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아에서 시인으로"


돈 후안(Don Juan)

유럽 예술사에 지속적인 영향끼쳐


  중세 스페인의 전설 속 인물인 돈 후안(Don Juan)처럼 유럽 예술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도 없는 것 같다. 세비야의 바람둥이 백작으로 전 유럽을 떠돌아다니며 여자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쾌락이 충족되면 그녀들을 매몰차게 버렸던 그였다. 중세의 엄격한 신학적 세계관 아래에서 그는 반드시 징벌을 받아야 할 탕아이자, 동시에 종교의 위세에 짓눌려 있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찰나의 산들바람처럼 짧은 일탈적 쾌락을 느끼게 해주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는 기사장(코멘다토레)의 혼령에게 징벌을 당해 지옥으로 떨어진다. ‘방탕한 자는 벌을 받는다.’ 이것이 돈 후안 전설의 핵심이다. 그것은 이 서사를 최초로 문자화된 형태로 기록해낸 티르소 데 몰리나 때부터 내내 이어져 왔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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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돈 후안 Don Juan>.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지휘, 북독일방송교향악단. 돈 후안을 낭만적 영웅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음악으로, 슈트라우스 특유의 복잡하면서도 윤후함이 넘치는 빛나는 관현악이 지극히 찬란하고 충만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 전통적인 혹은 뻔한 권선징악의 서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 Don Giovanni>(돈 후안의 이탈리아식 표기)를 쓰고 나서 부터다. 베네치아의 수도사 태생으로, 종교보다는 세속의 쾌락에 탐닉하다 이 바다의 공화국에서 추방된 작가 로렌초 다 폰테가 1차로 ‘돈 후안’을 삐딱한 형태로 다듬었다. 


사람들이 지금껏 돈 후안의 서사를 소비하는 방식은 그의 방탕하고 화려한 여성행각을 충분히 간접 체험한 다음에, 뭔가 도덕적인 찜찜함이 몰려올 즈음에 기사장의 혼령인 석상 귀신이 나타나 그를 준엄하게 징벌하는 형태였다. 이건 21세기까지 반복되는 대중 드라마의 전형이다. 난봉꾼 같은 졸부의 아들이 돈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니며 온갖 쾌락을 즐기는 걸 지극히 기분 나빠 하면서도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것을 비밀리에 선망한다. 결국 두 가지 욕망이 상충되니, 보다 안전한 결말이 내려진다. 그러니까 그는 마지막에 파멸해야만 한다. 현실이야 어떻든 돈으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수집하는 캐릭터가 용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페라 <돈 조반니>는 대중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오페라 속의 바람둥이 돈 조반니는 세간의 명성과 달리 애정행각에서 거듭 실패를 경험한다. 단 한 명의 여자와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보는 사람이 조바심 내지 짜증이 날 지경이다. 게다가 그는 마지막에 석상의 징벌을 받기는 하지만, 석상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전혀 듣지 않는다. “회계하라”는 기사장의 포효에 코웃음을 치는 돈 조반니다. ‘네가 지옥으로 가라니까, 그래 한번 가 줄께.’ 뭐 이런 식이다. 두려움에 떨며, 그간의 악행을 반성하며 지옥불로 밀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발로 뚜벅뚜벅 걸어내려간다. 모차르트와 다 폰테가 손을 잡고 만들어낸 오페라 가운데 가장 시니컬하고 차가운 결말이다.


다 폰테의 이 놀라운 대본에 모차르트가 깊이를 더했다. 그의 ‘돈 후안’은 음악의 뼈대와 자기주장이 전혀 없다. 모든 막, 모든 장면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돈나 안나, 돈나 엘비라, 기사 돈 오타비오, 심지어 그의 하인인 레포렐로 등이 제대로 된 아리아를 부여받은 것과 달리 그에게는 아리아가 없다. 지나가는 짧은 발라드와 애처로운 금단 증상의 토로처럼 느껴지는 ‘샴페인의 노래’ 정도가 음악의 전부다.


거기다 오페라 속의 돈 조반니는 사무친 비애감과 짙은 고독의 음영에 갇혀 괴로워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매 장면의 음악이 달콤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정조가 흐르는 건 이 까닭이다.


덴마크의 위대한 오페라 연출가 카스퍼 홀텐이 몇 년 전 아예 이 오페라를 바탕으로 영화를 하나 찍었다. <후안 Juan>이라는 제목이다. 후안(돈 조반니) 역에 영국의 바리톤 크리스토퍼 몰트만, 그를 따라다니는 레포렐로는 베이스 미하일 페트렌코 – 그러고 보니 모두들 서울을 다녀간 성악가들이다.


(영화 <후안>에서 우수어린 눈빛 연기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크리스토퍼 몰트만)


영화 속 몰트만의 눈빛 연기는 이 오페라의 가장 깊숙한 본질을 보여주었다. 소비로 점철된, 쾌락으로 수식된 돈 조반니라는 남자의 인생은 고고하고 귀족적이면서도, 동시에 빈 껍데기였다. 그 남자는 자신의 공허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 허망한 쓰라림이 영화의 전편을 감싸고 돌았다.


사실 오페라 속에서도 돈 조반니는 죽어가듯이 탄식하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자주 노래한다. 특히나 2막에서 돈나 엘비라의 하녀를 유혹하는 노래는 지극히 달콤하지만, 사실은 처연한 엘레지처럼도 들린다. 이제 우리 시대의 돈 조반니는 더 이상 번쩍거리는 플레이보이가 아니다. 이미 그는 애처로운 비가(悲歌)를 써내려가는 고독한 시인이 되었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창가로 나와주오 사랑스런 연인이여 deh vieni alla finestra’, 

바리톤 카를로스 알바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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