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멸망 카운트다운 'NWE 70년'- 핵무기 시대(Nuclear Weapons Era)에도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

 

노엄 촘스키 ·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언어철학과 명예교수

 

만약에 외계인이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인류의 달력을 BNW(핵전쟁 이전-before nuclear war)과 NWE(핵무기 시대- the nuclear weapons era)로 나눌지도 모른다. 후자에 해당하는 시대는 다 알다시피 1945년 8월 6일 시작되었다.

 

즉 스스로 파멸할 수 있는 지능은 달성했지만, 동물적 충동을 윤리와 지성으로 조절할 능력은 달성하지 못한 인간이란 이상한 종족의 멸종 카운트다운이 시작한 날 말이다.

 

NWE 첫날은 'Little Boy'라는 이름을 가진 단순한 핵폭탄의 '성공적' 발포로 시작되었다. 4일째가 돼서는 좀 더 섬세하게 만들어지고 기술적으로 월등한 'Fat Man'이라는 핵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에 새로운 경험을 안겼다. 그리고 5일 후 미국 공군이 말한 '대단원'이 이뤄졌다.

 

1,000대의 전투기, 폭격기를 동원한 미국의 공습이었다. 일본을 폭격하면서 동시에 '일본은 항복했다'는 전단을 사방팔방으로 뿌렸는데, 마지막 B-29 폭격기가 기지에 돌아오기 전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항복을 공식 발표하고 있었다.

 

NWE 시대의 상서로운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70년을 맞는 우리는 인류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이 남았는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핵무기와 핵무기 전략을 총괄하는 미국전략사령부의 지휘관이었던 리 버틀러 장군은 20년 전 이런 암시적 발언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NWE 시대에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이유는 "재능과 운과 신의 개입의 종합적인 결과라고 추측되는데, 아마 마지막 요소가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버틀러는 핵무기 전략 개발과 효율적 무기 배치를 담당하며 "핵무기의 위력을 가장 신뢰했던 사람 중 하나"였던 자신의 역할을 유감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핵무기가 우리에게 해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또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핵무기 보유 국가 지도자들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한단 말인가. 모두 합심해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핵무기 폐지를 외쳐야 하는 이 순간에 도대체 어떻게 이런 무모한 일이 지속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진 공산권에 대한 자동 총공격 계획을 자신이 본 "가장 무책임하고 터무니없는 발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소련의 대응책은 더 망측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경쟁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그 경쟁자가 종족 멸종을 가볍게 생각한다면 말이다.

 

냉전 초기의 생존

일반적인 지적 논리와 학문적 교리에 따르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가 안보'이다. 하지만 국가 안보라는 개념이 국민의 안위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너무나 많은데 기록을 잘 살펴보면 핵무기가 초래할 수 있는 인류의 멸망을 국가 차원에선 별로 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핵무기 시대 초기에 이미 입증된 바 있고 지금까지도 그런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NWE 초기 미국은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고 따라서 매우 안정된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구의 절반을 장악했으며 대서양과 태평양은 물론 바다 건너편까지 미국 통제하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전부터 미국은 이미 지구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리한 면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였다. 다른 산업국가들은 전쟁의 타격으로 쇠퇴한 반면 미국은 전쟁을 업고 도약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즈음 미국은 전세계 부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제조업 수용력은 그보다도 더 높았다.

 

그러나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핵무기가 장착된 대륙간탄도미사일이었다. 핵무기 위험에 대한 전문가이자 케네디와 존슨 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멕조지 번디의 저서 '위험과 생존: 핵폭탄의 50년 역사'를 소개하겠다.

