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런 지하철 메시지 [김수종]


당황스런 지하철 메시지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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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런 지하철 메시지

2018.03.19

지난 금요일 오전 10시쯤 서울의 지하철 플랫폼에서 목격한 일입니다. 계단을 내려가서 플랫폼 앞에 서면 전동차 운행상황 스크린을 쳐다보게 됩니다. 주로 열차가 어느 역에 있는지를 시시각각 표시해주고 서울시 등의 공익 광고를 내보내는 모니터는 승객들에게 아주 긴요한 안내자입니다. 
그날도 플랫폼에 서서 열차의 위치를 알고 싶어 모니터를 쳐다보았습니다. 순간 열차 이동 상황이 표시되던 모니터가 까만색으로 변하더니, 그 위에 노란 글자가 뜨는 것이었습니다. 조건반사적으로 흠칫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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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질서를 지켜 
안전하게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연기가 나는 곳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역사에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습니다. 불이 났으면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라도 들릴 텐데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더니 조용했습니다. 러시아워가 지난 시각이라 플랫폼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핏 혹시 모니터 점검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니터에는 공익 광고가 방영되더니 다시 꼭 같은 노란 경고 문자가 떴습니다. 두서너 명의 나이든 여성들이 플랫폼에 접근하여 모니터를 보고는 “이게 뭐야? 불난 게야?”하고 말했습니다. 당황스런 기색이 완연했습니다. 일행 중 한 명이 “무슨 소방 연습을 하는 건가?” 하고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이렇게 대여섯 차례 노란 경고 메시지가 뜨더니 역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방송 내용은 문구 그대로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소방 점검 훈련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무리 멘트를 듣는 순간 속이 상했습니다.  
“···승객께서는 지하철을 계속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안내 방송을 듣고서야 사람들이 안도하는 것을 보며 서울 시장한테 항의 전화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모니터에 ‘소방점검 훈련 중’이란 표시를 해줬더라면 사람들이 당황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게 그리 어려운 서비스인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또한 안내방송 말미에 “지하철을 계속 이용하시기 바랍니다.”보다는 “안심하시고 지하철을 이용하시시기 바랍니다.”라는 표현이었다면, 긴장했던 승객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모든 공공 서비스에 ‘안전’을 강조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일반 시민의 안전 의식을 강화시켜주기 위해 좀 겁먹게 하는 차원에서 모니터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했다면 지하철 당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냥 통상적인 소방 점검 훈련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훈련 중임을 알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솝 우화 ‘늑대와 소년’의 경우처럼, 진짜 불이 나서 모니터에 경고 문자가 떴는데도 시급하게 대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소방 점검 훈련인가보다 하고 여유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이 상황을 보면서 지하철 당국이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서비스 정신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직자들의 평소 행정 편의주의 사고방식이 굳어져서 지하철 승객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하철 회사 직원이 자격이 모자라거나 나태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시민을 위한 서비스에 부합하는 창의적 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부는 청년실업을 줄이려는 궁여지책으로 파격적으로 공무원 채용 인원을 늘리고 있습니다. 덩달아 공기업 직원 채용 인원도 효율성과 수요에 무관하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렇게 늘어나는 공직자들이 국민을 위해 어떤 서비스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시험성적이 좋아서 합격한 공직자들이 적합한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하고 일선에 배치된다면, 그들은 국민에 대한 서비스 감각보다는 조직의 관행과 집단 이익을 좇을 것입니다. 국민의 불편보다 행정의 편의를 우선하는 공직자들이 수만 명씩 늘어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악몽입니다.       
정부는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채용 증가에 따라 엄격한 교육 및 훈련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실행하기를 바랍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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