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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

2020.09.02

특정 교회의 코로나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개신교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교회의 협조를 당부했죠. 그 자리에서 양자 간에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갔다는 말을 접하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각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다. 정부의 방역 방침을 거부하면서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문재인 대통령)
“종교가 어떤 이들에게는 취미일지 모르지만 신앙을 생명같이 여기는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라는 것은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

그보다 앞선 24일에도 유사한 발언과 반박이 있었으며, 나아가 헌법상 기본권의 제한 가능성 문제로까지 비화했다죠.

“어떤 종교적 자유도, 집회의 자유도, 표현의 자유도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주장할 수는 없는 것.”(문 대통령)
“종교의 자유를 쉽게 공권력으로 제한할 수 있고, 중단을 명령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려서 크게 놀랐다.”(김 공동대표)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종교인이다”라는 세간의 말을 인용치 않더라도 종교, 특히 기독교가 우리 삶과 가치관, 의식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필자는 지금은 교회에 다니고 있지 않지만 경건하고 신실한 믿음을 지닌 온유한 신자들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지인 목사는 내게 주님은 항상 가까이 계셔서 언젠가 거두어주실 것이라고 해요. 내가 무슨 농작물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속으로 중얼거렸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렸을 적 유년주일학교의 기억도 떠오르고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그때 ‘진격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고래 뱃속에 ‘세 들어’ 산 요나, 방주에서 ‘AI 비둘기’를 날리는 노아 이야기를 환등사진과 함께 처음 보고 들었고 그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성경에는 ‘돌아온 탕자’ 등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비유와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누가복음(10:25~37)에 나오는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야말로 예수의 가르침(“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을 직접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전해 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아래는 인터넷 검색 자료 요약이에요.

‘예수가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자 유대인 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예수의 비유가 시작된다. 길을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심한 상처를 입었다. 신앙심이 깊은 두 사람, 사제와 레위인은 모른 체하며 지나쳐버린다. 그때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의 상처를 싸매고 주막으로 데려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주라면서 돈까지 준다.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하고 이교도 하층민으로 천시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야기를 마치고 물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대답은 명백했다. "자비를 베푼 자이니라."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부터가 ‘찐’입니다. 예수가 다시 말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더불어 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종교이자 그것도 ‘실천’의 종교입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지라도 주위를 살피면 항상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기독교의 참모습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덧대 조금 달리 재구성해 봅니다.

    “주여, 이웃이 누구이오니까?
    “네 도움이 필요한 자가 너의 이웃이니라.”
    “오, 주여, 그다음엔요? 제가 어찌하오리까?”
    “어찌 그리 모르느냐? 가서 도와라.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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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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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상소 논란을 지켜보며

2020.09.01

문재인 정부를 상소문 형태로 비판한 청와대 국민청원 ‘시무7조 상소’가 40만 명 가까운 동의를 얻어 청와대가 답변을 해야 하는 기준 2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청와대가 뭐라고, 어떤 형식으로 답변을 할지 궁금합니다.

이번 상소는 국가원수를 폐하라고 부르면서 옛글 형식으로 세금문제 등 일곱 가지 폐해를 추궁하고 일신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글을 쓴 진인(塵人) 조은산이라는 사람은 짐작과 달리 39세의 젊은 가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 바 있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이런 형식의 글을 쓰기까지 그는 많은 고심을 했을 것입니다. 세로로 읽으면 현미, 해찬, 미애, 조국 이런 이름이 드러나도록 공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시대의 명문이라고까지 생각되지는 않지만, 단순한 패러디와 기롱(譏弄)으로 넘기기 어려운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다 해주었다고 반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더불어민주당의 골수 지지자들로서는 당연히 불편하고 불쾌한 글일 것입니다. 이 상소에 대해 SNS에 글로 나타난 대표적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70대 전직 언론인 박영호 씨가 쓴 글. 그는 상소자의 눈치없는 어리석음을 이리저리 비꼬고 질타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역성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추미애가 미친 년 널뛰듯 하며 칼춤을 추는 건 나도 알지…. 성격이 탐욕스럽고, 변두리 면장감도 안 되면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균형감각이 전혀 없어 법무부 장관으로는 부적합하지. 그러나 고집 하나는 알아주어야 하지 않나? 그 고집 정도 돼야 윤석열을 밀어낼 수 있지 않겠나?” 또 “난 외교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어. 전혀 깜깜이야. 그래서 강경화에게 다 맡기고 있지. 이 여자가 가볍고 촐싹거리고 머리에 든 건 하나도 없지만 바깥에 나가기만 하면 황후한테만은 간도 빼줄 듯 잘 하거든….”

