며 “선배님,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쉬실 때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해주면 “그래요” 하고 물러설 용의도 있습니다. 그럴 때까지는 열심히 자유칼럼과 함께 글을 쓰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게스트칼럼/ 박대문

부탄, 솔가리 한짐의 행복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을 이륙하여 부탄왕국으로 향합니다. 부탄왕국이 정명이지만 그냥 부탄이라고 합니다.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는 부탄, 언제, 어디서 나온 자료라는 출처도 밝히지 않고 국내에 그렇게 인용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2003년 이후 13년간 OECD 회원국 가운데 줄곧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인의 눈으로 보는 부탄의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 

부탄을 가기 위해서는 태국, 인도, 네팔 중 한 곳을 거쳐야만 합니다. 부탄에는 유일한 국제공항, 파로 강변을 따라 건설된 파로 공항이 있습니다. 계기(計器)비행이 아닌 고도로 숙련된 비행술과 경험에 의한 시계(視界)비행으로 시야가 쾌청한 맑은 날씨에 착륙하여야만 하는 부탄의 유일무이한 공항이며 국제공항입니다. 높고 높은 히말라야산맥의 좁은 협곡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S자로 꺾어 돌아 강줄기 따라 고도를 낮춰가며 착륙해야 합니다. 

아슬아슬하게 파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800달러(2016년 기준), 평균수명 69세(2015년 UN), 성인 문맹률 47%, 영아 사망률 32%인 나라(UNICEF 2012 기준), ‘세계 행복보고서 2017’에 따르면 세계 순위 97위의 국가이지만, 국민 행복지수 1위의 나라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진 나라, 국내선 항공편도 없고, 헬기도 없고, 철로도 전혀 없는 나라. 통계 숫자로 이해할 수 없는 베일에 싸인 나라,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된 은둔의 나라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공항에 내려 여행사에서 미리 준비한 미니버스를 타고 부탄의 서부 지역인 Haa라는 지방으로 이동을 하면서 주변 풍경과 삶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도중에 타촉 라캉(Tachog Lhakhang)이라는 사원에도 들렀습니다. 부탄왕국의 사원은 

드종(Dzong), 곰파(Gompa), 라캉(Lhakhang)으로  구분되는데 드종은 사원과 행정관청의 복합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곰파는 수행자들만의 명상의 공간이고 라캉은 일반 불자들에게 개방되는 사원으로 대부분 마을 근처에 있습니다. 사원으로 향하는 길 입구에는 타르촉(Tharchog)이라고 하는 만국기 같은 수많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사원 건물 바로 앞에는 긴 장대를 세워 오색의 크고 긴 천에 경전을 적어 매단 룽다(Lungda)라 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 곳곳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깃발을 다는 것은 ‘신을 향한 인간의 소망’을 전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세계 1위의 행복 국가에서 무슨 소망이 그리도 많을까? 

타촉 사원에 들어가서 우선 놀란 것은 사원과 마당의 가재도구, 사는 모습과 부엌 등이 1960년대 우리 시골과 너무도 흡사했습니다. 담장 옆에는 땔감용 장작더미, 앞뜰에는 솔가리 낟가리가 가뜩 쌓여 있었습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흩어진 빈 상자며 널려 있는 가재도구 등이 옛 우리 시골집 마당이나 헛간과 다름없었습니다. 마당과 지붕 위에 빨간 고추를 햇볕에 말리고 있는 풍경이 참 정겨웠습니다. 

타촉 라캉 탐방을 마치고 다시 파로 시(市)에서 Haa로 가는 추후좀-하(Chhudzom-Haa Rd.)라는 유일한 도로를 따라 달립니다. 포장은 돼 있지만, 굽이굽이 구절양장 같은 도로 위에 어린애들도 나와서 놀고, 소와 양이 도로를 따라 거닙니다. 어쩌다 차량이 교행하는 참으로 한적한 시골 도로입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났는데 도로변에 15살 전후의 중•고등학생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큼지막한 빈 바구니를 메고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서 나뭇짐 바구니를 하나 가득 채우나? 방학을 맞아 산골 아이들이 땔감을 구하러 가는 길에 서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가 봅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바구니에 솔가리를 가뜩 채워 한짐을 지고 내려오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동행한 가이드 설명으로는 방학 기간에는 학생들이 저렇게 산에 다니면서 열심히 나무를 해서 겨울 취사와 난방용 땔감을 마련한다고 합니다. 

