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 새해를 맞으며 생각난 일들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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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새해를 맞으며 생각난 일들

2018.01.04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정유년은 가고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00세 인간’이란 새로운 유행어가 ‘인생 50’이란 오래된 개념을 역사 속으로 밀어 넣은 지 제법 되었습니다. 그러나 100세란 하나의 표어이지, 100세까지 장수하는 사람은 아직도 뉴스 대상이 될 정도의 희소가치입니다. 

어지러운 현실을 멀리하고, 신문과 방송 뉴스는 무식하다는 비난을 면할 정도의 적당한 거리에 두고 살고 있는 90대 중반 늙은이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을 온존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할 정도로, 뇌의 순발력이나 기억력이 체력 쇠퇴와 함께 걱정이 되는 일상입니다. 

해가 바뀌며 과거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들의 소식에 접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 친구는 90에 가까운 나이에 아직도 국내정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뭐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연구 중이라 했습니다. 서울 근교에 있는 필자와 같은 연배의 친구는 부인이 얼마 전부터 병석에 있어 간호에 고생하고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일제강점 시, 일본군에 징발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광복된 조국의 품에 안긴 20대 초반의 필자는 젊은 혈기 탓으로 이승만 박사보다 김구 선생을, 서정주 유치환보다 설정식 임화를 선호하는 풋내기 청년이었습니다. 본인이 투표한 후보가 당선된 것은 김영상 대통령이 처음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투표가 적중하여 뽑힌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되어 실각하고 지금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어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동길 박사는 적임자를 찾지 못해 기권하였다고 밝혔으나, 필자는 낙선을 예견하면서도 보수당 후보에 투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젊은 핏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미국 대선 결과를 보고 현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선거제도에 큰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필자가 가지고 있는 정치철학이 유권자의 다수파(majority)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필자 연령대 사람은 인구 구성으로 볼 때에도 극히 소수인 부류에 속한다는 소외감에 새삼 낙담했습니다.

여생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국내정세를 걱정할 사치(?)가 어디 있느냐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걱정하기 시작한 내 사후(死後)를 위한 신변정리가 뜻과는 달리 거의 진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초조해졌습니다. 

원래 정리·정돈에는 별 소질이 없는 필자입니다. 게다가 한 번 수중에 들어온 물건은 쉬 버리지 않는 버릇까지 있습니다. 필자의 한 평 반 정도의 좁은 서재에는 정리되지 않은 편지, 책, 음악 CD, 문방구, 옷가지 등 잡다한 물건이 질서 없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내가 정리를 도우려고 하면, 글 쓰는 자료 찾기에 혼란이 생긴다고 질색을 하며 거절합니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국내외 친지가 보낸 연말 카드가 큰 봉지에 연도별로 분류된 채 무질서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서재뿐 아니고, 거실에 있는 책장에도 수십 년 묵은 책이 질서 없이 꽂혀 있습니다. 그중에는 1년에 두세 번 볼 정도의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20여 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와 이 백과사전만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주려고 의논하다가, 곧 고등학교에 진학할 아들이 있는 딸네 집에 주기로 하고 타진하기로 했습니다.

20여 년 전, 살던 집을 헐고 조그만 4층 ‘원룸’ 임대건물을 짓고, 우리 부부는 4층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건축 허가규정에 따리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었습니다. 아침 신문을 우편함에서 뽑아 오기 위해서 40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합니다. 아내가 시장에서 좀 많은 물건을 사오면, 두 사람이 나누어 가져 올라옵니다. 지금도 좀 힘이 드는데, 만일 체력이 더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입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은퇴한 친구 한 사람이 몇 년 전 “야, 심심해서 죽겠다. 자네는 어떻게 소일하냐?”고 전화로 푸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심심하다고 불평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 들수록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 허전합니다. 

정말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늙은이, 여생이 얼마인지도 모르며 이렇게 신변정리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자신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새해에는 이 점을 꼭 유의하여 처신하도록 다짐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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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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