 

번디는 말한다. "8년간의 아이젠하워 정부가 달성한 가장 큰 성과는 탄도미사일 개발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미국과 소련이 탄도미사일을 아예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핵 위험이 훨씬 낮으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내가 알기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금지하자는 진지한 제안이 어느 쪽에서도 제시된 적이 없다." 미국을 위협하는 단 한 가지 요소인 소련과의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제거할 수 있었을까? 지금 와서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산업개발이나 첨단기술에서 미국에 크게 뒤떨어져 있던 소련은 훨씬 더 위협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소련은 미국보다 무기체계에 더 취약했다. 이런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온 나라가 흥분에 쌓인 그 시기에 기회의 존재 자체를 인식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한 예로 국가안보회의 문서 NSC-68를 들 수 있는데, 당시 외무장관 딘 애치슨의 "사실보다는 명확성"이 중요하다는 지시를 감안한다고 해도 내용이 매우 경악스럽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도 위험을 차단할 기회가 전혀 없지 않았다는 증거로 소련 지배자 스탈린의 놀라운 1952년 제안을 들 수 있다. 나중에 독일이 소련에 적대적인 군사동맹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독일통일과 자유선거를 수락하겠다는 것이었다. 반세기 동안 독일 홀로 러시아를 두 번씩이나 멸망의 문턱까지 몰아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스탈린이 제시한 조건이 그렇게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명한 정치 해설자 제임스 워르버그 외에는 스탈린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조롱과 무시를 당했다. 최근 학자들은 새로운 견해로 당시 상황을 응시하고 있다. 강경 반공산주의 학자 아담 울람은 스탈린의 제안을 가리켜 "미해결된 미스터리"라고 불렀다.

 

워싱턴은 "모스크바의 제안을 단번에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의 제안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고 한다. 울람은 이런 정치적, 학문적, 일반 논리적 실책으로 아래의 "기본적 질문"이 남겨졌다고 말한다. 즉 "스탈린은 새로 설립될 동독을 민주주의의 제단에 희생할 의도가 정말 있었나?" 세계 평화와 미국 안보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고려했느냐는 것이다.

 

저명한 냉전 전문가인 멜빈 레플러는 소련 시대의 문서를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이 소련의 "베리야, 즉 사악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비밀경찰 총수가 독일 통일과 정상화를 위해 크렘린이 서부와 협상하는 것"과 "동-서 간의 대립 완화를 위해 동독의 공산 정권을 희생"하는 것, 즉 소련 내부의 정권 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해 위와 같은 제안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그런데 이 기회는 독일의 나토 가입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위와 같은 제안이 정말로 이뤄졌다면 지금 미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아예 고려되지 않았는데 바로 그 부분이 국민의 안위가 국가 정책과 상관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그 이후

위와 같은 일들은 계속됐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을 지배한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세계 역사에 가장 막강하고 부유한 미국과 군사력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곧바로 알아차렸다. 전쟁의 여파와 경제적 후진성을 탈출하려면 군비 확장 경쟁을 중단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따라서 흐루시초프는 상당수 공격 무기 감축을 제안했다. 새로 출범한 케네디 정부는 이 제안을 잠깐 검토한 후 거부했는데 오히려 그 이후에 더 빠른 군비 확장에 들어갔다. 이미 훨씬 앞선 군비 체제를 확보한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미국 정보 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전문가 케네스 월츠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흐루시초프는 군비 감축과 최소의 방어 태세를 추구했지만, 케네디 정부는 평화 시에 이루어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략적 군비 확장에 몰입했다. 이미 우리의 군사력 우월이 확실했는데도 말이다." 국가 안보를 해치며 국력을 키운 또 하나의 사례다.

 

미국 정보부에 따르면 소련은 이미 엄청난 인력과 전투기 감축을 시행하고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1963년 다시 공동군비감축을 제안했다. 그 신호로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철수했는데 미국에도 같은 행동을 요구했다. 물론 미국은 그 요구를 거부했다. 전직 미국 국방부 관료이자 안보 전문가인 윌리엄 커프맨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흐루시초프의 제안을 수용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미국의 군비 확장에 맞서 균형을 이루기 위해 소련이 고안한 것이 1962년 10월 쿠바 핵무기 설치였다. 이 계획의 배경에는 카스트로 정권을 탄압하는 케네디 정부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사실 같은 달 케네디는 쿠바 점령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쿠바와 소련이 이를 이미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그 후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역사학자이자 케네디의 가장 가까운 자문이었던 아서 슐레진저는 회고했다.

