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 잔이 범죄가 되는 세상 [임종건]


막걸리 한 잔이 범죄가 되는 세상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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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한 잔이 범죄가 되는 세상

2018.03.30

솔직히 말하건대 내가 등산을 즐겨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땀 흘려 산을 오르고 나서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의 상큼함 때문입니다. 등산은 건강을 위한 것인 만큼 술이 없다 해서 안 다닐 것은 아니지만 등산의 맛은 반감될 게 분명합니다.

내가 속한 등산모임들에는 애주가들이 많은 편입니다. 각자 취향대로 여러 가지 술을 가져옵니다. 날씨가 추울 때는 체온조절용으로 위스키를 가져오기도 하고 집에서 담근 각종 약용 술을 가져와 맛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세는 막걸리입니다.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 6%의 약한 술이어서 한두 잔으로 취해 다리가 풀리지는 않아 산행에는 비교적 안전한 술입니다. 겨울 등산에 가져가면 천연의 냉막걸리이고, 여름엔 전날 냉동고에서 얼렸다가 올라가는 동안 녹은 냉막걸리가 별미입니다.

산 위에 올라서 마시는 술은 정상주(頂上酒)요, 내려와서는 하산주(下山酒)입니다. 하산주는 긴장감이 풀린 상태에서 마시게 됨으로써 과음 과식하기 쉽고, 그 결과 나도 등산효과를 날려버리고 후회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북한산 국립공원만 하더라도 골짜기마다 유흥업소들이 그득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취객들의 추태와 환경의 오염 또한 그득했었습니다. 업소들이 모두 철거된 지금 그런 풍경은 사라졌습니다. 정부가 등산객과 자연환경을 위해 크게 칭찬받을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부의 노력에 호응해서 등산질서도 현저하게 개선됐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사람들이 취사도구를 이용해 음식을 조리하거나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등 금지행위를 합니다만 그 경우 지나는 등산객들의 눈총을 사거나, 신고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환경부는 최근 국립·도립·군립공원 등 자연공원 내 지정된 장소(대피소, 탐방로, 산 정상부 등)에서 음주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으로 자연공원법 시행령을 개정해 지난 12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국립공원 산 정상 등에 올라 음주 행위를 하는 등산객은 1차 위반 시 5만 원, 2차 및 3차 이상 위반 시 각각 10만 원의 과태료를 물게 됩니다. 음주행위로 인한 안전사고 예방이 법 개정의 이유라고 했습니다. 

산에 올라 막걸리 한 잔 정도 마시는 것은 개인의 소소한 행복에 해당됩니다. 정부는 법을 개정하기 전에 이같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까지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를 먼저 살폈어야 했다고 봅니다.

환경부에 따르면 국립공원 내 음주행위로 인한 안전사고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64건으로 공원 내 안전사고(1,328건) 중 5%를 차지하며 음주로 인한 사망사고(추락사·심장마비 등)는 10건이 발생해 전체(90건)의 약 11%에 달한다고 했습니다.

음주 사망사고가 5년 동안 10건이라면 1년에 2건꼴입니다. 다른 음주관련 사망사건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 빈도의 안전사고, 사망사고를 법으로 규율하겠다는 것이 과잉입법은 아닌지도 살폈어야 합니다.

산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산에 오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고를 당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이 일행에게 얼마나 큰 폐를 끼치는 일인지는 등산을 해본 사람은 모두 압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보호하겠다는 입법 취지는 탓할 수 없습니다만 예외적인 사건을 보편화해서 법으로 규제하게 될 경우 다른 많은 사람들의 법익(法益)을 해하게 됩니다.

공공질서는 시민들의 자율적 통제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등산은 비교적 그것이 잘 작동되는 취미활동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등산음주를 막는 방식도 벌금방식이 아닌 계도방식이 먼저여야 했을 것입니다. 입법만능주의는 시민의 자율의지를 퇴화시키게 됩니다.

막걸리 한 잔이 범죄가 되는 세상, 그래서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마셔야 하는 세상, 나아가 이를 단속하겠다며 ‘막파라치’가 등장할지도 모르는 세상, ‘물병에다 술을 담아 오면 되지’라며 변칙과 편법을 생각하게 하는 세상은 건강한 세상이 아닙니다.

몽테스키외의 입법원칙 중에 ‘입법은 심사숙고하여 행해야 하며 실제적인 효용이 있어야 한다. 설득력이 약한, 불필요한, 그리고 부당한 입법은 전체 입법의 평가를 떨어뜨리며 국가의 권위를 해한다’는 게 있습니다.

자연공원법 개정은 부당 입법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설득력이 약하고 불필요한 입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9월 12일까지 6개월의 계도기간을 거쳐 시행한다고 하는데 계도 기간 중 이 법의 철회를 아울러 검토하기를 바랍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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