그러면서 “장기 집권? 그런 거 없어. 난 퇴임 후 등 따시고 배부르고 감옥 안 가면 된다니까”라고 합니다. 글은 “윤미향, 추미애, 최강욱, 이성윤, 김명수, 김어준, 김경수, 손혜원, 유시민, 이해찬 이들이 있는 한 난 끄떡없으니 처사가 시답잖게 우국충정이라는 말로 날 걱정하진 마시오!”라고 끝납니다.

다른 하나는 림태주라는 시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하교(下敎)-시무 7조 상소에 답한다’입니다. 그는 “너의 문장은 화려하였으나 부실하였고, 충의를 흉내 내었으나 삿되었다(하는 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나쁘다)”고 상소문의 문체부터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온갖 조작된 풍문이 떠돈다. 나의 자리는 매일 욕을 먹는 자리다.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정작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학문을 깨우치고 식견을 가진 너희 같은 지식인들이 그 가짜에 너무 쉽게 휩쓸리고 놀아나는 꼴”이라고 말합니다.

림씨의 글은 “무지는 스스로를 망치는 데 쓰이지만, 섣부른 부화뇌동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어 모두를 병들게 한다. 내가 나를 경계하듯이 너도 너를 삼가고 경계하며 살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도 백성의 한숨을 천명으로 받든다”는 말로 끝납니다.

림씨는 지난해 대자보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판한 서울대생들에게 글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고 '훈계'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2014년에 낸 산문집에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조씨가 추천사를 써준 인연도 있습니다. 그런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청와대가 이런 형식과 내용의 답변을 준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상소를 했으니 그에 맞춰 비답(批答)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형식을 갖추려 할 수도 있겠지요. 더욱이 몸을 날려 강제수사를 하다 병원에 눕거나 영부인을 찬탄하면 승진하고 영전하는 세상이니 문장력을 뽐내며 존재를 과시하려는 문사들이 정권 주변에 수두룩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용역을 줄 수도 있겠지요.

역대 정권은 8·15와 같은 중요한 시기를 맞으면 국민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줄까 각계에 자문해 의견을 수렴하곤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그러지도 않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라를 잘 이끌어가기 위한 구언(求言)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 구언을 한다 해도 자기들 편만을 대상으로 할 테니 그 결과가 뻔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 림태주 시인의 시빗조 글과 같은 답변에 공감과 납득을 하겠습니까?

시무(時務)는 그 시대에 시급하게 다루어야 하는 일을 말합니다. 조선 선조 때 상소와 직언을 통해 개혁과 경장에 진력했던 율곡 이이는 저서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식시무(識時務)를 강조했습니다. 무엇이 급한 일인지를 알라는 뜻입니다. 율곡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금은 나라에 기강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간다면 다시는 희망이 없습니다. 반드시 주상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일시에 일깨워 기강을 세운 뒤에라야 나라가 될 것입니다. 기강은 법령과 형벌로 억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이 착한 것을 착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여 공정함을 얻어 사사로운 마음이 유행하지 않아야만 기강이 섭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방금 한 말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내용입니다. 지금 정부는 착한 것을 착하다 하기는커녕 악한 것을 착하다 하고 있습니다. 국가기강이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환국(換局)은 시국이나 정국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조선 후기에 집권 세력이 급변함에 따라 정국이 바뀌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나는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이후의 국면을 기해환국(己亥換局)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도덕과 정직, 양심에 대한 쿠데타이며 사회 전반을 뒤흔들어 흐리게 만든 일이었습니다. 격탁양청(激濁揚淸)은 탁한 물을 내보내고 맑은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거꾸로 격청양탁(激淸揚濁)을 해왔습니다. 양탁(揚濁)만이 아니라 공들여 양탁(養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시무7조에 대해 청와대는 뭐라고 답을 할까? 조은산 씨가 림태주 씨를 반박하는 글을 낸 데 이어 조은산을 탄핵하는 척 정부를 비판하는 ‘경상도 백두(白頭) 김모(金某)’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형식 상소문이 또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백성들끼리의 공방이 아닙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문장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국민들이 접하고 싶어 하는 것은 감성이 아니라 반성입니다. 문식(文飾)과 수사(修辭)가 관심의 초점이 아니라 정의와 도덕을 바로 세우고 올곧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진정성이 절실합니다. 그런 변화와 일신을 보일 수 없을 것 같으면 차라리 입을 닫고 가만있다가 율곡의 말에 고개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던 선조처럼 난군(亂君) 암군(暗君) 혼군(昏君) 용군(庸君)으로 역사에 길이 남기를 바랍니다. ^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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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손들지 않는 기자들’,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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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필사(筆寫)

