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글쎄요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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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글쎄요

2018.01.15

지난 연말 농협 지점에서 어느 직원이 헌법을 개정할 때에 농업의 중요성을 담도록 요구하자는 서명부를 보여줬습니다. 농업의 생산물은 첨단 과학의 힘으로 결코 합성하지 못한다는 존귀함을, 뭘 좀 길러보는 나는 매우 잘 알지만 분출하는 목소리를 다 담으면 헌법은 어디로 갈지 걱정이 되는 데다 개헌의 필요성도 못 느꼈기에 서명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국회의 개헌 자문위원회가 내놓은, 다수안과 소수안이 뒤섞인 개헌안 초안을 주마간산 식으로 읽었습니다. 전문(前文)에서 기존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를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 실현~’으로 변경하고 제4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고~’에서는 ‘자유’를 삭제하자고 했습니다. 헌법 전문에 이런저런 정신을 담자는 의견도 분분했답니다. 실패한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냐, 자유민주통일이 아니라면 무슨 통일이냐고 묻는 목소리가 큽니다. 

우리는 1948년 건국 이래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으로 시장 경제를 발전시켜 3만 달러의 국민소득을 창출했습니다. 우리가 ‘하면 된다’라는 창의적이고 경쟁적인 생산 노력보다 평등한 배급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런 눈부신 경제 기적의 동력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70년간 가득 채워온 그릇을 지금 깻박치는 것이 아닌지 조마조마합니다.  

프랑스 헌법의 전문(前文)은 두 문장입니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주:프랑스 대혁명) 선언에서 정의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 주권의 제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 헌장에서 정의된 권리와 의무에 전념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이런 원리들과 제 인민들(peuples)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찬동하는 의사를 표명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상에 기초하여 그들의 민주적 발달을 위해 구상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유와 평등의 공존이 돋보입니다. 

프랑스 헌법은 3조 1항에서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 속하며 국민은 대표자나 국민투표를 통해 그것을 행사한다.’, 2항에서는 ‘국민의 어떤 일부나 어떤 개인도 주권의 행사를 점탈(占奪)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국민주권’ 미명하에 일어날지도 모를 소수의 부당한 권력 행사를 차단합니다. 프랑스의 표어(la devise)는 자유, 평등, 박애이며 그 원칙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핵심을 담아 인류 보편의 가치를 중시하는 국제국가 위상을 보여줍니다. 

일본 헌법 전문 또한 ‘일본 국민은, 정당하게 선거된 국회에 있어서의 대표자를 통해 행동하고,…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서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이것은 인류 보편의 원리이고, …우리들은, 이것에 반하는 일체의 헌법, 법령 및 조칙(詔勅)을 배제한다’고 밝혀 대의제 민주정치의 원리를 천명합니다. 

이제 G10급 국가가 된 대한민국의 헌법은 한시적인 정권 차원의 목적물이 아니므로 항구 불변의 가치를 담아 고치기 어렵고, 아니 고칠 필요 없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1987년 헌법은 매우 든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략적인 잣대를 들고 고치려고 들어도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한 뒤 국민투표에서 투표자 과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는 엄격한 규정 때문이죠. 사실 정부가 개헌안을 내놓는다고 해도 현재 여당은 121석이니 200석에서 한참 모자라 야당과 흥정한다면 모를까 쉽게 통과될 리가 없습니다. 소위 ‘지방정부’라는 분권으로 지방을 유혹하려는 모양이지만 정체가 불명한 개헌으로 1987 체제를 종식하려다간 장기 독재를 방지해온 단임제를 비롯해서 더 큰, 많은 것들을 잃을 수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 역시 개헌이 실패하면 심대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성, 안정성을 건드리는 일은 지극히 신중해야 합니다. 각종 조문에서 ‘자유’를 빼고, 지방정부에 입법권까지 주며, 참의원을 만들고, 국군의 의무와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제한 사유에서 ‘국가의 안전보장’을 삭제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개헌을 쉽게 하려는 조항도 보입니다. 

역대 정권의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라는 것은 예산 편성, 법률안 제출, 회계 감사, 인사 등 모든 것을 움켜쥔 대통령 자신들의 문제입니다. 서툰 목수처럼 연장을 탓할 것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역량 부족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은 헌법 없이도 국가를 잘만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9년여 만에 정권을 되찾은 좌익 정부와 여당이 ‘적폐 청산’이라며 흥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덩달아 국민들의 마음도 북핵 등 안보위기나 경제난, 국제 환경 등으로 평온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냉철한 머리로 정부도, 국회의원들도, 국민들도 국가 백년대계의 개헌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통일이 임박하면 또 헌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점이죠. 따라서 지금 개헌한다면 통일은커녕 분단 고착화의 헌법이 되기 십상입니다. 

만약 꼭 한다고 하더라도 몇 년 뒤에나 전면 적용할 가능성이 큰 개헌을 돈 몇 푼 절약한다고 허겁지겁 지방선거에 셋방살이하듯  최대 8매 중의 한 매 투표지에 섞어서 할 일이 아닙니다. 단일 이슈로 대우받는 개헌 한 가지 사안에 심사숙고해야죠. 개헌하려는 정력으로 먼저 국가 안보를 챙기고 글로벌 평균은 물론이고 G20 평균에도 한참 뒤지는 경제성장률을 높여서 사상 최악 실업률 9.9퍼센트라는 청년 일자리 창출부터 하기 바랍니다. 높은 청년 실업률도 헌법 탓인가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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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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