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싫어했던 아이의 반전 [신아연]


책을 싫어했던 아이의 반전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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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싫어했던 아이의 반전

2018.03.20

“어렸을 때 나는 책 읽기를 무척 싫어하는 아이였다. 국어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서 담임 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 만화만 읽을 게 아니라 책도 읽을 수 있게 집에서 지도해 달라는 충고를 하셨다. 그때 어머니가 한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 애는 만화도 안 읽어요.’ 선생님은 별 수 없이, 그렇다면 만화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작품을 쓸 때, 어린 시절에 책 읽기를 싫어했던 나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고, 그런 내가 중간에 내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일본의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6년 전 한 문예상을 받으면서 한 말입니다. 국내에서도 히가시노의 작품이 상당히 많이 읽히지만, 그의 소설을 모르는 분들도 현재 상영 중인 영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원작자라고 하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소설가든 시인이든 작가라 하면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평생 책을 끼고 살 거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자신은 책 읽기를 싫어한 사람이었다고 히가시노는 경쾌하고 진솔한 반전을 ‘때립니다'. 하기야 만화도 안 읽던 아이가 유명 소설가가 된 자체가 생의 반전입니다. 그의 소설이 ‘신도 예측할 수 없는’ 반전에 반전의 묘미를 주는 것처럼.

저도 소설을 쓰게 된 이후, 내심 염려가 되던 일을 그가 한 방에 날려준 것 같아 가슴이 다 후련하고 안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저도 히가시노처럼 어린 시절에 책을 별로 안 읽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책을 사 줄 형편이 못 되었고 그때는 학교나 지역 사회 도서관도 변변치 않아서 이래저래 책을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글을 쓰는 시간 외에는 독서를 하지만 그럴수록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책을 많이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은 별개의 능력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큰 위안입니다. 그것은 이미 히가시노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책이라곤 만화책도 안 읽던 사람이 자기 글은 이렇게 잘 쓰지 않습니까. 작품의 문학성은 논외로 하고, 그가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작품은 쓰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독서란 상당 부분 이성과 합리적 행위라고 볼 때 "너의 광기로 하여금 항상 이성을 감시하게 하라"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의 말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라캉이 말한 광기란 상상력과 창의성, 직관 등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상상력과 창의성은 의식적이며 이성적인 영역에서 발현되는 에너지와 달리, 본능과 직관이 작동하는 무의식 세계를 주 무대로 역량을 펼칩니다. 한 인간의 원천적 생명력과 잠재력은, 특히 작가로서의 역량은 무의식 곳간의 풍성함에 달려 있습니다.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는 ‘책을 읽는 이유는 책을 쓰기 위해서’라는 다소 극단적 표현을 합니다. 그에게 독서란 ‘나도 언젠가는 내 글을 써 보겠다, 내 책을 내 보겠다’는 목표를 위한 수단과 참고적 방법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창의성만이 내 삶을 자율적으로, 자발적으로 끌고가는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창의성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그는 말합니다.

문학 작품을 쓸 때의 이성과 합리성은 상상력이라는 생의 원천적 에너지를 끌어올리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독서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은 또 다른 일이지만 책을 많이 읽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글 읽기와 글쓰기를 단순 대비해 본다면 모방 행위와 창조 행위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책을 안 읽는 시대에 오늘 제 말이 좋은 핑계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잠재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책은 고사하고 만화도 안 보던 히가시노 게이고가 제 나라를 대표하고, 나아가 외국에서까지 알아주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에 희망이 생기지 않나요? 굳이 작가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계적이며 반복적인 일, 이성과 합리의 결과를 요구하는 일은 로봇이 맡아서 한다지요. 그렇다면 결국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인간이 미래 사회의 생존에 유리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온 인류의 모든 문명이나 문화는 ‘실현된 상상력과 창의력’의 동의어지만 앞으로는 더욱 그럴 테니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대 철학과를 나와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 기자를 지내고, 현재는 자유칼럼그룹과 자생한방병원 등에 기고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소설『강치의 바다』 장편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를 비롯,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마르지 않는 붓(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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