2020.08.31

고대 그리스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등이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24권이었습니다. 24권이라 엄청나게 길어 보이지만, 여러 장을 묶어 꿰매고 두꺼운 겉장을 붙인 요즘과 같은 책은 아니었습니다. 낱장을 연달아 붙이고 양 끝에 막대기를 단 두루마리였습니다. 보통 신약성서 한 복음서 정도의 분량이 기록되는 두루마리 한 개의 길이는 약 3m 정도였지만 심심치 않게 그 두 배가 넘는 것, 매우 드물게 10m에 이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값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리아스 전부는 긴 것과 짧은 것을 합쳐 24개의 두루마리이고, 지금처럼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책은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루마리가 되는 파피루스가 이집트에서 독점하던 수입품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활자가 없었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베껴야 하는 수고와 노력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수고와 노력? 실제로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가진 한글로 된 일리아스 제1권 약 20페이지를 베껴보니 꼬박 10시간이 걸렸고 어깨와 허리가 아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필경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것은 눈, 척추, 위장, 옆구리, 아랫배 등을 모두 상하게 한다. 아니 온몸을 아프게 한다. 마지막 문장을 필경할 때의 심정은 오랜 항해 끝에 항구로 돌아온 선원의 해방감과 영원한 은총을 받는 느낌이다.”
-실로스 베아투스 원고를 쓴 클로폰-

<출처:문자의 역사(조르주 장 지음/이종인 옮김. 시공디스커버리)>

 ▲ 파피루스와 갈대펜

그런데 이 힘들고 어려운 필사가 취미가 되면 마술에 빠진 것처럼 재미있어집니다. 당연히 마술에 빠지게 하는 것은 만년필입니다. 일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 벼르고 별러 산 새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순백의 종이에 파란 잉크가 뾰족한 펜 끝으로 샘솟듯 흘러나와 힘들이지 않고, 방향만 바꾸어 주면 종이에 스며들며 사각사각 써지는 글씨는 한 줄 두 줄 차곡차곡 쌓여 한 페이지가 되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허허허 그걸 누가 모르냐고. 그 비싼 만년필이 없단 말이지.”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건 옛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내 큰 문구점에 가면 커피 한 잔 값에 잘 써지는 만년필을 구할 수 있고 치맥(치킨과 맥주)을 한 번만 포기해도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만년필도 살 수 있습니다. 잉크는 어딘가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이고, 노트는 180도 잘 펼쳐지고 뒷면 박임이 적은 것을 고르면 됩니다. 사실 만년필은 굳이 비싼 것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1883년에 만들어진 워터맨 방식을 따르고 있고 쓰면 쓸수록 점점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래 써서 자기 손에 길이 나면 그 만년필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저렴한 것 중에 뚜껑이 깨지거나 밀폐가 떨어지는 것, 클립이 끊어지거나 탄력이 떨어지는 것이 있는데, 요즘 이런 것들을 취급하는 문구점은 거의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필사를 위해선 가늘게 써지는 것이 좋습니다, 만년필의 펜촉 굵기는 EF, F, M, B, BB 등으로 구분하는데 가장 가는 EF 펜촉을 사시면 됩니다.

▲ 필사한 <소나기>의 일부

필사에 좀 더 탄력이 붙으면 새롭게 잉크를 사보는 것도 좋은데 너무 비싼 것보다 범용(汎用)으로 사용되는 것들 중에서 고르면 좋습니다. 파커, 펠리칸 등 만년필 회사에서 나오는 가장 저렴한 것이 제 경험상 가장 안전하고 품질도 좋았습니다. 주의할 것은 만년필 회사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글씨가 지워지지 않는 문서 보존용 잉크가 있는데, 이 잉크가 들어간 경우  좀 더 자주 세척을 해주면 됩니다.  세척을 할 때는 펜촉 만큼 뚜껑 안쪽도 중요한데,  물에 적신 면봉으로 꼼꼼히 닦아주면 만년필을 보다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베껴 쓸 책으론 시집과 단편과 중편이 지루하지 않고 좋은데 저는 중학교 교과서에 있었던 황순원의 <소나기>,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김승옥의  <무진기행>,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재미있게 필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리소설은 성격이 급하신 분께는 금물(禁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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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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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차에 우리 이름을

2020.08.29

사람과 비교할 바 아니지만, 자동차 역시 태어날 때부터 오롯하게 자기 이름을 가집니다. 단순한 상표권을 넘어서 ‘자동차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게 차 이름이지요.

부도 직전까지 몰린 기아산업을 되살린 차는 그 이름도 친근한 봉고(Bongo)입니다. 봉고의 인기 덕에 우리는 한참 동안 ‘원-박스카’ 형태의 미니밴을 “봉고차”라고 불렀습니다,

21세기 들어 자동차 문화가 빠르게 발달하면서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해졌습니다. 자연스레 차종도 많이 늘어났지요. 여기에 정부의 ‘수입선 다변화 정책’에 따라 차 시장도 개방됐습니다. 이전에 없던 신기한 차들이 속속 우리나라에 들어오던 때였지요.

