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전을 마치고 [임철순]


www.freecolumn.co.kr

서예전을 마치고

2018.01.03

2018년 새해를 맞아 이미 떠나보낸 2017년을 회고해봅니다. 지난 한 해 내가 한 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었나. 어제가 몇 년 전 같고, 몇 년 전이 어제 같은 ‘시간의 착종(錯綜)’이 갈수록 심해지는 기분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시간의 선 위에 나만 혼자 아는 점이라도 찍어 표시해두고 싶어집니다. 

지난해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서예전입니다. 한국일보 선배 두 분과 함께 12월 14~20일 개최했던 ‘언론동행 3인전’(백악미술관)은 신문기자로 한평생 살아온 60·70·80대 세 사람이 ‘펜 대신 붓을 잡고’ 펼쳐 보인 한바탕 잔치였습니다. 도록에 이미 썼다시피 세 사람에게 붓은 곧 지팡이이며 그 지팡이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도구이자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대화하는 수단입니다.

서예든 학문이든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시는 것을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다”[如坐春風之中]고 합니다.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광정(朱光庭)이 스승 정호(程顥)를 상찬(賞讚)한 말입니다. 선생님이 이루어주신 학업에 감사할 때는 “때맞춰 오는 비의 은택을 앙모한다”[仰沾時雨之化]고 말합니다. 맹자 ‘진심장구(盡心章句) 상’의 글 시우화지자(時雨化之者)를 응용한 말입니다. 

나는 서예 입문 5년을 갓 넘은 ‘어린 비둘기’입니다. 서력(書歷)도 필력(筆力)도 볼품없지만 다만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선생님의 춘풍(春風)과 시우(時雨)만 믿고 감히 이 전시회를 저질렀습니다. 어린 비둘기가 고개를 넘지 못한 건[新鳩未越嶺] 분명하지만 날갯짓만으로도 의미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시회 기간에 사람들이 제 글씨를 오래 들여다보고 서 있으면 겁이 나고 두려워서 슬그머니 곁을 피하곤 했습니다. 재능이 모자라는 터에 연습과 수련도 게을리하고는 남의 작품 보듯 내 글씨를 뜯어보면서 ‘이렇게밖에 못 쓰나’ 하는 자탄과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더욱이 스물여덟 자나 빼먹고 쓴 경우가 있고, 잘못 쓴 글자도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오자 탈자나 오류는 잘도 지적질하면서 자기가 잘못하고 빠뜨린 건 선생님이 짚어주어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그렇게 글자가 빠져도 문장의 대의가 막히거나 다음 문장과의 연결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지만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그동안 남의 서예전을 보면서 ‘왜 글자를 틀릴까, 왜 빼먹고 쓸까’ 하고 의아하고 한심해 한 경우가 많았는데, 남의 눈에 낀 티끌은 보면서 제 눈에 낀 들보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 

겸손해져야겠다는 반성과 자탄 속에 1주일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글씨를 모두 떼어낸 하얀 벽면을 보고 있자니 아쉽고 허전하고 허망하기도 한 기분과, 그래도 뭔가 해낸 것 같다는 성취감 비슷한 게 교차했습니다. 글씨든 행사 진행이든 손님 접대든 전시를 둘러싼 모든 일에 대해서 ‘왜 좀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다음엔 좀 더 잘해보자는 마음에서 사람들은 전시회나 발표회를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못나고 볼품없는 걸 보려고 일부러 찾아와 주고 축하해준 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같은 신문사 출신 선·후배가 이런 행사를 하는 것에 대해 다른 신문사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말도 꽤 들었습니다. 도타운 정에 두루 감사하면서, 앞으로 갚아야 할 빚이 많이 생겼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시 첫날, 개전(開展) 행사가 끝나고 저녁을 먹을 때 신문사 선배 한 분이 “내년엔 또 뭘로 세상을 시끄럽게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해마다 뭔가 일을 벌여 사람들을 귀찮게 해온 것 같습니다. 올해 2018년엔 뭘 할 건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 검토가 필요한 일이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짓고 받으십시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