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에 다시 돌아보는 ‘생로병사’ [방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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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에 다시 돌아보는 ‘생로병사’

2017.12.07


정년을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칠순(七旬)이라니‧‧‧  힘차게 달려왔던 청춘이 점점 더 먼 추억으로 자리하는 기분에 젖어듭니다. 빠르게 흐르는 세월만 탓하며 몸과 마음이 젊은 시절 같지 않고, 가슴 한구석에 허전하고 쓸쓸한 기운이 스며드는 느낌도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췌장암 4기를 이겨내며 ‘웰다잉 극단’을 이끌어오고 있는 중학 동창의 ‘아름다운 여행’이란 연극(YTN 뉴스)을 보며, 문득 재직 시절 교양과목에서 다루었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주제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연극을 보고 친구가 카톡에 올린 “힘든 몸을 이끌며 삶의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무대에서 몸소 보여주는 모습 감사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얼굴과 목소리도 맑고 삶과 죽음에서 자유롭고 초연한 모습 더없이 아름답고 우리도 닮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읽으며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한 걸음이 바로 오늘 하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로병사에서 ‘생(生; 탄생)’은 ‘축복의 메시지’로 정의해 봅니다. 탄생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부모의 만남과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탄생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려면 친조부모와 외조부모가 만나야 하고,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부모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되는 과정은 축복의 필연성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정자가 난자에 접근해 수정되려면 한 번에 3억 개가 넘는 정자가 사정되어야 하며, 그중 난자에 접근하는 정자 수는 300~400개 정도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내가 존재하기 위한 처음 경쟁이 무려 75만~1백만 대 1이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자에 접근한 정자 중 하나가 난자에 들어가 수정이 이루어지는데, 나를 태어나게 한 정자가 아니라 옆에 있던 정자가 들어가 수정이 되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축복을 받고 태어나 칠순을 맞이하고 있는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잠겨봅니다. 

‘노(老; 노화)’는 마음을 열고 보람 있게 살아가는 ‘웰에이징(Well-aging)’으로 정의해 봅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며 UN에서 평생 연령을 5단계로 재조정해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기, 66~79세는 중년기, 80~99세 노년기 그리고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으로 구분해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는 칠순은 아직 중년기 초반이라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웰에이징을 위해 내게 맞는 삶의 방식을 마련해 중년기답게 살아가려 생각하다 보니 “사람이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다.”라고 한 앙드레 지드의 말에 마음에 와닿습니다. 

‘병(病; 질병)’은 ‘시련 그리고 극복의 과제’로 정의하며, 건강한 삶을 의미하는 웰빙(Well-being)과 연관시켜 봅니다. 질병은 항상 우리 곁에서 호시탐탐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는 평생의 난적(難賊)입니다. 그러나 “건강에 대한 지나친 걱정만큼 건강에 치명적인 것은 없다.”는 미국 격언에서처럼 나이가 들며 질병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걸으면 병이 낫는다.”는 스위스 격언을 마음에 담고, 웰빙을 위한 1주일에 5일, 30분 이상 걷는 ‘530 걷기 습관’의 실천을 다짐해봅니다. 

‘사(死: 죽음)’는 ‘시간의 섭리 그리고 아름다운 마감’으로 정의하며, 암 투병 친구가 이끌어가고 있는 ‘웰다잉 극단’을 연상하며 웰다잉(Well-dying)과 연관지어 봅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순서가 없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대신할 수 없으며, 경험해볼 수도 없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칠순을 맞이하는 ‘지금’이 바로 겨우살이가 아닌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며 삶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아닐까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은 단 1초라도 더 가지거나 덜 가질 수 없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똑딱’ 하고 지나는 1초는 매우 짧고, 60초로 채워지는 1분도 짧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3,600초라는 1시간은 무척 길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86,400초인 하루라는 시간은 어떨까요.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내 마음의 선장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 자신에게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세상에 태어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으며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황혼기가 성큼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삶은 붙잡을 수 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죽을 때는 티끌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칠순을 맞이해 내 삶을 비추는 거울 안을 들여다보며, 축복받고 태어난 내 삶에서 죽음이라는 마지막 여행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실현하고 싶습니다. 생로병사의 삶에서 누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매일 24시간씩 죽음 앞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방재욱

양정고. 서울대 생물교육과 졸. 한국생물과학협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약용작물학회 회장 역임. 현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과총 대전지역연합회 부회장. 대표 저서 : 수필집 ‘나와 그 사람 이야기’, ‘생명너머 삶의 이야기’, ‘생명의 이해’ 등. bangjw@cnu.ac.kr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개망초(국화과) Erigeron annuus (L.) Pers.

그토록 지천으로 피어나던 들꽃이 한숨 늦추더니
붉게 노랗게 나뭇잎은 단풍이 들고 
한해살이 풀꽃이 씨앗을 맺고 나서 시들어 가는 늦가을,
황량한 벌판에 왕릉 같은 고분(古墳)이 즐비하게 늘어서 
옛 흔적도 자취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침묵에 잠긴 채 
또 한 해의 세월을 넘기는 대구의 불로고분군을 찾았습니다.
   
아스라한 천오백 년 세월의 무게가 
투박하고 무겁게 이어져 내려앉은 곳.
아득히 먼 옛날의 전설을 숨긴 듯, 
몽그라지도록 긴 세월에 닳고 닳은 불로고분입니다. 
    
황량하고 묵은 벌판에 헤집듯 파고드는
늦가을 석양빛 그림자 길게 드리운 때.
넘쳐나던 풀꽃과 푸른 잎새는 다 어디로 갔는지?
지친 듯 애절한 갈색 풀잎만 초라하게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풀꽃 시들고 사라진 허허롭고 황량한 둔덕, 
고적한 고분(古墳) 앞에 한 송이 개망초가 
천오백 년 외로움을 돋궈 피어 올린 듯
서리 즈음 계절도 잊은 채 홀로 피어 있어
또 한 점 고독을 보태고 있었습니다. 
  
개망초! 웬만한 곳 어디나 지천에 깔린 풀,
구한말 경술국치 무렵에 들어온 북미산 귀화식물입니다.
조선말, 철도공사를 위한 침목에 묻어 들어와 
한일합병 당시 전국으로 퍼져나가 자리 잡은 풀꽃인데
나라가 망할 때 들어와 전국에 번성한 꽃이라 하여 
망초 혹은 망국초라 불리었다고 전하는 망초와 비슷한 종(種)입니다.
   
꽃은 망초보다 훨씬 더 크고 예쁜데도 
망초와 비슷한 모양의 잎과 줄기, 생태 습성을 가졌으며 
같은 시기에 들어온 귀화식물이라서 
망초에 ‘개’라는 접두사를 덧붙여 개망초라 불렀다고 합니다.
꽃 모양이 마치 계란 프라이처럼 생긴 데에서 
일명 ‘계란꽃’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도 흔해서 홀대받고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찬바람 서리에 얼어붙고 시들 때까지
끈질기게 꽃을 피우며 사라져가는 개망초입니다. 
   
(2017. 11. 18. 대구 불로고분군에서)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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