차종이 많아지고 차 이름도 늘다보니 자동차 회사마다 모델명 짓기에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사람이야 동명이인이 존재하지만, 자동차라는 값비싼 소비재는 이름 하나가 상표 권리인 동시에 시장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지요.

1990년 등장한 ‘엘란트라’는 한국 땅에서만 그렇게 불렀습니다. 독일 차 가운데 ‘엘란트’라는 차가 있었는데요. 그 탓에 현대차 엘란트라는 수출 모델명을 ‘란트라’로 바꿔야 했습니다.

2018년 현재 세계 최대 차 시장은 연간 판매량 3,500만 대인 중국이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연 1,800만 대)이 시장의 패권을 쥐고 있었지요. 그래서 많은 차 회사들이 미국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차를 개발했습니다. 물론 차 이름도 그들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골라내느라 밤잠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은 차 이름의 대부분을 스페인어에서 가져왔습니다. 영어권 소비자들에게는 스페인어가 그렇게 멋진 단어로 들린답니다. 결국, 한국 차도 스페인어에서 착안한 갖가지 이름을 쓰기도 했지요.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대우차 에스페로, 씨에로 등이 대표적입니다.

자동차 회사별로 차 이름을 짓는 ‘룰’도 있습니다. 예컨대 현대차 SUV 이름은 모두 미국의 지역명입니다. 팰리세이드와 싼타페, 투싼, 베뉴 등이 그렇습니다.

살펴보면 기아차 SUV의 이름도 이런 룰을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알파벳 S인데, 쏘렌토와 스포티지, 셀토스, 쏘넷, 스토닉 등이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고급차로 분류된 모하비를 제외하면 모두 S로 시작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녔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세기말을 앞두고 세계 시장에서 우리 자동차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고인이 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자동차에 순우리말을 강조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등장한 차가 대우자동차의 중형차 레간자와 준중형차 누비라입니다. “중형 세단 시장에 강자가 나타났다”는 의미를 담은 ‘레간자[來强者]’, 수출 길에 올라 널리 세계를 누비라는 뜻의 ‘누비라’입니다. 쌍용차의 단종된 무쏘(Musso) 역시 우리말 ‘무소’에서 따왔습니다. 3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으나 “무쏘~오”라는 이름은 지금도 입에 착착 달라붙습니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6대 자동차 생산국입니다. 현대기아차의 생산 규모는 5위권에 올라선 지 오래됐지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위한 자동차를 만들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수출에 매달리다 보니 미국 또는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신차를 개발해 왔습니다. 디자인도, 그리고 차 이름도 우리 문화 대신 그들의 문화를 우선했던 것이지요.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5년 미군이 버린 지프들을 주워다 재조립해 만든, 국내 최초의 양산차는 ‘시-바ㄹ’(상표권 디자인상의 표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라면, 응당 우리말로 된 차 이름 하나쯤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당신들은 다국적 기업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기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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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준형
이투데이 산업부 자동차팀장
1975년 전북 전주 출생. 전주고, 전북대 졸.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신문출판 전공). 1999년 월간 <자동차생활> 취재기자로 자동차 저널리즘 입문. 2009년부터 경제신문 이투데이 근무. 현재 산업부 자동차팀장(차장). 저서: <자동차 기업의 거짓말>(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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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재난 속 작은 기적

2020.08.28

드문 일이겠지만 살다 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을 만나는 수가 있습니다. 오매불망 그리던 임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다든지, 깜빡 잊고 찻간에 두고 내린 귀중한 물건을 전혀 얼굴도 모르는 이의 도움으로 되찾는다든지…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Liguria)에 사는 열세 살 비토리아 올리베리(Vittoria Oliveri)와 열한 살 카롤라 페씨나(Carola Pessina)의 꿈은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위험 때문에 마땅한 연습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집안이 가난해서 시설 좋은 훈련 캠프에 갈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둘은 살고 있는 아파트 옥상 위에서 연습하는 묘안을 생각해냈습니다. 이쪽 옥상에서 저쪽 옥상으로 볼을 넘기고 받는.

두 소녀의 옥상 테니스 연습은 뜻밖에 SNS를 통해 이곳저곳으로 널리 소개되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화제의 주인공이 된 둘은 어느 날 테니스 연습을 하던 바로 그 옥상 위에서 TV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페더러예요. 코트에서 늘 진지하고 집중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어요. 페더러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너무 좋아 그의 품에 뛰어들지도 몰라요.”

  “페더러의 플레이에서 꼭 한 가지 가질 수 있다면 백핸드 샷이에요.”

  “나는 페더러에게서는 우아한 플레이를, 나달에게서는 힘찬 플레이를 갖고 싶어요.”

