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교포 대표는 아닙니다 [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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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교포 대표는 아닙니다

2014.10.20


작년부터 시작된 두통 증세는 약을 먹을 때뿐 완전 치료가 되지 않고 있어 다시 한 번 스트레스의 원인을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왜 집 밖에 나와 모든 뉴스를 차단하고 있으면 머리가 덜 아픈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장 큰 요인이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속상하고 나쁜 소식들을 전해주는 한국과 해외 매체였습니다. 자유칼럼에 글을 계속 쓰는 한 고국에 관한 사건과 소식을 항상 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제인데, 한국의 소식 중 가장 기분 나쁜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정치인들의 파당과 사람들의 물고 늘어지기 싸움입니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빌미 삼아 국민을 이용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시위를 하는 게 매우 피곤합니다.

임진왜란 무렵 동인 서인으로 시작된 붕당이 그 이후 노론 소론 남인 북인으로 갈라져 4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악습을 뿌리 뽑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국민이면 누구나 절감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조선 21대 왕 영조는 탕평책을 선언했지만 왕 역시 탕평을 해 보지도 못하고 노론 소론 붕당의 희생물로 아들 세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들었습니다.무소불위의 왕도 힘이 없어지면 자기 살 길을 위해 자식도 희생시키는 것이 정치의 필요악인지, 정치도 모르고 좌파와 우파가 무언지 헷갈리는 나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조시대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을 만큼 받은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국익과 국민의 이익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당론과 개인의 이익과 힘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싸움에 국민과 기업 또한 휘말려 살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은 해외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들의 후안무치한 행위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종북 세력이 국외에서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추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40여 년 전 LA에서 공부하던 시절 남편이 십 년쯤 나이가 많은 대학동문 L씨 밑에서 가끔 파트타임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을 한 대가로 개인수표를 받곤 했는데 그 수표는 언제나 부도가 나서 결국 그 일은 그만두었지만 그가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가는지 그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그가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 여권을 가지고 가끔 북한을 드나든다는 소문, 북한에서 받은 자금으로 생활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몇 안 되는 한국마켓에 가면 입구에 '로동신문’이라는 북한이 발행하는 무료 신문이 있었는데 북한과 미국의 서신 왕래가 가능하지 않았던 시절 철저한 반공 국가인 미국의 대도시 LA까지 어떤 경로로 그 신문을 누가 운반해 왔을까? 나는 무서웠습니다. 어쩌면 L씨는 유학생들과 많지 않은 교민들을 선동하기 위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고 북한을 오고 갔으리라는 추측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로동신문’이라는 빨간 글자와 북한의 노동복을 입은 사람을 실은 표지가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어쩌면 그때부터 교민의 수가 가장 많았던 LA는 종북 세력의 터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선배 L씨의 시대는 끝났지만 바톤을 넘겨받은 걸로 추측되는 종북 성향의 사람들은 계속 세력을 확장해온 걸로 보입니다. 현재 LA에 있는 반정부 친북 세력의 리더는 그 또한 남편의 선배로 고등학교 동문이자 대학교 동문이며 대학 학보사에서 같이 일했던 70세의 N씨입니다. 어렴풋이 그가 LA 교포신문인 H일보에 근무했을 때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N씨는 오랫동안 반정부 활동 및 북한을 찬양 선동하는 일을 벌여 왔습니다. 지난달 대한민국 대통령의 유엔 방문 때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시위를 주도했으며 뉴욕타임스에 한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광고, 반정부 세력 미시 USA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정부와 대통령 비방을 하도록 막후 조정을 했다는 말, 그 배후에는 N씨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유신 독재와 싸우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미국에 발도 디딜 수 없었고 남한에 살던 사람들조차 해외 여권과 미국 비자를 받기가 어려웠던 시절, 그가 정말 민주투사였고 핍박 받았다면 1970년대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 정권 아래서 어떻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지 않았는지, 또 대한민국의 여권과 미국 비자를 받았는지도 석연치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누구나 여권과 비자를 쉽게 받을 수도 없었거니와 정부의 신원조회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 독재와 싸웠고 그게 싫어 조국을 떠나왔다면 그렇게 받기 어려운 여권을 가지고 미국으로 나온 그가 왜 북한의 독재는 옹호하고 있으며 왕조국가처럼 30대의 젊은이가 3대째 세습을 누리는 북한을 찬양하는지, 어쩌다가 친북 세력이 되어 북한을 60여 차례도 넘게 드나들고 종북 활동의 공로를 인정 받아 북한에서‘국제 김일성 상’까지 받았는지 충격입니다. 그 부조리와 모순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또 북한 주민들이 독재와 기아에 못 견뎌 죽어갈 때도 그가 북한의 인민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지, 북한 정권을 위한 공적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열정과 이념이 투철한지, 정말 민주화된 남북통일에 대한 그의 철학과 신념이 확고한지 그의 사상의 진위가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헌법에서 권리 중 가장 으뜸인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를 십분 이용하고 있으며 환경이 좋은 집에서 편리함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그의 자택 사진과 그의 가족들이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부르주아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이상의 삶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반 대한민국 정부 시위 운동, 친북이라는 그의 선언과 정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경입니다.