각종 통계 숫자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탄 국민의 행복감, 60년대 우리 삶의 모습 같은 사원 내부의 현장, 포장된 도로라는 것 빼고는 자연 그대로의 구부러진 산길, 추운 겨울임에도 남루한 옷차림에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가야만 하는 이 아이들의 행복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60년대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를 썼습니다.

솔가리 한짐을 지고 내려오는 아이는 이른 점심을 먹고 산에 올라가 혼자 열심히 일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혼자만이 아는 은밀한 노다지 계곡에서 솔가리 한짐 가득 지고 내려오는 저 아이, 뿌듯하고 기쁨에 넘쳐 집을 향하는 넘치는 행복감을 누가 알까? 저 아이의 행복감과 성취감을 지금 우리 아이들은 도저히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저 행복감은 오직 지금의 부탄 아이들만이 느끼고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지금 부탄의 산골 아이들은 가야 할 학원도 없고 컴퓨터도 없습니다. 집에서 혼자 놀이할 거리도 없고 같이 놀 친구도 없습니다. 땔감을 구하는 산이 놀이터고 땔감 구하러 산에 가야 그나마 친구가 있으며 일 자체가 하나의 놀이입니다. 바구니 메고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깔깔대고 놀다가 한참을 갈퀴질하거나 낫질하여 한짐 가득 바구니 채우고 산에서 내려오면 하루를 보람 있고 재미있게 보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떠오릅니다. TV, 컴퓨터도 없고 놀잇거리도 없어 친구들과 함께 산에 나무하러 가는 것이 그 시절의 일과였습니다. 뒷산의 민둥산을 날마다 긁어대니 솔가리도 몇 개 없는 땅바닥에 갈퀴 자국만 선연히 남았던 그 시절을 타임머신 타고 온 듯했습니다. 어렵게 긁어모은 솔가리 무더기를 한짐 지고 산에서 내려올 때 나도 하루 뭔가 한몫을 했다는, 소위 밥값을 했다는 가슴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즐겁고 만족스러워했던 그 기분에 빠져든 듯했습니다.

부모의 과잉보호 아래 호강하고, 부족함이 없이 살면서도 항상 무언가 아쉬움을 느끼는 요즈음 우리 아이들이 ‘하루 밥값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알기나 할까? 이렇게 사는 우리 아이들이 이곳 부탄 아이들보다 얼마나 더 행복할까? 새삼 별스러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집집마다 가득가득 쌓아 놓은 솔가리 낟가리, 부탄 산골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보니 옛 시절 땔감과 쌀독에 쌀만 있으면 든든한 월동준비에 만족하고 풍족해 했으며 궁핍 속에서도 여유로웠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산에 오르내리면서 무성하게 우거진 풀이나 소나무 낙엽인 솔가리들이 그대로 숲 바닥에 가득 쌓여 있는 걸 볼 적마다 솔가리 한 무더기에 그토록 풍요롭고 행복해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습니다. 가스, 전기로 밥 짓고 중앙난방을 하는 지금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지만, 솔가리 한 무더기에 부자가 된 것 같은 그 시절의 풍족감을 지금 와서 어찌 누릴 수 있겠는가? 세계 1위의 행복지수로 알려진 부탄의 행복, 우리는 이미 반세기 전에 그런 행복을 누렸습니다. 민둥산에 살 수 없어 떠나버린 메아리처럼 오늘의 우리에게서는 이미 떠나 가버린 솔가리 한짐의 행복! 부탄의 청소년은 지금 그 행복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 잃어버린 솔가리 한짐의 행복, 그것은 오직 우리의 생각과 마음먹기에 달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신기루 같은 행복이 아닌 ‘소확행’이었습니다. 

(2018. 1. 1 부탄왕국의 파로(Paro)에서 하(Haa)로 가는 길에)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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