  “그런데 둘은 서로 앙숙이잖아?”

  “그래, 둘은 매번 코트에서 맞서 싸우지. 그렇지만 서로 우정을 나누는 사이기도 하잖아.”

그렇게 두 소녀가 재잘거리는 등 뒤에 갑자기 페더러가 나타납니다.

“하이, 카롤라! 안녕, 비토리아!”

순간 두 소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합니다.

“믿을 수가 없어!”

“난 기절할 것 같아.”

두 소녀와의 인터뷰를 기획한 것은 바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 39, 스위스)와 스폰서 기업인 이탈리아 식품회사 바릴라(Barilla)였습니다. 테니스 선수를 꿈꾸며 옥상에서 연습하는 영상을 보고 그들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꿈이 돌연 현실로 변한 상황에 잠시 멍해 있던 소녀들은 뒤늦게 옥상에서 비명을 올리고 고함을 지릅니다.

“할머니, 페더러가 우리 옥상에 있어요! 챔피언 말이에요!”

“마네킹이 아니에요. 진짜 페더러예요!”

그렇게 두 소녀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가장 좋아하는 스타 페더러와 옥상 테니스를 즐기고, 파스타를 함께 먹으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위스로 돌아간 페더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전 세계 여러 멋진 곳에서 테니스 경기를 해 보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그 옥상 플레이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코로나로 많은 제약이 있지만 우리는 열정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테니스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솔직히 내가 가졌던 최고의 시간이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세상입니다. 일상생활도 스포츠 활동도 암담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올해 테니스는 4대 메이저 대회 중 호주 오픈만 지난 1월에 치르고,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은 줄줄이 취소되었습니다. 이달 말 개막되는 US 오픈도 남녀 챔피언 라파엘 나달과 비앙카 안드레스쿠, 그리고 페더러 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코로나 위험과 부상 때문입니다. 게다가 관중도 없이 벌어지는 경기여서 참가한 선수들의 의욕도 예전 같지는 않겠지요.

챔피언의 소임이 꼭 코트를 지키는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테니스 사상 최다 메이저 타이틀(20회)을 기록하고 있는 최고 스타 페더러는 이탈리아의 한적한 마을 옥상으로 날아가 선수의 꿈을 키우는 두 소녀의 날갯짓에 더없이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페더러가 두 소녀에게 보낸 영상 편지가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차오! 카롤라, 비토리아! 서프라이즈(깜짝 선물)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너희 둘에게 꼭 알맞은 여름 캠프를 찾아냈단다. 라파 나달 아카데미에 너희들 얘기를 해 두었어. 빨리 짐을 꾸리지 않고 뭐해! 재미있게 잘 지내, 안녕!“

라파 나달 테니스 아카데미는 지난 2016년 나달(Rafael Nadal, 34, 스페인)이 고향 마요르카 섬에 세운 교육센터입니다. 테니스 교습뿐 아니라 일반 교과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7천여 평 부지에 학습 교실, 테니스코트, 수영장, 기숙사, 진료소, 스포츠카페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아카데미의 주인 나달 역시 코로나 방역과 치료를 위한 모금운동에 앞장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나달 테니스 아카데미 앞에 함께 선 페더러(왼쪽)와 나달

스포츠 무대 뒤에서 보게 된 챔피언들의 또 다른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때로 실망하고 때로 분노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살맛나는 곳이라는 희망도 갖게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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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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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걷는 즐거움

2020.08.27

오늘도 내 손목에선 ‘축하’의 진동이 울렸습니다. 스마트폰 건강 앱에 설정한 ‘만 보’를 걸었다는 신호입니다. 이 재미가 쏠쏠해 퇴근 후 집(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을 기점으로 이웃 동네까지 걷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함께 걸어주는 큰아이가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걷는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요일별로 코스도 정했습니다. 월요일엔 홍릉을 지나 청량리로, 화요일엔 중랑천을 따라 면목동으로, 수요일엔 이화교를 넘어 상봉동으로, 목요일엔 중랑천~묵동천~화랑천을 거쳐 태릉으로, 금요일엔 배봉산 둘레길로, 토·일요일엔 마음 가는 대로.

태릉 코스가 가장 걷기 좋습니다. 자동차가 없는 개천을 따라 걸으며 야경을 감상할 수 있고, 돌아올 땐 옛 경춘선 폐철길을 걸으며 낭만을 즐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태릉 동네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술 마시기 좋은 목요일 밤에도 돼지갈비 굽는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드넓은 배밭이 사라진 지는 오래입니다.

큰아이는 어릴 적 태릉에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합니다. ‘집 앞에 돼지갈빗집이 널려 있고, 갈비를 먹지 않는 날에도 맛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답니다. 갈비를 먹은 후 아빠와 갈빗집 마당에 눈처럼 핀 배꽃을 보던 기억도 난다네요.

