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오 포럼과 중국 [추천시글]

 

보아오 포럼과 중국

2021.04.26

 

2001년 2월이었습니다. 중국의 하이난섬(海南島)은 농번기였습니다. 뿔이 큰 물소가 논에서 쟁기를 끄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하이난 섬은 위도상 베트남 하노이보다 남쪽에 있어 3모작이 가능한 곳입니다. 그러니 사실 농번기와 농한기 구별이 없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없이 넓은 평야 위에 하천 둑을 가득 메우고 유유히 흐르는 크고 작은 강들, 이런 풍경을 뚫고 고속도로가 끝없이 뻗어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는 텅텅 비었습니다. 한국의 전직 총리 이수성씨를 태운 자동차가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경찰 오토바이 네댓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호위했습니다. 마치 도로를 전세라도 낸 듯 했습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타면 간간이 고속버스와 화물트럭이 지나갈 뿐 차선이 텅텅 비고 주변 논에서 모내기가 한창이었던 한국의 초여름 풍경이 연상되었습니다.

 

북송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유배되어 지냈던 하이난 섬 남쪽 해변은 어딜 가나 야자수가 빼곡했고 하얀 백사장과 에머럴드빛 바다가 계속 이어지는 이국적인 풍경이었습니다. '보아오'(博鰲)라는 해변에 서둘러 지은 듯한 현대적인 리조트 호텔이 있었습니다. 중국이 제1회 '보아오포럼' 회의장으로 지은 일종의 컨벤션센터였습니다.

 

 

호텔 입구와 주변 도로에 늘어선 가로수 잎들이 모두 말라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심은 지 며칠 안 된 듯했습니다. 급한 일정에 쫓겨서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잘라다 구덩이에 넣고 지주목을 받쳐 세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제1회 '보아오 포럼'이 열릴 당시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 다시 가 본 적이 없지만, 20년이 지난 후 하이난섬과 보아오의 모습도 많이 달라진 듯합니다. 인터넷으로 보니 해안 곳곳에는 기이한 현대식 고층 빌딩과 시설물이 촘촘히 들어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에는 자동차가 가득 달릴 것이고, 물소가 끄는 쟁기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외양 못지않게 달라진 것은 보아오 포럼을 주관하는 중국의 태도입니다. 1회 포럼에 참석한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누군가 보냈다는 축시를 영어로 번역해 낭송하며 여러 나라에서 온 대표단을 환영했습니다. 정말 유연해 보였습니다.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던 당시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국가 과제로 삼고 전 세계에 로비하며 미국에 구애할 때였습니다.

 

아시아 주변국들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적인 부상'으로 보고 아시아 교역의 활성화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98년 필리핀의 전 대통령 피델 라모스, 호주의 전 총리 밥 호크, 일본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 세 사람이 스위스 다보스포럼을 모델로 하여 아시아 중심의 포럼을 창립하자고 주창한 것이 설립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경제통합과 역내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24개 국 정부 지도자, 기업인,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역동적인 아시아 지역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이슈에 대한 역내 국가들의 비전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출발했습니다. 회의 장소를 보아오로 정한 것도 중국 땅이면서 베이징이 아닌 곳,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포함하는 지리적 중심이라는 잇점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중국은 그 후 20년 동안에 상전벽해가 됐습니다. WTO 가입을 구애하던 중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2010년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2030년쯤에는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좋게 말해서 경제부국으로 커졌습니다. 그러나 회의적 시각으로 보면 중국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법을 개정해 시진핑 주석의 영구집권의 길을 텄고,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지구촌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실상 패권국가의 길로 깊이 들어섰습니다. 이제 사사건건 미국에 시비걸며 덤벼들고 있습니다.

 

누가 나쁜 자인지를 판결하는 것은 입장에 따라 다릅니다. 국가이익이 우선하는 게 국제정치이니까요. 미국은 인권, 민주주의, 법에 의한 국제질서의 가치를 내세우며 중국을 압박합니다. 중국은 이에 반발합니다. 미국에게 "네 국민 인권이나 잘 챙기라."고 흑인인권 유린을 노골적으로 지적하며 그 증거로 미국 여론조사를 들이댑니다. 또 중국은 "미국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하지만 중국은 중국식 민주주의를 잘하고 있다."며 간섭하지 말라고 큰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국제질서를 말하는 미국을 향해 "미국과 소수의 국가가 자기네 좋을 대로 만든 국제질서를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의 평화적인 부상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던 미국은 중국의 위협을 느끼며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반도체 전쟁으로, 중국으로 향하는 반도체 공급체인을 봉쇄하려고 합니다. 미국은 자국 기업은 물론 우방국들의 반도체 기업을 불러들여 미국 투자를 재촉합니다. 이들이 중국에 기우는 것을 사전에 단속하려는 것입니다. 아직도 첨단기술은 미국이 훨씬 앞서 있으니까 그 차이를 벌려서 중국이 따라오는 속도를 늦추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공산당이 지휘부가 2050년 미국과 맞장 뜨는 기술패권국을 목표로 불철주야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열린 보아오포럼 기조연설에서 시진핑 주석은 평화,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언급하면서도 "걸핏하면 턱으로 지시하고 기색을 부리고 내정에 간섭하는 건 어떤 지지도 얻지 못한다."면서 미국을 겨냥했습니다. 미국도 쫓기는 기색이 역력해 보입니다. 정권이 바뀌어 새로 백악관 주인이 된 바이든 대통령은 전임 정부의 모든 정책을 뒤집어엎었지만 대중국 강경정책은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더 치밀하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야당인 공화당도 대중 정책엔 초당적인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을 비롯한 국제정치 무대에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기이한 정치학 용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의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사용한 일종의 전쟁불가피론입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그가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쓴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갈파합니다. 엘리슨 교수는 기존 강대국과 신흥국의 전쟁 필연론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 이름 붙이고 이 논점을 토대로 15세기 이후 패권경쟁이 벌어진 16건의 사례를 분석한 후 미국과 중국의 충돌 가능성을 아주 높게 예측합니다. 핵무기 시대에 미국과 중국이 전면전을 벌일 경우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습니다.

 

​핵전쟁은 피할지라도 미국과 중국 간에 벌어지는 신 냉전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 개연성은 높아 보입니다. 특히 세계 모든 국가들이 정도 차는 있지만 미국과 중국에 줄을 서야 하는 상황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이 그렇습니다. 이 경우 아마 가장 딱한 처지에 서게 될 나라가 한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업과 정부의 생각이 다르고 여당과 야당의 생각이 다를 터이니 국민도 두 줄로 나뉠 게 분명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아오 포럼 화상 축하연설에서 백신 공급에 기여한 중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을 놓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백신 공급에 폐쇄적인 미국을 겨냥하고 중국에 기우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입니다. 올해의 보아오 포럼을 보니 장쩌민 시대는 '낭만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중 대결이 심해지면 보아오 포럼은 중국에 눈도장을 찍는 이벤트로 변질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면 한국이 그동안 어마어마하게 커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 첨단기업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서로 투자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통찰력과 지혜를 가진 리더십이 있다면 이런 상황도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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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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