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위안부 합의, 정도(正道)를 따라야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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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위안부 합의, 정도(正道)를 따라야

2018.01.10

위안부 합의 검증 태스크포스의 작업 결과가 발표되고 이어 대통령이 그 합의를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한일 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워낙 커서 많은 논객들이 제각기 의견과 평가를 내놓고 있는 만큼 아무나 나서서 한마디 보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발생 초기에 이 문제의 국제화에 조금이나마 관여했던 사람으로서, 꼬일 대로 꼬인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일말의 소회를 적어보는 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오랜전 일입니다. 1992년 제네바 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에서, 저를 포함한 우리 대표단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양자 문제일 뿐 아니라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이므로 국제사회가 이를 엄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대표는 크게 반발하였지만 NGO 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한 일본인 국제 인권 변호사가 우리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온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일본이 건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이래 어느 시점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유엔 차원에서 전시(戰時) 성노예 문제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과 함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자성의 목소리도 커져 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기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사과는 피해자가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점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국가 간 역사 문제는 일단 정부 간에 다뤄지지만 민주사회에서는 역사 문제를 비롯한 어떠한 문제도 국민의 뜻을 비켜 갈 수는 없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정서를 반영하여 이를 처리할 경우에는 큰 무리 없이 해결될 개연성이 높지만 정부의 의지와 국민의 정서 간 간극이 클 경우에는 어려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외교 문제로서 다루는 정부가 국가 간의 여러 문제를 함께 고려하여 처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는다면 피해 당사자는 물론, 아픈 역사로부터 상처를 입은 많은 국민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타 국내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정부가 일부 국민의 치우친 감정에 따를 경우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국가 간 외교 문제에 사법이 지나치게 개입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일 위안부 문제는 일부 과도한 국민 정서가 사법적 판단에 호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외교의 자율성을 제한했다는 문제점도 있다고 봅니다. 국가의 외교는 나름대로 시운(時運)을 타고 순조롭게 행해져야 상호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사법(헌법재판소)이 정한 제한 속에서 외교를 수행하다 보면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해야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위안부 합의는 그런 와중에서 외교가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일본이 종래의 입장을 번복하는 모습을 보인 것 또한 문제를 더욱 뒤틀리게 하였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크게 보아 국민도 국가도 다 피해자입니다. 당시에 입은 역사적 상처는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적, 심적 피해를 입은 현장의 당사자가 가장 큰 피해자라는 사실을 가벼이 보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피해 당사자로서는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자신의 국가로부터도 피해를 입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피해자로서는 여러 면에서 피해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어떨까요? 법적인 차원에서 가해자들은 이미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렇지만 한 나라의 역사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 가해의 역사는 여전히 그 국가의 역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저지른 범죄가 국가의 이름으로 범한 것이라면 그 후손이 이에 대한 법적, 도의적 책임을 승계한 것으로 보는 것이 국제사회의 규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정리(情理)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일이 나치시대의 범죄에 대해 지금도 피해자에게 배상을 하면서 때마다 사과를 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가해자의 후손들에게 마치 그들 자신이 저지른 일인 양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정의를 회복하는 일은 매우 신중하게, 사리(事理)를 잘 따져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또 다른 갈등과 마찰이 야기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제 위에서 지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살펴볼 때 양측 당국자들 공히 무리수를 두었다고 봅니다. 첫째, 우리 측이 밝힌 것처럼 피해자의 입장을 최대한으로 고려하지 않고 처리함으로써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편의를 우선시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둘째, 역사의 정의를 회복하는 데 있어 일거에 해결한다는 생각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70여 년 묵은 복합적인 문제를 어찌 단칼에 마무리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사태의 흐름에 맡겨 스스로 해결되도록 놔두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피해 당사자들이 곧 세상을 떠나므로 그 전에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금전적 차원에서는 굳이 일본으로 하여금 돈을 내도록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한때 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가해자 측의 사과라는 것도 그동안 웬만큼 사과를 받았으면 결코 만족할 수준은 아니라도 일단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관용의 정신도 필요합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든 과거의 사과를 번복함으로써 사태가 더 악화돼 왔습니다. 어쨌든 뿌리가 깊고 오래된 문제는 양측이 이해심과 관용으로 임해야 풀릴 수 있음은 일상생활의 경험으로도 알 수도 있습니다.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최대 피해자인 만델라 대통령이 이 점에서 큰 전범을 남겼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셋째,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직접 해결하도록 배상 또는 보상의 체계를 만들었어야 합니다. 왜 우리 정부가 나서서 재단을 만들어 일본 정부가 주는 돈을 받도록 해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이 정부 출연금으로 재단을 만들어서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을 하도록 했어야 그들의 사과가 온전히 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위안부 문제는 배상이나 보상의 문제이기 전에 인간의 존엄과 권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양측 관계자들이 깊이 인식했어야 합니다.

넷째, 일본 정부가 명시적으로 불법행위였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그 돈이 일본 정부 예산에서 나온 것이므로 국가에 의한 배상을 전제로 한다고 보는 것은 아전인수에 불과합니다. 일본 측으로서는 최종적으로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고 해서 정부 예산에서 아주 적은 돈을 쉽게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이 위안부 문제의 불법성을 인정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불법행위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제대로 받지 않았으면서도 받은 것처럼 인식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한 것은 올바르지 않은 처사입니다. 

역사의 정의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일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역사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정도(正道)는 있다고 봅니다. 첫째, 민주사회에서 정부가 국민의 정서를 도외시하고 멋대로 처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독재시대나 전제군주 시대의 발상입니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국가안보 못지않게 인간안보가 우선이며 평시에는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제일 큰 책무입니다. 

정도(正道)는 개인의 권리 외에도, 인류애(휴머니티), 관용과 같은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정부가 이런 기준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면 이렇게까지 사태가 뒤엉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 초긴장 상황이 야기된 것은 정부의 시대정신에 대한 인식 부족과 관계자들의 경험 부족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무리수를 두다 보니 보도된 바와 같이 청와대와 외교부 간 엇박자가 나고 결과적으로 매우 허술한 합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합의를 파기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두되 소위 ‘정치적’으로 보완조치를 하느냐 하는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합의를 파기한다는 것은 국가 간에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커다란 공동의 과제를 앞두고 있는 한일 양국 간에 현실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 국민은 이보다는 더 품격 있고 안정된 외교의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위안부 합의를 섣불리 건드리기보다는 우선 이대로 놔두면서 시간을 가지고 국민적 숙의(熟議)를 거친 후 정도(正道)를 따라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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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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