2000년대 초만 해도 태릉과 공릉, 먹골의 갈빗집들은 특별했습니다. 넓은 배밭에 듬성듬성 놓인 평상에 앉아 숯불에 구운 돼지갈비를 뜯었습니다. 배꽃이 활짝 피는 봄이면 숯불향과 꽃향에 취해 술잔깨나 돌렸지요. 갈비를 서넛 판째 먹을 때면 주인이 와서 “우리집 갈비는 양념에 저 밭의 배들을 듬뿍 갈아 넣어 윤기가 흐르고 깊은 맛이 난답니다”라고 자랑하곤 했답니다.

‘태릉갈비’의 시작은 묘동마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묘동은 현재 태릉선수촌 자리의 옛 지명입니다. 이곳은 무덤이 많고 태·강릉의 제사를 맡았던 정자각(丁字閣)이 있어 묘산(廟山)이라 불리다 묘동으로 지명이 바뀌었다네요. 왕의 장례나 제삿날, 왕릉 근처에 살던 이들이 허드렛일을 하며 귀한 고기맛을 본 후에 알음알음 궁중요리법이 민간으로 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홍릉갈비’ ‘삼릉갈비’가 유명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동네에선 갈빗집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드넓은 배밭도, 단맛이 강하고 물이 많아 ‘꿀배’로 불렸던 먹골배의 달콤한 추억도 갈비가 익어가던 연기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태릉선수촌과 태릉골프장만이 그대로입니다. 정부가 이 동네도 택지로 개발한다니, 머잖아 저 푸른 땅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겠지요. 그린벨트 지역인데 어떻게 진행할지 참 궁금합니다.

그나저나 태릉이 이슈가 되면서 발음이 [태릉]인지, [태능]인지를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릉(陵)이 상황에 따라 [능]으로, [릉]으로도 읽히니 그럴 만도 합니다. 우리말의 ‘자음동화’ 때문인데, 한마디로 앞뒤 자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발음하기 쉽게 바뀌는 현상입니다. “받침 ‘ㅁ, ㅇ’ 뒤에 연결되는 ‘ㄹ’은 [ㄴ]으로 발음한다”(표준발음법 제19항)와 “‘ㄴ’은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발음한다”(제20항)라는 규칙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공릉은 19항에 의거해 [공능]으로 발음해야 합니다. 또 정릉은 [정능], 강릉은 [강능]이라고 소리 내야 맞습니다. 조선의 아홉 번째 임금 성종이 잠들어 있는 선능은 20항에 따라 [설릉]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태릉은 음운 변화가 일어날 환경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민할 것도 없이 표기대로 [태릉]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내일은 사도세자의 초기 묘소인 영우원 터와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 터가 있는 배봉산을 걷는 날입니다. 걷다 보면 몸은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니체가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말한 뜻도 알 것 같습니다. 당신도 길 위의 명상가가 되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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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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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언' 공모(共謀)의 메커니즘

2020.08.26

             
채널A 이동재 기자의 강요미수 사건은 이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신라젠 관련 비리 혐의를 캐기 위해 사건을 공모했느냐가 핵심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자와 검사 간의 공모의 메커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건이 터지면 검사 또는 형사는 수사를 하고, 기자는 취재를 한다. 사건에 관한 정보의 양에 있어 수사관과 기자는 비대칭 관계다. 기자의 취재는 수사관들로부터 수사상황을 듣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특종(特種)을 먹고 살아야하는 기자가 그런 취재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기자는 수사를 앞지르는 정보를 수집해야한다. 검찰 안에 정보원(빨대)을 둔다면 발품을 덜 팔고도 특종을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기자 개인의 노력 외에 기자가 속한 매체의 성향이나 영향력 등 복합적인 조건들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과열된 취재경쟁으로 기자는 종종 수사기관의 정보조작에 취약한 환경에 놓인다. 수사 당국이 정보조작을 위해 동원하는 것이 특정 언론사 또는 특정 기자를 선택해 정보를 흘리는 일본말의 ‘모치코미(もちこみ·집어주기)’ 전술이다. 그중에는 사실도 있지만, 여론을 떠보거나, 업으려는 탐색용 정보도 있다.

그것이 대형 사건이 났을 때 언론에서 추측성 보도가 많은 이유이다. 수사 당국으로서는 언론의 온갖 추측성 보도 중에서 수사에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하면 된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은 수사를 키우고, 수사의 방향을 잡아간다.