N씨는 김일성 주체사상의 신봉자입니다. 그는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권이 보장된 사회다.'라고 말합니다. 오죽했으면 얼마전 미주 동포사회의 유명 인사인 심리학 박사 Y씨가 N씨와 대학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겠습니까? N씨의 고발로 Y씨가 구속된 것은 미주 동포 사회의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N씨 자신이 시인했듯 북한에서 상까지 받은 그는 미국 시민권을 방패 삼아 남한과 북한을 드나들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미국 여권을 가지고 한국의 이민국을 무사히 통과하고 서울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국내에 살고 있는 일부 정치인 사회운동가 시민들은 보안법 전면 폐지를 운운하고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가 그 어느 국가보다 보장된 반공 국가인 미국도 국가에 해가 되는 경우에는 자국의 시민일지라도 엄청난 조사와 제재를 가합니다. 그래서 CIA와 FBI의 방대한 권력 때문에 문제가 터질 때도 있지만 CIA, FBI는 국가 원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역이며 CIA를 해체하자거나 FBI의 힘을 약화시키는 법을 고치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미국에서 받고 있는 혜택과 풍요를 북한주민들이 누릴 수 있길 바란다면, 민주화된 조국의 통일을 원한다면, 그것이 그가 지향해온 이념과 철학이라면 자신부터 미국 시민권을 버리고 북한에 가서 북한의 국적을 받고 북한에서 힘겹게 사는 인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통일운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시민권이 갖는 힘을 이용하지 말고 북한 여권으로 해외 활동을 하며 북한 주민의 삶을 위해 통일을 위해 헌신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진정 그가 모국을 사랑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또한 N씨뿐만 아닙니다. 현재 대한민국 내부에서도 3대 독재를 세습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으면서도 대한민국 정부를 독재 운운하며 북한을 찬양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사람들,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있다면 그들도 북한으로 가서 북한 인민과 함께 숨 쉬며 살아야만 애국자일 것입니다.

미국엔 유신시절 이후 핍박을 피해 온 한국의 지성인들이 뉴욕 시카고 LA 등지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신정권에 피해를 입었고 증오와 상처를 잊을 수 없다 하여 N씨와 같은 행위는 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열심히 조용하게 이민 온 국가의 법에 충실하며 대한민국의 자손으로 조국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추태와 망신스런 행동을 하지 않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교민들이 대다수입니다. 미국의 몇 개 도시에서 20~30명의 시위대가 일으키는 시위가 수십 만 북미 교포들의 뜻이 아닙니다. 살기에도 바쁜 교포들은 뉴욕타임스에 조국을 배신하는 광고를 게재하는 데 동참하지도 않거니와 대통령이 방문하는 곳을 따라다니며 막말 시위로 국격을 손상할 시간도 없습니다. 이런 시위대가 과연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둔 교포일까요? 해외에서 국가 망신을 시키는 일부 한국인들에겐 교포라는 단어도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미워한다 해도 타인들 앞에서 내 부모를 망신시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부모는 내 모습이고 내 자존심이니까요.

70세 노인이 된 N씨의 얼굴을 인터넷 신문에서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35년 만에 본 사진 속의 그는 무척 변해 있었습니다. 그가 LA 한인촌 거리에서 젊은 한인여성 두 명과 시위를 하는 모습이 추하고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길이 그것밖에 없었을까?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인생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는 것, 꼭 저렇게 늙어가야 하는 것일까? 거리에서 외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어떤 신념도 철학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찌들고 늙어가는 한 불쌍한 노인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필자소개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에 디자이너로 종사.
현재 구름따라 떠돌며 구름사진 찍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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