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富)의 세습 VS 권력(權力)의 세습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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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富)의 세습 VS 권력(權力)의 세습

2014.10.03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창덕궁 앞에 역문관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장안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주를 보던 곳입니다. 이 역문관의 주인인 류충엽 씨가 쓴 <제왕격 사주 굶어죽는 팔자>에 ‘사주유전’이라는 글귀가 나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아주머니가 딸의 사주를 보여주었는데 그녀가 살아온 삶의 신산을 알고 있었던 류충엽 씨는 속으로 그녀의 딸만이라도 ‘사주가 좋았으면’하고 바라며 사주를 풀어봤는데 안타깝게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제는 그만 부귀영화를 누려도 좋을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식이네 손주네 하며 작명을 요청하며 내미는 사주는 왜 그리도 하나같이 좋은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사주가 유전되는 이유는 종자 때문일까요?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부귀영화를 대대로 누리며 살 수 있다면, ‘부자는 삼대를 못 간다’는 말이 나왔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주유전’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 너무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게 되고 못 가진 자는 더 궁핍해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자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맞나 보구나!”하는 한탄이 나옵니다.

우리 사회도 개인의 능력에 의해 계층 간 이동이 수월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고도성장을 이루던 시기에는 사회의 계층간 이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했던 노동자가 굴지의 재벌이 되었고 호떡을 구워 팔던 청년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해준 앞선 세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가 이분들의 세대에서 끝이 난 것은 매우 유감입니다.

<21세기 자본론>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부의 불평등은 돈이 돈을 버는 속도 즉,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거의 항상 높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에 허덕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가 부를 쌓게 되면 신 계급사회인 세습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며, 이 세습자본주의는 능력주의 가치를 훼손해 건강한 자본주의를 좀먹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살인하지 마라’는 십계명을 오늘날에는 ‘경제적 살인을 하지 마라’로 바꿔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탐욕스럽게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일침입니다만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은 경제적 살인에 해당하는 아픔을 겪은 우리에게는 뜨끔한 경고로 다가옵니다. 최근 한국 노년층의 자살이 4배나 급증한 것도 경제적 살인을 방치한 결과입니다. 현 정권이 ‘경제 민주화’와 ‘민생’을 외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서민들 가계의 주름살이 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풀리고 경제가 원만히 돌아가게 된다면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좀 나아질까요? 사실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지난 몇 년 간 우리 경제는 완만하게나마 성장해 나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나요?”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몇 년째 서민경제 활성화를 외치는데도 서민경제에 찬바람만 분다면 정부의 힘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정부의 의지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혹시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생각들이 정부의 의지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거대 자본의 힘이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영주의 아들은 영주가 되었고 농노의 자식은 농노였으며 왕의 자식들은 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는 하늘이 정해준 당연한 결과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엔 권력과 신분의 세습을 용납하는 곳은 지구상에 몇 곳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권력의 세습은 악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부의 세습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한 꺼풀만 뒤집어 보면 거대한 부는 그 자체가 거대한 권력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아들은 자동으로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재벌의 자손은 재벌이 됩니다. 게다가 대통령은 임기가 정해져 있지만 재벌은 회사가 존재하는 한 종신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권력에 대해서는 수많은 희생을 치러가며 견제장치를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금력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피케티는 글로벌 자본세와 최대 80퍼센트에 이르는 누진적 소득세를 통해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적인 접근만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달콤함에 젖어 있는 가진 자들의 저항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피케티의 꿈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변해야 합니다. 역사는 지금도 전진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누구도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만, 미래의 어떤 날에 우리 후손들이 “옛날에는 부가 세습되던 말도 안 되는 시대가 있었대.” “야, 그때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거지?”하며 우리를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게스트칼럼 / 유능화

비타민 S


아내가 제게 못마땅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저녁 식사 후 바깥 산책을 하지 않고 그냥 집안에 눌러 붙어 있는 것입니다. 식사 후 산책이 몸에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요.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특히 당뇨 약을 복용하는 저로서는 식사 후 산책을 하는 것이 혈당 강하에도 좋고 심신 안정에 좋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산책을 멀리하던 제가 요새는 저녁 산책은 물론 아침 산책까지 하니 아내는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란 모양입니다. 지속성에 대한 의구심도 당연히 있습니다.

제가 산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산책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한 후부터입니다. “걷기는 일석십조다.” “아침 산책은 행복의 시작이다.” “밤 산책은 황홀한 행복이다.” “산책은 최고의 행복이다.” 등등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부터는 저녁에는 물론 아침에도 산책을 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산책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니 산책이나 걷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걷기가 성가심의 대상이 아니라 행복과 건강을 위한 대상으로 인식이 되니까 걷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 것입니다.

행동의 변화가 있으려면 동기 부여가 필요한 법인데 <정의 내리기>가 동기 부여의 중요한 수단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하기 싫은 일이 있다면 그렇게 시도해 보기를 권합니다. 일단 정의를 새롭게 내리면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산책이 그렇고 병원 복도 청소도 “청소는 몸으로 하는 수행이다”라고 정의를 내리니까 훨씬 의미 있고 재미있는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아침 산책 시에는 밤이슬이 아직 맺혀 있는 갈대를 만져보며 갈대와 아침 인사를 나눕니다. 밤의 열기를 흡수하느라고 수고한 흙 길에도 수고했다고 미소 지으며 말합니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는 몸과 마음을 싱싱하게 해주니 더욱 고맙습니다. 밤 산책 시에는 또 다른 느낌을 갖습니다. 밤의 정적이 가득한 공원 숲 속을 거닐면 사유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느낌을 갖습니다. “걷기는 기도다’‘라고 정의한 아내의 경지까지는 못 가도 걷기는 명상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 걷게 되면 자연적으로 머리가 가벼워지니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자연적으로 상허하실(上虛下實)이 되니 몸도 가벼워집니다.

여의도 생태공원에 가로 4m, 세로 8m 되는 크기의 데크가 하나 있습니다. 밤 산책을 마무리할 무렵에 돗자리를 데크에 깔아놓고 벌렁 누워 아내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이 기분이 정말로 좋습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호사스러움(?)을 만끽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서 혼자서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자연을 가까이할 때 마시는 비타민을 비타민 G(Green)라고 합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생기는 비타민을 비타민 S(Star)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설악산 봉정암에서 쏟아지는 듯한 별을 볼 때와 같은 황홀감은 없지만, 몇 개의 별이라도 보면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방에서 별을 보는 기분과 밤거리를 거닐면서 별을 보는 느낌과 누워서 별을 보는 맛과 멋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별이 안 보일 때는 밤하늘의 구름도 볼 만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눈에 자극적이지 않은 밤 구름 또한 마음을 풍요롭게 합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찾고자 노력하면 모든 대상이 기쁨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가서 새롭고 신기한 것을 봄으로써 기쁨을 얻는 것도 좋지만 우리의 삶이 항상 멀리 가서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매사를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갖는 것임을 새삼 느낍니다.

필자소개

유능화

경복고, 연세의대 졸업. 미국 보스톤 의대에서 유전학을 연구했다. 순천향의대 조교수, 연세의대 외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서 연세필 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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