드물게 기자가 취재한 정보를 수사관에게 모치코미하는 수도 있다. 그 경우 양자 간의 유착으로 발전할 소지가 크다. 서울중앙지검이 이동재 기자 사건을 보는 시각이다. 이 기자가 유시민 씨의 범죄혐의에 대한 정보를 한 검사장에게 제공하고 검찰의 수사를 유도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흉악범죄 사건에서 사건 해결을 위한 기자와 수사당국 간의 정보교환의 필요성은 대체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밖에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모든 사건에서 특정 기자와 수사당국 간의 정보교환은 공모의 의심을 사게 된다.

공모는 꼬투리가 잡히지 않게 용의주도하게 이뤄져야 한다. 특종은 낙종한 많은 언론을 적으로 만든다. 특종의 배후가 유착으로 밝혀지면 특종기자는 끄나풀 기자로 전락한다. 사회적 파장이 큰 정치·경제 사건일수록 공모가 성층권에서 이뤄지는 배경이다.

이상은 필자가 1980년대 출입기자를 둔 언론사가 10여개, 출입기자가 50명 미만이었던 법조기자실에서 짧게 겪었거나, 느꼈던 풍경이다. 지금은 보도의 기준도 강화됐고, 출입기자 수도 300명 정도나 된다니 검·언 공모는 더 어려워졌다고 하겠다.

당시에는 보다 원시적인 취재방식으로 ‘사칭 취재’라는 게 있었다. 기자가 사건관련자를 상대로 검사나 형사를 사칭해 사건의 단서를 찾으려 한 경우다. 민간인을 상대로 형사를 사칭한다면, 형사를 상대로는 검사를, 검사를 상대로는 청와대를 사칭하는 식이었다.

요즘엔 보통 멍청하지 않고서는 그런 취재를 할 기자도 없겠거니와, 그런 기자에게 당할 형사나 검사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기자를 사칭한 사기꾼에 당하는 경찰에 관한 뉴스가 심심찮게 눈에 띄는 현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가 형사나 검사를 사칭해 얻은 정보로 특종을 하더라도 기자사회에서 그것은 술자리의 안주거리에 불과했다. 명백한 범법행위지만 무용담의 소재는 됐을지언정 비난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당한 쪽에서도 기자의 사칭 행위를 애교로 봐주는 분위기였다.

자신이 제보자의 덫에 걸려든 것도 모른 채 한동훈 검사장과 나눈 2월 13일자 대화녹음을 들려주며 제보자에게 한 검사장과의 친분을 과시한 이동재 기자는 위의 상황 중에서 어느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검사와의 친분을 과장한 요즘 판  '사칭 기자'라고 함이 맞지 않을까?

두 사람의 대화는 출입기자와 검사 간의 통상적인 대화 범위에 있지 범죄를 음모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범죄 공모의 대화가 성립하려면 두 사람 간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고, 이익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는 검사에게서 자신이 취재하고 있는 유시민 수사에 관한 정보를 캐내려고 하지만 검사는 유 씨에 대해 ‘관심도 없고, 검찰의 말 한마디에 꼬리를 내린 사람’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공모의 증거라기보다 공모가 아니라는 증거 쪽에 가깝다.

이것이 검찰 수사심의위가 한 검사장에 대해 수사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한 이유이고, 서울중앙지검이 이 기자를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공모혐의를 적시하지 못하고, 강요미수 혐의만 적용한 이유이다.

유시민 씨를 비롯한 여권인사들의 신라젠과의 범죄 연루여부를 취재해온 이 기자가 한 검사장과 범죄를 모의할 정도의 친분관계라면 한 검사장과의 대화녹취록을 들려주면서까지 제보자를 유인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검찰 수사심의위가 한 검사장과는 달리 이 기자에 대해 기소를 권유한 것은 취재방식의 위법성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취재방식에 대한 거부감이라면 누구보다 기자들이 더할 것이다. 기자가 구속됐음에도 언론이 그다지 동정적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인 검언 공모 혐의가 입증되지 못했으므로 기자에 대한 법적 조치도 검사와 상응해야 한다. 게다가 ‘미수’ 범죄다. 최소한 재판을 받더라도 불구속 재판이 맞다. 필자가 이 기자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나 검찰의 구속 기소를 언론에 대한 과도한 적대감의 표출로 보는 까닭이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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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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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怨恨) 살 일 아니네…

2020.08.25

중국 산서(山西)성 고평(高平)시에는 2,0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요리가 있습니다. 백기육(白起肉 바이치러우)입니다. 기원전 260년 진(秦)나라 맹장 백기(白起)가 조(趙)나라 땅 장평(長平; 지금의 고평 지역)전투에서 조나라 군을 대파하고 포로 45만 명을 생매장했습니다. 이런 참상을 당한 장평 사람들이 백기의 고기라도 씹으며 원한과 분노를 풀기 위해 만들어 먹던 요리라고 합니다. 물론 인육은 아니고 두부를 끓여 만든 요리이지만, 현지 사람들은 ‘백기를 삶아 먹는다’(吃白起 츠바이치)고 합니다.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지는 한이 맺힌 음식입니다.

