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왜 정부가 뒤늦게 나타나 ‘퍽’ 치나요"


남북 단일팀 추진에 여자 대표팀 한숨

뒤숭숭한 아이스하키 훈련장

대통령 발언 뒤 갑론을박 많지만

정작 선수들 목소리엔 관심 없어

북, 엔트리 절반 요구 땐 10명 탈락

“동료가 못 뛰는 상황 오면 화날 것”

본지 온라인 설문 “단일팀 반대” 95%

국민들도 “정치적 이용 안 돼” 다수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7개월 앞둔 지난 20일. 도종환(62)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24일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단일팀 구성을 제안했다. 29일 방한한 토마스 바흐(64·독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문 대통령의 제안은 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한다. 북한에 평창올림픽 출전을 권유하며 돕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한국 여자아이스하키대표팀은 개최국 자격으로 내년 2월 평창올림픽에 출전한다. 북한은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만약 한국 정부의 주도 하에 남북단일팀이 현실화된다면 전체 엔트리 23명 중 한국선수 절반 이상이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할 수도 있다.

 

한국 여자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심경은 어떨까. 28일 서울 태릉선수촌을 찾아가 선수들을 만나봤다. 이들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광화문 광장에 나가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정말 단일팀이 되는 건가요? 그동안 그 누구도 저희한테 말해주거나 상의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지난 4월 강릉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맞붙은 한국(아래)과 북한(위) 여자아이스하키대표팀. 단일팀이 

구성될 경우 사진에 나온 한국선수 중 누군가는 올림픽 출전의 꿈을 접어야 한다. 강릉=임현동 기자


대표팀 골리(축구로 치면 골키퍼) 한도희(23)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선수들은 아직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어떠한 입장도 전달받지 못했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틈날 때 마다 뉴스를 찾아본다.

 

공격수 한수진(30)은 “지난 20일 처음으로 소식을 접했을 때는 선수들 모두 믿지 않았다. 하지만 뉴스가 계속 나오고 대통령까지 말씀하신 뒤 선수들의 걱정이 커졌다.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여자아이스하키 대학팀이나 실업팀이 하나도 없다. 선수들은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넘게 하루 6만원의 국가대표 훈련 수당 만을 받으며 버텼다. 주말엔 수당이 없기에 한달에 100만원 정도 받는다. 그래도 올림픽 출전 꿈을 위해 이제까지 버텨왔다.

 

공격수 박종아(21)는 “연세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한수진 언니는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했다. 강릉 출신인 나는 중학교 2학년때 홀로 서울에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면서 아이스하키를 계속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다른 꿈을 접고 올림픽 만을 바라보고 피땀을 흘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북 단일팀이 구성돼 북한이 23명 엔트리 중 같은 수의 선수 출전을 요구할 경우 한국 선수 절반이 올림픽 출전의 꿈을 접어야한다. 한수진은 “우리 23명의 대표팀 선수들은 아이스링크에서 함께 뛰고 넘어지면서 가족처럼 끈끈한 사이가 됐다. 만약 내가 뽑히더라도 동료들의 절반이 탈락하는 상황이 온다면 화가 날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IOC에 요청해 단일팀 엔트리를 늘려 한국 23명에 북한선수들을 추가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공격수 조수지(23)는 “다른 나라 팀들이 형평성 논란을 제기하며 반발할 수도 있다. 전체 엔트리를 늘린다 하더라도 경기에 나설 수 있는 게임 엔트리는 22명 뿐이다. 결국 우리선수 중 못 뛰는 선수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캐나다 출신 새러 머리(29) 한국대표팀 감독이 남북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단일팀이 구성되면 전력 약화도 불가피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10위권이었던 북한은 최근 전력이 부쩍 약해졌다. 한국은 지난 4월 강릉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디비전2 그룹A(4부리그)에서 북한을 3-0으로 꺾는 등 5전 전승을 거두며 3부리그로 승격했다.

 

조수지는 “남북팀 간에 실력차가 있다. 더구나 대회까지 7개월 밖에 남지않아 호흡을 맞추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박종아는 “지난 4월 세계선수권 당시엔 북한선수들 주변에 경호가 삼엄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단일팀을 하라니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홈페이지를 통해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단일팀 구성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95%(1182명 중 1125명)나 됐다. “남북단일팀보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 선수들의 행복이 먼저 아니냐”는 댓글도 달렸다.

 

조수지는 “국민들이 우리 마음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라며 “스포츠는 순수하게 스포츠로만 바라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린·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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