 

위기가 점점 고조되자 10월 말경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에게 제안한다. 소련은 쿠바에서, 미국은 터키에서 미사일을 공개적으로 동시에 회수하자는 것이었다.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서, 케네디가 이미 회수를 명령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신 대서양에 훨씬 더 위협적인 잠수함을 주둔할 준비가 벌써 돼 있었다.

 

케네디의 주관적인 계산으로는 흐루시초프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핵전쟁 가능성이 33~50% 정도 된다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가 경고한 북반구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그런 전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에는 쿠바에서 공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라고 요구하는 반면, 미국은 소련이나 소련 동맹국 국경 어디에나 마음대로 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 상황에서 더 최악의 결정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케네디의 그런 무모한 행동이 아직도 그를 용감한 지도자이자 지략가로 인식시키고 있다.

 

그 후 10년. 1973년 이스라엘-아랍 전쟁 당시 닉슨 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핵 경보를 울렸다. 소련을 향한 경고였는데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정하고, 그 지역에서 미국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 활동에 간섭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런 외교활동은 참으로 섬세했다. 미국과 소련이 함께 휴전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키신저는 이스라엘에 그 조치를 무시해도 된다고 알렸다. 이렇게 사태를 조작하고 있었으니 핵 경보를 울려 소련을 미리 위협해야 했다. 늘 그렇듯 미국 국민의 안보는 뒷전이었다.

 

그 후 또 10년. 레이건 대통령 시기 미국은 소련의 공중 방어체계, 그러니까 미국 공군과 해군의 공격, 핵무기 위협을 감지하는 소련의 방어체계를 시험해 보기 위한 작전을 폈다. 이 작전은 매우 민감한 시기에 실행됐는데, 바로 5분 만에 모스크바를 파괴할 수 있는 퍼싱 II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는 기간과 일치했다. 또 레이건 대통령은 그 전에 '전략 방위 구상(일명 스타워즈)'이라는 이름의 미사일 방어 체제를 선포했었는데, 말이 방위지 사실상 공격용 시스템이라는 것은 소련을 포함한 누구든 아는 사실이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연히 러시아 입장에선 놀랄 일이었다.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수많은 침략과 파괴 경험이 있는, 외부 침략에 취약한 국가였다. 1983년에는 정말로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새로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역사학자들이 추측했던 것보다 위험 수준이 훨씬 높았다. CIA 보고서 '전쟁 위험은 진실이었다'에 따르면 당시 소련의 고민과 예방 차원의 핵 공격 가능성을 미국 정보부가 너무 과소평가했다. <전략연구저널>은 "예방적 핵 공격의 서곡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결론 내렸다.

 

지난해 9월 당시 상황이 더 위험했다는 것을 BBC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 러시아의 조기경고시스템이 미국에서 날라오는 미사일을 인식해 러시아의 핵 반격 시스템이 최고 경보 상태에 진입했다. 소련 군부의 프로토콜은 핵무기 반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책임 장교였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이를 어기고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 후 페트로프는 공식적으로 질책을 받았지만, 그의 직무유기 덕분에 우린 아직 살아서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안위는 레이건 정부의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에릭 슐로서의 저서 '지배와 조정 : 핵무기, 다마스쿠스의 사고, 그리고 안보에 대한 착각'에서 여러 사례가 나오듯이 위험하고 무책임한 국가의 행태는 계속되고 있다.

 

냉전 시대 이후의 생존

냉전 시대 이후의 벌어진 일이나 독트린을 생각해 보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존심 있는 대통령 치고 독트린을 만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 클린턴 독트린은 '되도록이면 다방면적으로, 필요하면 일방적으로'라는 구호로 규명할 수 있는데 의회 증언에서 '필요하면'이라는 말의 정의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은 "거침없는 시장 진입과 에너지 확보 그리고 전략적인 자원 확보"를 위해 "일방적인 군사력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클린턴 정부 하에서 미국전략사령부는 '냉전 시대 이후, 외부침략을 제지하기 위한 필수 사항'이란 매우 중요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이 연구는 소련 붕괴가 이미 옛날이야기인 시대, 즉 클린턴이 조지 H.W. 부시의 전례에 따라 나토군 주둔을 점점 더 동쪽으로 밀고 나간 시기에 준비된 것이었다. 약속을 저버린 미국에 고르바초프는 분노했고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전략사령부의 연구는 '냉전 이후 시대의 핵무기 역할'을 다뤘는데 결론은 미국은 선제 공격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무기 보유 국가가 아닌 상대라도 말이다. 또 핵무기의 위력이 항상 존재해야 하는데 이유는 "모든 분쟁과 위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채 총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게를 터는 데 효과가 있듯이 미국은 핵무기를 계속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쟁점은 다니엘 엘스버그가 여러 번 강조한 적 있다).

