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정권의 눈치를 보면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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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연금이 정권의 눈치를 보면

2017.12.08

노무현 정부 때 대법관을 지낸 분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박근혜 정부 때 그는 국내에서 최고로 선망되는 준 공기업의 사외이사로 추천됐었습니다. 이 사실은 언론에 기정사실로 보도됐습니다. 그런데 공식 발표 전날 회사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사정이 생겨 임명을 취소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측 설명인즉, 그가 대법관으로 재임 중에 이 회사의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과 관련한 재판을 심리한 기록 한 건이 발견돼 국민연금공단 측과의 이해충돌의 소지가 있다며 공단 측이 임명에 반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법관 6년 임기 중에 심리한 수천 건의 사건 중에서 국민연금이 어떻게 그 재판 기록을 찾아냈는지도 기이하고, 법에 따라 공평하게 심리, 결정한 그 사건이 왜 이해충돌의 사유가 되는지 아리송할 뿐이었습니다.

국민연금은 은행 보험 증권회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관투자가입니다. 그 중에서도 복수의 민간기업들로 구성되는 여타 기관투자가와는 달리 이사장을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공성격의 단일 기관투자가로 국내 기업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닙니다.

국민연금은 600조 이상의 자금을 운용하는 자본시장의 큰손입니다. 기금규모로도 세계 3위를 자랑합니다. 올 3분기 말 기준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국내기업이 278개나 되고 그 중에는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자동차 네이버 등 굴지의 기업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런 국민연금이 기업의 사외이사 추천권이나 배제권을 행사하는 것이 대수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노사화합 경영을 위한다며 노조출신의 이사를 '노동 이사'로 추천하는 것은, 전체 기업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때 차원이 다른 경영개입입니다. 지난달 국민은행에서 국민연금이 한 일입니다.

국민연금의 이런 인사개입은 과거 정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로서 공단이 내년 말에 도입할 예정인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 기관투자가 의결권행사 지침)’ 제도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공약이기도 한 스튜어드십 코드에서 노동이사제는 투명경영을 담보하는 기업개혁의 필수 요소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국민은행은 임시 주주총회에서 이 제안을 외국인 주주 등 절대다수의 반대로 부결시켰으나, 국민연금은 투명경영이 연금의 안정성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며 계속 추진한다는 입장입니다. 그 때문에 기업 쪽에선 앞으로 연금공단이 대표이사도 선임하려 들지 않겠냐고 우려합니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독립성입니다. 청와대와 정치권의 입김에 휘둘리는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개입한다면 그것이 바로 관치경영입니다. 국민연금이 그동안 경영참여보다 수익률 제고에 중점을 둔 재무적 투자가로 머물러 온 것도 그런 국민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낙하산 인사가 비판을 받는 것은 그것이 비전문가에 의한 비효율 경영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부와 정치권은 틈만 나면 연금을 정책사업에 끌어다 쓰기 위해 혈안이었습니다. 과거 정부에선 증시 활성화 정책을 명분으로 연금으로 하여금 부실 주식을 사게 해서 기금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적도 있었습니다.

정책사업 중에는 국가의 필요에 의한 것도 있지만 정치권의 선거용 시혜 사업도 많습니다. 구조적으로 수익을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국민연금에 낙하산 인사와 비효율 투자가 겹치면 연금의 안정성은 깨지기 마련입니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것도 이것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건과 관련해 국민연금의 전직 최고책임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법원에 따라 이들에 대한 유무죄 판단이 엇갈리고 있으나, 이 재판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외압에 취약한 국민연금의 구조입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생활 안정을 지켜주는 보루입니다. 급격한 인구의 노령화와 출산율 저하로 연금의 고갈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돼 있습니다. 연금이 투자 수익률 제고와 안정적인 관리 이외의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노사화합과 투명경영은 기업의 자율로 하는 것이 최선이고, 그 부분에선 국민연금보다 더 전문적인 기관들이 있다고 봅니다. 국민연금으로 하여금 본연의 임무에 충실케 하는 것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달성하는 길임을 정부는 명심할 일입니다. 정권의 눈치를 보게 하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이전 정부들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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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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