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드미트리 VIDEO: Dmitri Hvorostovsky


 

안녕, 드미트리


바리톤, 이탈리아산 순혈들 온 세상 지배


시베리아 태생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Dmitri Hvorostovsky)

1962-2017

세상을 등지다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주의 고도(古都) 파도바에서 돌로미티 산맥의 등허리를 가르며 볼차노 쪽으로 차를 북상시키다보면 바사노 델 그라파라는 작은 도시와 만나게 된다. 누구는 포도주 브랜디 그라파를 떠올릴 것이고, 미술사에 견식이 있는 분들은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야코포 바사노의 이름이 기억날지도 모른다. 내게는 바리톤 티토 곱비(Tito Gobbi)의 도시다. 그는 마리아 칼라스,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무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바리톤이었다. 



테너와 소프라노와는 달리 바리톤은 이탈리아산 순혈들이 온 세상을 지배했다. 유성기 시대의 티타 루포를 시작으로, 지노 베키, 주세페 타데이,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티토 곱비와 롤란도 파네라이, 마리오 세레니 등이 그렇다. 20세기 베르디 바리톤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피에로 카푸칠리와 레나토 브룬손이 이탈리아 남자들이고, 미성의 조르지오 잔카나로와 역사상 최고의 표현력을 자랑하며 지금도 무대를 지키고 있는 ‘오페라 배우’ 레오 누치가 모두 이탈리안이다. 그러나 이 도도한 순혈의 역사에 이단의 방점을 찍은 남자가 있었다. 시베리아 태생의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Dmitri Hvorostovsky, 1962-2017)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22일 아침(영국 현지시각)의 일이다. 터질 듯한 근육질 몸매의 강건한 남자의 인생도 병마를 이겨내진 못했다. 뇌종양으로 투병을 시작한 지 2년 여 만에 그는 우리를 남겨두고 먼저 이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빛나는 캐리어의 출발은 1989년이었다. 그해 열린 BBC 카디프 콩쿨에서 기념비적인 열창을 쏟아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홈그라운드의 브린 터펠도 이겨냈다. 당시 결승 콘서트의 실황은 지금 봐도 전율적이다. <가면무도회>의 앙카스트룀 백작이 처절한 배신감에 휩싸여 노래하는 베르디 최고의 바리톤 아리아 ‘Eri tu?’를 들어보자. 


(베르디 <가면무도회> 중 ‘너였구나, 내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Eri tu che macchiavi’)


30대의 디마(흐브로스토프스키의 애칭)는 점차 머릿결이 백발로 변해갔다. 젊고 강건하며 드라마틱한 목소리의 소유자가 지닌 젊음의 백발은 오히려 그에게 강인한 카리스마와 깊은 품위를 부여해주었다. 자연스레 ‘은발의 시베리아 사자’라는 별칭이 주어졌다.


완벽한 외모와 깊은 음악성, 대리석처럼 빛나는 격정적인 음색과 드라마틱한 가창으로 그는 수많은 전설적인 무대를 써내려 나갔다. 차이코프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의 여왕>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실로 최고의 레퍼토리였다. 역사상 최고의 오네긴이었고, 특히 <스페이드의 여왕> 속의 옐레츠키 공작은 잊을 수가 없다.


옐레츠키는 러시아의 기품 있는 대공이다. 리자라는 이름의 여인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는 지금 도박 중독에 빠진 하사관 게르만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상태. 게르만의 어두운 열정과 대비되는 제정 러시아적 품위의 상징인 옐레츠키가 리자를 향해 온 마음을 담아 애타게 노래한다. “야바스 류블류브...그대를 너무도 사랑합니다.”


(차이코프스키 <스페이드의 여왕> 중 옐레츠키의 아리아)


고결한 품위 속의 터져 나올 듯한 격정은 베르디 바리톤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일 트로바토레>의 루나, <가면무도회>의 앙카스트룀 백작 역에서 역사상 최고의 가수였다. 


지난 2017년 5월이었다. 이 코너를 통해서도 소식을 전해드린 바가 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링컨 센터 50주년 기념 갈라 콘서트가 열렸다. 이 세상 최고의 오페라 가수들이 총출동해 5시간에 걸쳐 35개의 오페라 작품 속 명장면들을 쏟아내듯 불렀다. 흐보로스토프스키만 없었다. 투병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메트의 대표(General Manager) 피터 겔브가 무대에 올랐다. 


“가장 놀랍고도 담대한 아티스트를 소개합니다. 그가 <리골레토> 2막의 아리아를 노래합니다. 여러분,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입니다.”


(베르디 <리골레토> 중 ‘이 더러운 신하들아 Cortigiani vil razza’)


그의 깜짝 출연. 그리고 10여분에 이어진 격정적인 열창에 메트의 온 관객들이 눈물을 훔쳤다. 그때는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치료에 꽤나 차도가 있어 내년 쯤이면 다시 오페라 무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낙관. 그러나 나의 착각이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 무대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멀리 런던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다. 건강에 좋을 리 없는 긴 비행기 여행 끝에 대서양을 건넜다. ‘디마’는 뉴욕이 가장 사랑하는 바리톤이었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 무대를 모두 누볐던 그이지만, 자택이 있던 런던보다도, 빈이나 밀라노보다도 뉴욕이 그를 더욱 사랑했다. 그 뉴요커들 앞에서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몇 번의 크고 작은 출연이 있었지만, 사실상 이날 밤이 흐보로스토프스키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언제나 그렇듯 추모와 그리움은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다. 그의 아름답고 강인한 목소리가 내내 귓가를 맴돈다. 오늘도 <예프게니 오네긴>의 피날레 듀엣을 듣고 있다. 벌써부터 그가 그립다. 안녕, 드미트리.


(차이코프스키 <예프게니 오네긴> 피날레 2중창.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과 함께)

Club Balc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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