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슬픈 사월 [추천시글]

 

찬란하고 슬픈 사월

2021.04.30

 

볕 좋은 날, 아버지 무덤가에 앉았습니다. 산 좋고 골 깊고 물 맑기로 이름난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낙영산입니다. 산 아래 절집(공림사) 마당의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반짝 윤슬이 시선을 흔듭니다. 유록(柳綠)을 머금어 레이저처럼 빛나는 윤슬에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습니다. 순간 연초록 윤슬은 아버지 형상이 되어, 반가운 마음에 현기증마저 일으킵니다.

 

툭, 어깨를 건드리는 엄마의 손길에 눈을 떴습니다. “나 닮았지? 백발 휘날리는 것 좀 봐라. 바람이 불면 어디까지 날아가려나….” 실눈으로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할미꽃이 고개를 숙인 채 새초롬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덤가에 무더기로 피던 할미꽃이 올핸 달랑 두 송이뿐입니다. “우리 엄마를 닮아선지 할미꽃은 참 예뻐. 붉은 피부도 곱고. 꽃이 예쁘면 누군가 몰래 캐 가듯 우리 엄마도 누가 업어 가면 어쩌지.” 무덤가 영산홍에 물을 주던 작은오빠가 어느샌가 다가와 너스레를 떱니다.

 

 

“뒷동산의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 늙어서도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 싹 날 때에 늙었나 호호백발 할미꽃 / 천만 가지 꽃 중에 무슨 꽃이 못 되어 / 가시 돋고 등 굽은 할미꽃이 되었나 / 아하하하 우습다 꼬부라진 할미꽃”

 

언니가 동요 한 가락을 뽑습니다.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참 잘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친구들과 어린 시절 들판을 뛰어다니며 불렀다는데, 나는 처음 듣는 노래입니다. 심훈의 장편소설 ‘직녀성’에도 이 동요가 나온다고 하니 찾아봐야겠습니다.

 

휙, 하얀 솜털 바람이 붑니다. 키 작은 들꽃 민들레입니다. 스물여섯 살, 스물세 살, 스물한 살 조카들과 스물네 살, 스물세 살 두 딸이 한 줄로 서서 꽃씨를 호호 불어댑니다. 할머니의 하얀 머리에 민들레 꽃씨가 뭉게구름처럼 내려앉자 다섯 손녀가 손뼉을 치며 깔깔깔 웃어댑니다. 성인이 된 녀석들이지만 노란 민들레보다 더 귀엽습니다.

 

​“산등성이의 해질녘은 너무나 아름다웠었지 / 그님의 두 눈 속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지 /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 되어 / 강바람 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

 

 

1980년대 말 유행했던 노래를 불러봅니다. 노랫말이 생각나는 부분만 불렀는데, ‘민들레 홀씨 되어’에서부터는 합창이 되었습니다. 중년이 된 우리 남매의 유년 시절 꿈들이 민들레 꽃씨를 따라 하염없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 순간, 민들레가 말합니다. “난 홀씨로 번식하지 않아.” 홀씨는 꽃이 피지 않는 식물들이 ‘무성생식’을 위해 만드는 씨입니다. 포자라고도 하지요. 민들레는 꽃이 피고 열매도 맺으니 ‘홀씨’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민들레 씨방 맨 끝의 솜털 같은 그것은 ‘갓털’, ‘상투털’입니다. 북한에선 ‘우산털’이라고 하지요. 민들레가 상투를 튼 것 같아서, 갓을 쓴 모습 같아서, 우산을 쓴 것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랍니다.

 

후, 나도 민들레 솜털 바람을 불어봅니다. 하나하나 흩어져 날리는 모습을 보며 홀씨는 ‘홀로 날아가는 씨앗’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손을 뻗어 꽃씨 하나를 잡으려 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 아버지 무덤에 고이 내려앉았습니다.

 

큰오빠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온 바로 다음 날입니다. 연락도 닿지 않고 오지도 않아 원망했었는데, 아버지 무덤가에서 날아올랐다 무덤으로 내려앉은 민들레 꽃씨가 큰오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났으니 작별도 해야겠지요.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처럼 뒤돌아보며 눈물 흘리지 않겠습니다. 놓쳐버린 날들을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후련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유난히도 찬란하고 슬픈 사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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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 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 담당 연구원, 이투데이 교열팀장을 거쳐 현재 한국일보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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