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언론인 3인이 주는 힌트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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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언론인 3인이 주는 힌트

2017.12.25

일주일 전 먼지 묻은 눈이 쌓인 인사동(仁寺洞) 길을 걸었습니다. 옛날 중학동(中學洞)에 위치한 한국일보에 30여 년 다녔으니 인사동은 익숙했던 동네입니다. 그러나 신문사를 퇴직하고 그 사옥도 다른 곳으로 옮긴 후에는 어쩌다 옛 동료들 모임이 있어야 갈까 말까 하는 낯선 동네가 되었습니다. 인사동 길 분위기도 아주 달라져서 전통의 거리보다 ‘퓨전’의 거리 맛이 강해졌습니다. 

그날 인사동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내 평소 행동에 맞지 않게 서예전을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일보의 선후배 3인이 퇴직 후 공부하고 연습해서 쓴 서예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언론동행3인전’(言論同行三人展)이라는 멋진 이름이 달린 서예전이었습니다. 
백교 권혁승(白橋 權赫昇), 여산 윤국병(餘山 尹國炳), 담연 임철순(淡硯 任喆淳) 세 사람은 한국일보에서 평생 언론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백교가 80대 중반, 여산이 70대 중반, 담연이 60대 중반이니 나이 차가 각각 10년 안팎의 선후배 관계입니다. 

그들의 서예 작품은 논어를 비롯해 중국 고전에서 조선의 시가에 이르기까지, 알베르 카뮈의 시어(詩語)에서 고린도전서의 중국어 및 한국어 번역구절까지 다양한 소재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의 서예 작품들 중에서 백교의 ‘春秋筆法’(춘추필법), 여산의 ‘正言守中’(정언수중), 담연의 ‘廣開言路(광개언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두 언론인의 직업관을 강조한 경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들 세 사람은 모두 편집국장을 역임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편집국장은 기자로서 가장 영예롭기도 하고 고도의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 뼛속까지 직업정신이 박히게 마련이고, 개성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고집스러워진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온 언론인 세 사람이 공동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신문사 다닐 때 알콩달콩 코드가 맞아 어울려 다닌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을 묶어 놓은 것이 10년이라는 적당한 나이 차와, 서예가 갖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찾아온 지혜와 열린 마음이 언론동행3인전을 구상하고 실행하게 된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장수 시대에 사람들은 은퇴한 후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방황합니다. 정말 정답이 없는 과제입니다. 
‘언론동행3인전’은 은퇴 후 방황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퇴임 후 사는 방법에 대해 정답은 아니지만 뭔가 힌트를 주는 것 같습니다. “3인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는 논어의 구절이 새롭게 음미됩니다. 

꼭 편집국장 같은 고위직을 역임한 언론인만이 이렇게 공동의 목표를 향해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직종에서도 같은 직장에 다녔던 사람들이 몇 사람이 다시 모여 유연한 협력을 통해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한다면 은퇴 후의 인생이 더 재미있고 훈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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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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