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떠나온 그곳을 찾아서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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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떠나온 그곳을 찾아서

2017.11.14

일찍이 중학교를 마치고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으로 고교 진학 차 안동을 떠나온 후 저는 고향이란 곳을 제대로 찾아본 적이 없습니다. 방학 때 가서 가업을 도우며 숙제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곤 했지, 여기저기 주변을 돌아다녀 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역마살의 직업을 택하였기에 평생의 삼분의 일을 해외에서 보내다 보니 고향은 자꾸만 멀어져 갔습니다. 그 많은 조상님 제사도 대개는 주손(主孫)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 치르게 되니 고향에 갈 일이라고는 연례행사인 시사(時祀)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그마저도 이런저런 구실로 못 가고 만 것이 비일비재(非一非再)였으니 고향은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인 양 돼버렸습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 기분 좋지 않을 또래 분들이 없겠지만 공자님의 말씀이라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蹂矩)의 때가 임박하니 지금껏 살아온 나의 삶이 이 숫자에 걸맞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라는 해석을 그대로 실제에 옮기다가는 큰 망신을 당할 일임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고희(古稀)를 앞두고 최소한 전보다 조금은 더 철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고향이 다시 고향으로 보이기 시작한 게 조금이라도 철이 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 친상(親喪)으로 안동 선어대(仙漁臺) 가족 장지에 다녀오는 길에서 느낀 고향의 정취가 어찌 그리 살가운지,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태백과 소백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도 눈인사를 보내고, 붉고 노랗게, 또 갖가지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산과 들도 고향의 품으로 달려가는 저를 정겹게 맞이해 주는 듯했습니다. 좁은 길이 넓어져서 생소한 도로가 되었고 낯익은 들판이 아파트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고향의 땅 냄새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타관 생활을 오래 하면서 누가 고향을 물어보면 언뜻 안동이라고 대답은 하면서도 어딘가 좀 켕기었던 것은 고향에서 멀어져 오기만 한 제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 안동이라고요? 대단한 고향이시군요. 우선 양반이잖습니까? 아니 뭐 다 그런 것도 아니죠. 고집도 세지만 전통이 얼마나 깊은 곳입니까? 그렇지요.” 대략 이렇게 주고받게 되는데 정작 안동을 깊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따금 겪은 고향 사람들의 고지식(固知識)과 ‘지독한’ 억양의 그 유별난 사투리에 대한 기억이 저를 은근히 위축시켰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정신문화의 수도(首都)’임을 요란스레 내세우고 있는 안동을, 내고향을 알기는 좀 더 알아야겠다는 자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정신문화의 수도라고요?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문화면 문화지, 무슨 정신문화람? 하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의구심이 일던 차에 얼마 전 시사에 맞춰 아예 하루를 앞당겨 안동에 내려가서 고향을 좀 더 알아보겠노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침 옛 친구들이 안내를 해 주겠다고 나섰는데 과연 이들은 일찍이 고향을 떠난 저를 무척이나 배려해 주었습니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으로, 그리고 최근 지명도가 높아져 관광객으로 붐비는 임청각(臨淸閣)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십 수 킬로 떨어진 길안마을까지 데리고 가서 기어이 민물고기 매운탕 맛을 보여주기까지 했답니다. 내륙인 안동에서 강에서 잡은 물고기 이상으로 고향 산천의 맛을 전해줄 것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향의 맛을 되새기며 저의 마음은 다시 고향 안동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날 저녁에는 민선 시작할 때 두 차례 안동시장을 지낸 사촌형님과 시간을 보냈는데 형님은 안동 없이는 못 살 정도로 억척스럽게 이 도시에 애착을 가지신 분이라 내뱉는 마디마디가 안동의 역사요, 문화이자 전통이었습니다. 찬찬히 들어본 즉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안동이라는 고장이 거부할 수 없는 우리 문화의 큰 축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수는 없었습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사실상 경북 북부의 행정과 교육, 군사의 수도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유림의 고향이요, 선비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요. 왜란 당시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할 만큼 의연한 기풍이 있었고 우리나라 서원의 삼분의 일이 안동에 소재할 만큼 학문이 융성하였던 곳이지요.

무속부터 시작하여 불교, 유교, 심지어 기독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화가 안동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우리나라 문화 전통의 거대한 기둥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증거들이 안동 시내와 주변에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내세울 수는 없지만 임청각 앞 법흥사 칠층 전탑(塼塔)은 당(唐)대에 화엄 불교가 여기에서 융성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이곳이 유교, 특히 성리학의 중심지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퇴계학 연구 센터로서 역할을 하고 있어 이 땅에 유림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많은 인사들이 안동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입니다.

하회에서는 부용대(芙蓉臺)에서 시작하여 서애(西崖)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여기서 하회마을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면 공연한 시간 낭비가 되겠지만 이 마을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따로 와서 봐야 한다는 것만은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저로서도 하회는 앞으로 적어도 세 번은 더 와야 한다는 것이니 생각만 해도 즐겁습니다. 초행의 방문자를 온통 취하게 하는, 가을 빛 하회 산천의 멋 또한 형용하기 쉽지가 않으니까요. 물이 돌아가는 마을, 하회의 가을 풍광이 참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이어서 병산서원은 말 그대로 처녀 방문이라 놀라움이 더욱 컸습니다.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을 마주보는 곳에 지어서 병산서원이란 이름이 붙었다니 12폭 병풍을 연상케 해 주는 멋진 작명이 아닙니까.

서원의 핵심 건축물인 만대루(晩對樓)에 서서는 연전에 세계적인 건축가 프랑크 게리(Frank Gherry, 1929. 2.28~)가 10년 만에 다시 찾은 종묘 앞에서 그전 방문 시의 감회를 다시 새겼다는 기사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지금껏 본 것 중 선(線)의 미학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난 건축물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직선에 가깝게 죽 뻗은 처마와 누마루 사이의 공간을 뚫고 시야에 들어오는 낙동강 상류의 물줄기는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는 듯했습니다. 만일 그가 언젠가 안동에 와서 병산서원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지 상상을 해봅니다. 아마도 종묘 앞에서 지른 탄성에 버금가는 감탄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외한의 눈으로도 만대루의 입지랄까 사이트 플랜(Site Plan)은 완벽할 뿐 아니라 개념설계와 실시설계까지 하나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아, 이런 보물들을 왜 진작 와서 보지 못 하고 지금에야 왔는지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일말의 회한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이 아름다운 내 고향을 제대로 알기 위해 아직도 돌아다녀야 할 곳이 한참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니 먹지 않은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다시 찾은 고향에 대한 이 감회의 글은 다음에 이어질 안동 이야기의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밤이라서 세세히 보지 못한 월영교(月映橋)는, 떠난 서방님에게 자신의 머리칼로 짠 미투리와 섬섬옥수로 써내려간 서한을 관에 넣어둔 것으로 잘 알려진 400년 전 원이엄마 이야기와 한데 어우러져 있다고 하지요. 이런 흥미진진한 스토리들을 어찌 한꺼번에 다 풀어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다시 돌아온 고향의 이야기를 슬쩍 던져버리듯 한번에 써버리고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아마도 다음 글은 내고향 안동에 대한 긍지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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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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