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젊은 날의 기억 [허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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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젊은 날의 기억

2017.12.04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젊은 시절의 기억에 마주치게 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뿌리깊은 나무’ 잡지의 발행인이던 한창기를 소개하고 있었고, 리모컨은 그대로 멈춰지고 말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으로 성공한 한창기가 잡지를 창간해 의욕적으로 이끌어가는 내용이었다. 
얘기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화면을 주시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이 잡지에 몸담았던 사회 초년병 시절의 기억이 마치 활동사진 장면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의 20대 중반 때였으니, 벌써 40년이나 지나간 아득한 시절의 얘기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이름 자체가 한글로 적힌 용비어천가에서 따온 것으로, 그때까지의 상식으로는 어색하면서도 참신한 작명이었다. 이에 앞서 한창기가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사보로 ‘배움나무’를 발간했고 뿌리깊은 나무가 이를 이어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한글 사랑은 거의 외골수였다. 잡지를 포함한 대중 인쇄매체 가운데 처음으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원칙을 도입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한글 사용을 떠나 잡지 내용에서도 눈길을 끌 만했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가려워하는 데를 찾아가며 긁어주려 애썼다는 점에서 당시 구성원의 한 명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 창간되어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폐간되면서 기껏 4년 남짓에 명맥이 그쳤으면서도 지금껏 이름이 널리 기억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가 뿌리깊은 나무에 편집기자로 들어간 것이 1978년 8월께다. 잡지가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때 김형윤 편집장의 추천으로 한창기 사장의 간단한 면접을 거쳤다. 면접이라야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 기본실력을 테스트하려는 게 아니라 같은 식구로서 앞으로 잘해 보자는 격려의 얘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면접을 보면서 느낀 한창기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멋쟁이였다. 몸가짐도, 옷차림도 깔끔했다. 웃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거만하거나 거들먹거리는 티는 느낄 수가 없었다.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껏 그를 돌아보는 사람마다 비슷하게 얘기하는 것으로 미뤄 내가 잘못 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때 뿌리깊은 나무 기자들은 취재도 하고 기사도 써야 했지만 외부 필자의 원고를 우리말 표현에 맞춰 가다듬는 작업도 소홀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권위자가 썼더라도 반드시 담당기자가 꼼꼼하게 고치곤 했다. 물론 내용을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였다.
이렇게 글이 고쳐지는 바람에 필자에 따라서는 기분이 상하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우리말을 살려 쓰려는 뿌리깊은 나무의 기본 방침이라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면서부터는 거부감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방침은 발행인인 한창기의 유별스런 고집이 아니었다면 관철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 ‘한앵보’라는 필명으로 사회비평 칼럼을 쓰기도 했는데, ‘앵보’라는 이름이 ‘사사건건 트집 잡는 성깔쟁이’라는 뜻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처럼 한글을 사랑했고, 전통문화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나타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서도 판소리 전집을 냈고 잎차 보급에 앞장섰으며 방짜그릇과 칠첩반상기 재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면에서는 또한 풍류가였다. 그렇다고 양반이나 선비류의 취향에만 쏠렸던 것은 아니다. 장터바닥과 산골짜기 화전마을 토박이들의 생활방식에도 깊은 애정을 보였던 사람이다. 풀뿌리 서민들의 가슴속 한을 풀어낸 '민중 자서전' 시리즈가 그 결과물이다.
그는 기자들이 쓴 기사에도 일일이 관심을 나타냈다. 내가 지금은 없어진 한강 밤섬 배목수의 얘기를 썼을 때도 그의 관심은 남달랐다. 배목수의 표현대로 ‘밑구멍’을 ‘밑구녕’이라고 썼을 뿐인데, 그의 칭찬은 몇 번이나 이어졌다. 어느 땐가는 고향인 벌교 뒷산에서 따왔는지 알갱이가 작은 토종밤을 주머니에서 몇 알 꺼내주며 귀중한 보물인 것처럼 은근히 자랑하던 모습도 기억에 새롭다.

한창기가 한국에 파견된 미군들에게 책을 팔아 세일즈맨으로 이름을 날렸을 만큼 영어 실력이 뛰어났으면서도 어떤 연유로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는 지금도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한복 차림이나 양복 차림에서 똑같이 멋쟁이로 어울린다는 점이다. 술은 한모금도 못하면서 담배는 즐겨 피웠다는 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종로2가의 불고기집에서 회식을 하던 중 신발장에 벗어놓은 그의 구두가 없어져 버렸는데, 버럭 화를 내면서 맨발로 그대로 뛰쳐나갈 만큼 불같은 성질을 보여주기도 했다.

뿌리깊은 나무가 강제 폐간되자 나는 모회사인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 배치돼 미국 시카고 본사와 텔렉스를 주고받는 업무를 잠시 맡았고, 그 뒤 전경련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뿌리깊은 나무와의 인연도 끊어지게 된다. 신문기자로 새출발하게 되면서 옛 편집실에 몇 번인가 들렀고, 한창기 사장을 두어 번 만난 것이 그 이후 이어진 인연의 전부다. 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그는 나름대로 평정심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점만으로도 여전히 멋쟁이였다.

그의 부음에 접한 것은 1997년 2월.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여성지인 ‘샘이깊은 물’을 내고 열정을 보이던 중 뜻하지 않게 질환을 얻은 것이었다. 예순한 살의 한창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으니, 그를 아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아쉬운 이별이었다. 병석에서 자꾸 수척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면회를 받지 않았다는 뒷얘기에서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빈소가 차려진 서울중앙병원에서 장지로 떠나는 영구차에 몇 발짝이나마 운구에 참여했던 것이 작은 위안으로 남아 있다.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며 문득 되살아난 젊은 날의 아스라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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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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