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에 피는 꽃이 아름답다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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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에 피는 꽃이 아름답다

2014.09.11


마당 일을 하면서 요즘 가장 대하기 어려운 것이 잡초입니다. 장미나 목련 등은 좋으면 그대로 두고 싫으면 없애든지, 스스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잡초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싫다고 없앨 수도 없고 좋다고 마냥 그대로 둘 수도 없습니다.  노루와의 전쟁을 선포한 적은 있지만 잡초에 대해서는 전쟁을 선포할 수가 없습니다. 노루는 쫓아내거나 범접하지 않도록 수단을 부릴 수가 있지만 잡초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러다보니 인간과의 관계에서 잡초가 오히려 갑(甲)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한가위 날 아침, 오래 방치한 탓으로 잡풀이 무성해진 마당을 손질하지 않을 수 없어 예초기를 들고 일단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갖가지 꽃이며 나무들과 함께 녹음방초를 이루면서 무성히도 자란 잡초에 예쁜 꽃들이 다소곳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저만이라면 어여쁜 이 잡초 꽃들을 적어도 한가위 명절 기간만큼은 그냥 두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정원을 통할(統轄)하는 아내의 채근에 못 이겨 어중간한 마음으로나마 이 성가신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당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처음엔 보기 싫은 잡초는 도구나 화학적인 방법을 써서 가능한 한 다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잡초에 대한 저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잡초로 불리는 작은 생명들에서 앙증맞은 꽃들이 예쁘게 핀 것을 보고는 ‘아름다움에도 귀천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또 ‘잡초와 잡초가 아닌 것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습니다.

한편, 해외에 나가서 들러 본 초원이나 정원에서 만난 잡초의 모습은 우리네 잡초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리스본의 어느 초원에서였습니다. 지나가다가 제 눈에도 익숙한 풀이 훌쩍 큰 모습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 마당에서는 보이는 대로 뽑아대던 하찮은 망초였는데 말입니다. 이처럼 잡초도 그대로 놔두면 나무처럼 의젓하게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어떤 별장의 정원에서 본 잡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잡초로만 알던 이 식물이 다른 나무들 사이에 당당하게 서 있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신분을 천하게 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드리드에 사는 국왕이 바르셀로나에 오면 묵는다는 여름 궁 뜰에서도 반듯이 깎아놓은 잔디밭에 잡초도 함께 깎인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잔디에 섞여 다양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잡초들의 모습이 보기에 싫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서 잡초를 보는 저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예초기를 들고 나가서는 정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요렇게 예쁜 꽃을 피우는 생명들을 어찌 일거에 잘라버리거나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보면 볼수록 잡초에서 피는 귀여운 꽃들이 수려한 장미나 목련, 또는 모란이나 백합보다 더 살갑게 마음에 담겨옵니다. 화초 목록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작은 생명들을 어찌 베어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 나름대로 예초 작업에 임하는 하나의 원칙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준다는 것입니다. 소위 잡초가 있음으로써, 이름 있는 꽃과 나무의 성장에 해가 되거나 또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경우엔 적절히 제거하고, 잡초들이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한쪽 편 자신들의 영역에 머물고 있을 때는 그대로 놔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장미의 영역, 잔디의 영역, 그리고 잡초의 영역으로 구분해서 대하자는 것입니다.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결국 인간과 식물 간 영역의 다툼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역을 존중하지 않고 무조건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월권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환경보호니 자연보호니 하는 말들이 나오게 된 것은 영역의 싸움에서 인간의 자의성과 무모성이 끝 모르게 나아간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잡다한 풀'이란 뜻풀이가 시사하듯 잡초에는 정녕 이름이 없는 것일까요?  “이름 없는 풀꽃은 없다.”란 말처럼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를 뿐, 잡초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름이 있어야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같이 당당한 존재들에 이름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읊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한데도 잡초에 피는 꽃의 이름에는 무관심한 것이 인간입니다.

누구나 마당에 심어 놓고자 하는 꽃들은 대부분 한자어로 돼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습니다. 장미나 목련, 모란이나 백합이 한자 이름을 지니고 있기에 더 근사하게 보이고 더 고상한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닐까요? 이와 달리 대표적인 잡초인 민들레는 순 우리말입니다. 무수한 잡풀들이 피워내는 꽃의 이름은 대부분이 순 우리말이라서 고상한 대접을 못 받아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자 성명이 보급되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도 잡초의 이름에 견줄 만큼 대부분 길고  자연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무영탑을 지은 ‘아사달’도, 역사책에 나오는 ‘노리사찌개’도 그렇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장미나 목련 같은 고상한 품종과는 달리 잡풀에서 피어나는 꽃은 필 때도 예쁘지만 질 때도 그리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년까지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잡초를 함부로 대해오다가 요즘에야 이를 알게 되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늦게라도 이처럼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볼수록 잡초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 말입니다.

자연세계에서 잡초도 그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을 터인데 오로지 인간에게만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인간사회에서도 흔히 이름 높은 사람들이 큰 대접을 받고, 이름도 없는 듯 하루하루를 지내는 민초들은 하찮은 존재인 양 낮게 대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초의 힘이 나날이 세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민초가 있어야 나라가 있듯이 잡초가 있어야 산이 있고 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민초의 힘이 커지듯 자연 세계에서도 이름 모를 풀꽃들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마당의 잡초에 대해 보다 더 관대해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예초기를 함부로 쓰지 않고 제초제를 함부로 뿌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그럼으로써 잡초와의 관계에서도 대결이 아니라 조화를 통해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풍성한 한가위를 맞아 인간사회나 자연세계에서 소수의 존재들, 이름 없는 존재들을 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이집트 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제주 소재 유엔국제훈련센터(UNITAR)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외국인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외국인거주환경개선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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