 

전략사령부는 또 "전략을 짜는 입장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지를 너무 논리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모든 걸 공격 대상으로 여기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너무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보이는 것은 오히려 불리하다... 중요한 곳을 타격 받은 미국이 비합리적인 복수에 나설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전략적 차원에서)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유리하다." 즉 핵 위험을 암시하자는 것이다. 유엔헌장에 대립하는 발상이지만 누가 신경이나 쓸까?

위 문서에서 핵비확산금지조약에 따라 핵무기라는 지구의 재앙을 없애기 위한 '진정한 노력'이란 목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힐레어 벨록의 총에 관한 2행시를 개작한 아프리카 역사학자 친웨이주 말을 인용하는 게 나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가졌다.


원자 폭탄을, 그들에겐 없다."

클린턴 이후 조지 W. 부시의 시대. 예방 전쟁을 옹호하는 그의 행동은 일본이 1941년 미군기지를 폭격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은 미국이 B-17 폭격기 제조가 끝나면 바로 아시아에 배치되라는 것을 눈치채고 미리 습격했다. 미국이 "개미가 득실거리는 혼슈와 규슈의 대나무밭을 폭격해 일본의 산업구조를 파괴한다"는 의도로 폭격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미국의 전쟁 계획은 루스벨트 대통령, 코르데 헐 외무장관,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의 열렬한 지지하에 공군 장성 클레어 세널트가 구축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바마 시대. 그는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는 듣기 좋은 언어를 많이 구사한다. 그런데 동시에 향후 30년 동안 핵 군비를 위해 1조 달러를 지정하였다. 몬테레이국제교류인스티튜트 핵 비확산 연구센터의 제임스 마틴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기 방어체제 구축을 위해 책정된 금액과 맞먹는 규모다.

 

오바마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위험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해군 특수부대(네이비실)가 실행한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가 한 예다. 오바마는 2013년 5월 연설에서 매우 자랑스러운 듯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이 연설은 언론에서 많이 다루어졌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은 간과됐다.

 

오바마는 작전에 환호했지만,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네이비실이 "연장된 전투에 말려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파키스탄과의 관계에 무리가 있었고, 파키스탄 시민들은 그들의 국경이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격분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럼 몇 개의 보충 설명을 여기서 해보자. 작전 중에 잡힐 경우 어떻게든 빠져나오라고 네이비실에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네이비실이 정말로 "연장된 전투에 말려들게" 됐다면 그들을 모른 체 했을 리 만무하다. 미국 군사력을 총동원해서라도 구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토주권을 중시하는 파키스탄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다. 또 파키스탄은 핵무기 보유 국가이며 핵 정보가 지하드 세력에게 새어나갈까 늘 조심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무인기 폭격 때문에 미국과 워싱턴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매우 높았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네이비실이 빈 라덴의 집을 침투했다는 보고를 받은 파키스탄 참모총장은 지원군이 온다면 인도에서 올 것으로 예측하고 "정체불명인 비행기는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시간에 카불에 주둔하고 있던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은 만약에 파키스탄이 "전투기를 투입하면" 미국도 "전투기로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오바마 말대로 운 좋게 이런 최악의 경우가 안 일어난 것이었다.

 

물론 훨씬 나쁜 사태로 변질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 요소들이 무시된 채 작전은 이행됐으며 이후에도 그에 대한 반론은 거의 없다.

버틀러 장군이 관찰한 것처럼 이제까지 우리가 멸종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이다. 그러나 운명을 계속 조롱할수록 신의 중재가 기적을 계속 가능케 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noam-chomsky/story_b_5680794.html?1408089084&utm_hp_ref=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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