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 가는 길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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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 가는 길

2018.01.12

아침에 집필실로 출근하는 길이었습니다. 골목길 전신주 옆에 제법 큰 여행용 캐리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걸음을 멈추고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캐리어를 내려다봤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사용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캐리어 옆에는 제법 멀쩡해 보이는 운동화까지 버려져 있었습니다. 

몇 년은 충분히 신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왼쪽 운동화에 앙상한 낙엽 한 잎이 처연히 누워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게 발을 감싸 줄 멀쩡한 운동화가 버려진 것을 보니까 기분이 씁쓰름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60년대에는 학생화라 부르던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학생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산골 초등학교였던 탓도 있지만 캔버스천으로 만든 학생화를 신고 다니는 학생은 괜히 똑똑해 보이고 얼굴도 예뻐 보였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학생화를 신고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는 학교 기성회장직을 맡고 있거나, 약국, 과수원, 방앗간을 경영하는 유지들이었습니다. 학교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빠짐없이 교장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있는 그분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학교에 가는 날은 가을마다 열리는 운동회 날이 유일합니다. 담임선생님들과 마주치면 거들먹거리는 유지들과 다르게 무슨 큰 죄나 지으신 것처럼 고개를 똑바로 드시지도 못하고 허둥거리시기 일쑤입니다. 

동양고무에서 생산해 내는 기차표 고무신은 발뒤꿈치 부분이 쉽게 닳고 잘 찢어졌던 거로 기억이 됩니다. 없는 가정 형편에 고무신 한 켤레 가격 50원은 보리쌀을 한 되 넘게 살 수 있는 가격입니다. 어른들은 자식들이 사뿐사뿐 걷지 않고 고무신을 질질 끌면서 걷는 모습을 보면 고무신 닳는다고 큰소리로 꾸중을 하십니다. 기차표 고무신 다음으로 판매가 되기 시작한 타이어표 고무신은 새 신일 때는 번쩍번쩍 윤이 납니다. 타이어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질겨서 훨씬 오랫동안 신을 수 있습니다. 

새 고무신을 신으면 며칠 동안은 발뒤꿈치가 벌겋게 달아오르거나 피가 날 만큼 아픕니다. 아픔을 참으며 며칠 신다보면 발뒤꿈치가 부드러워져서 시나브로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검정고무신은 신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굣길에 냇가에서 피라미며 붕어를 잡을 때는 고무신에 담아서 가지고 갑니다. 한쪽 신발에 다른 쪽 신발을 구부려 끼워 넣으면 자동차 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친구가 약을 올리거나 장난을 치느라 느닷없이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가면 고무신을 벗어서 뒤통수를 향해 던져 버립니다. 어깨 뒤를 향해 힘껏 벗어 던져서 누구 고무신이 더 멀리 가는지 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밤중에 참외 서리를 갔다가 선잠이 든 주인이 원두막에서 고함치는 소리에 도망을 가다 고무신이 벗겨질 때도 있습니다. 정신없이 도망을 쳐서 안전한 지역에 도착해서야 고무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급기야는 모두 참외밭 주인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빈 후에 고무신을 되찾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다 보니 교회 같은 곳에 갔다가 신발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아궁이불에 뜨겁게 달군 못 같은 것으로 간단한 표시나 성을 새겨 넣기도 합니다. 

어느 해 여름에 어머니와 먼 친척 집 잔칫날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목적지가 20여 리 가 넘지만, 버스가 다니지 않는 산골이라 아침 일찍 출발을 했습니다. 

여름날이라서 5리쯤 걸어가니까 고무신 안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땀이 차서 걸을 때마다 땀이 미끈거리면서 고무신이 벗겨질 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 고무신에 흙을 담아서 흔들었습니다. 흙을 버린 후에 풀잎으로 남은 흙먼지를 닦아 낸 후에는 덜 미끄러웠습니다. 모난 돌멩이를 밟을 때는 발바닥이 아프기도 하고, 모래가 고무신 안으로 들어와서 여러 번 걸음을 멈추고 고무신 안의 모래를 털어내기도 하며 땡볕 속을 걸었습니다. 냇가를 지날 때는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으면 온몸의 땀이 저절로 마릅니다. 

겨울이면 고무신이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어머니는 아침을 지으면서 자식들의 고무신을 아궁이 불길을 받을 정도에 세워둡니다. 콧물이 저절로 흩날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아우성을 치는 날도 따뜻한 고무신을 신으면 학교 가는 길은 즐겁습니다. 

고무신이 떨어지면 실로 꿰매 신거나 장날 고무신 때우는 장수한테 가지고 갑니다. 장 가장자리쯤에는 고무신 때우는 장수 서너 명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떨어진 부분에 접착제가 잘 붙도록 철사솔로 문지릅니다. 고무신 형태의 주물 틀을 불에 알맞게 가열한 다음에 자전거 타이어 재질처럼 부드러운 고무를, 떨어진 부분에 접착해서 압력을 가해 때워 줍니다.

고무신 때우는 장수에게 들고 가지 못할 정도로 떨어진 신발도 용도가 있습니다. 가끔 동네를 찾아오는 엿장수에게 들고 가면 고무신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서 엿과 바꾸어 줍니다. 엿가락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고 있는 사이에 한동안 정들었던 고무신은 엿장수의 지게에 실려 멀리 떠나갑니다. 

골목에 버려진 운동화는 고물을 수거하는 사람들이 가져가서 세탁을 할 것입니다. 세탁이 된 고무신은 컨테이너에 실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저개발국가의 시장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입던 중고청바지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던 70년대 우리들처럼 그들도 중고운동화를 구입하는데 돈을 지불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중고운동화가 그들에게는 멋진 운동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결코 유쾌하지 않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면 결국 장래는 밝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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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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