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기술, 소통의 자세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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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기술, 소통의 자세

2017.09.28

아들과의 식사 약속이 있는 날엔 늘 마음이 설렙니다. 젊은 시절 잘못된 생각으로 아들 하나만 달랑 낳고, 그나마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한 시간이 태부족이었던 걸 뒤늦게 후회하면서. 그래서 아들이 부르기만 하면 주말 친구들과의 즐거운 산행도 펑크 내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슬슬 아들과의 식사 시간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특히 시사 문제가 화제에 오르면 아들은 저나 아내의 의견을 똑 부러지게 반박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자유칼럼에 대해서도 칼날 같은 비판을 가합니다. 때때로 “햐, 이놈 많이 컸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때엔 “아니, 얘가 세상 얼마나 살았다고 아비를 가르치려 들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마찰을 일으킬 시사 관련 얘기는 피하고자 애쓰는 편입니다. 모처럼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조심이 방심의 틈을 비집고 나와 기어이 언짢은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차 한 잔 마시자며 옮긴 자리였습니다. 아들은 최근 지방 출장을 다녀오며 느낀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낙후된 지역의 이야기가 그 지방 사투리로까지 번졌습니다. 그러다 일부 편향된 시각 때문에 제 고장 사투리를 애써 감추려는 경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거기에 제가 다소 엉뚱한 토를 달았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건 그런데, 또 한편 지역에 따라서 사람들의 언어에 대한 적응력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아.”라고.

제 말이 끝나자 아내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게 아니고, 혹시 피해를 보게 될까 봐 제 고장 사투리를 감추려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 것이라며 아들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재차 말했습니다. “그 말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지방에 따라 언어적인 성격이 다른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라고.

아내가 딱하다는 듯이 또 한 번 아들의 말을 설명했습니다. 저는 다급해졌습니다. ‘내 말을 아들의 말에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구나.’ 그래서 세 번째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그 말을 이해하고 동의해.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라니까. 내가 말하는 건 언어 구사의 구조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니까.” 그러나 아들도 아내도 아예 제가 아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다 그랬다면 제가 잘못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들과 아내에게 화를 내며 제 말을 녹음으로 확인시켜 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제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은 데 대해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벌써 세 번째 아들의 말에 동의한다고 전제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습니다. 평생 언어 소통을 업으로 삼아 온 가족 간 대화에서조차 벽에 부딪히다니.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얼른 바깥바람이라도 쐬어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좋을 듯했습니다. 잠시 후 자리에 돌아왔으나 분위기는 이미 썰렁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모임은 어수선하게, 섭섭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평생 글을 읽고 쓰며 살아온 탓에 저는 우리말과 글에 대해 꽤 큰 관심을 가져온 터입니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경상도에서 피란살이하며 특히 백두대간 동쪽 위아래 사람들의 억센 성격과 말씨의 유사함에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성인이 되어 경험한 강원도 사람들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아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평안도에서 전라도까지 서쪽 위아래 사람들의 말씨는 훨씬 나긋나긋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산악에 갇혀 살아온 동쪽 사람들은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성격도 말씨도 거세고 삼각꼴로 굳어졌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야가 많은 서쪽 사람들은 탁 터진 지리적 환경의 영향으로 성격과 말씨가 사각꼴로 유연하고 가변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이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 생각이고 관심사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관심도 이해도 얻지 못할 제 생각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한 꼴입니다. 아들이 말하고자 하는 취지와는 동떨어진 발설이었던 것입니다. 아내도 웬 뚱딴지냐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도 아내도 성의를 기울여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원 말을 뒤집거나 희석시키려는 뜻으로 오해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아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말로 끝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유쾌한 감정으로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가족 간에, 더구나 그렇게 심각한 토론의 자리도 아니었는데, 하는 억울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나이 들수록 말이 많아진다고 친구들 사이에도 서로 경계하곤 합니다. 말을 덜 하라고 입은 하나고 많이 들으라고 귀는 둘이다, 열어야 할 건 입이 아니라 지갑이라는 말도 숱하게 듣습니다. 일단 남의 말은 중간 토막을 내지 말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게 예의고 도리입니다. 그 말을 바르게 이해해 준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습니다. 그러나 가족 모임에서도 친구 모임에서도 남의 말은 못 참아 끼어들어 난도질하고, 제 말은 목청 높여 떠드는 게 현실입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바람직한 소통을 위해 우선 저부터 입 열기보다 귀 열기에 더욱 힘써야 할 것 같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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