까마득한 옛날의 장평전투 고사가 항간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지난 7일 검찰 인사 때 광주지검장에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밀려난 문찬석 검사는 당일 사표를 던지며 장평전투를 언급했습니다. 문 지검장은 “조나라가 인재가 없어 참패를 당했느냐. 옹졸하고 암울한 군주가 무능한 장수를 등용한 그릇된 용인술 때문이었다”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충성 포상’이라는 추미애 인사와 장관의 위법한 지휘권 발동은 ‘사법 참사’ 라고 공박했습니다.

조나라의 장평전투 참패 원인은 노장 염파(廉頗)의 수성전(守城戰)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이 진의 이간책에 말려 지휘관을 젊은 조괄(趙括)로 바꾼 데 있었습니다. 진과의 전쟁에서 전공이 혁혁했던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은 ‘병법의 달인’이라고 자처했으나 백기의 복병전술에 속아 45만 대군을 모두 잃고 자신도 전사했습니다. 효성왕은 조괄의 부모와 염파의 문경지우(刎頸之友)인 재상 인상여(闉相如)의 간곡한 반대를 뿌리치고 실전 경험이 없는 조괄의 임용을 강행했다가 지리멸렬의 낭패를 당했습니다.(자유칼럼 2008년 5월 28일 <현자는 어디에> 참조)

# 나라의 흥망을 갈라놓은 사람 쓰기

이 전투의 참패로 조나라는 농사짓고 전쟁할 장정이 없어 30년 뒤에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반면 이 전투의 승리로 백기는 무안후(武安侯) 작위를 얻었습니다. 30여 년 전장에서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워 진의 천하통일 기초를 세운 공로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가 죽인 적군이 16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기의 말로도 처참했습니다. 그의 출세를 시샘한 재상 범수(范睢)의 모함으로 왕의 명령을 받고 자결했습니다. "조나라 군사 수십만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유언과, 장평 땅 원귀의 후손들에게 살점을 씹히는 원한을 남긴 채.

우리나라에도 한이 담긴 음식이 있었습니다. 성계탕(成桂湯)입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이후 고려 유신(遺臣)들이 최영 장군의 제사상에 돼지고기(성계육)를 올렸다가 그것을 잘게 썰어 끓인 국을 성계탕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기해년 돼지띠인 터라 성계육으로 탕을 끓여 먹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습니다. 고려조의 왕족·벼슬아치와 토호 등 기득권 세력이 거의 몰살당하고 그 일가와 측근들까지 숙청당한 백성들의 한이 담긴 음식입니다.

‘조랭이떡국’이라는 말도 같은 데서 연유한 음식입니다. 개경(開京: 개성) 백성들은 떡국을 만들 때 떡 가래를 칼로 가지런히 썰지 않고, 손으로 수제비 뜨듯 뭉뚝뭉뚝 떼어 넣고 국을 끓여 먹었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목을 비틀 듯 떡을 비틀어 넣으며 미움을 표출한 것이지요. 이 같은 음식의 등장은 조선 초 혁명세력의 청산 대상인 고려왕조의 왕(王) 씨 일족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나라가 망하면 백성은 어육(魚肉) 되고

태조 이성계는 건국 초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 씨 중 남은 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모두 목을 베었습니다.(태조실록 5권) 이때 왕 씨인 줄 알고 숨겨 주거나, 왕 씨와 혼인한 인척도 사형에 처했습니다. 집안 멸문을 피해 달아나 숨은 왕 씨들 중에는 성을 옥(玉) 전(全·田) 김(金)으로 바꿔 궤멸을 면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배계급이 바뀐 역성혁명 중에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참극이었습니다. 오늘날 전주 이씨 인구는 260만 명, 개성 왕씨는 1만9,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왕조의 교체든, (프랑스혁명 같은) 시민혁명이든 권력 주체가 바뀌는 변란 변혁기에는 으레 기득권 세력이나 애매한 백성들까지 참혹하게 죽거나 핍박을 받았습니다. 전투에 패해 도륙당한 군인, 적폐·청산 대상에 올라 사형·파직·유배된 지도층은 물론, 도시 파괴·재산 약탈·아녀자 겁간 등으로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고 맙니다. 그로 인한 원한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쳐지도록 끔찍한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은 돌에 새기고, 원한은 모래 위에 써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 현재는 항상 우울한 것……(러시아 시인 푸시킨)
숱한 선각자들이 인간의 선성(善性) 회복을 되뇌었지만, 원한은 북극 얼음덩어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얼음이 녹으면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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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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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모르고 시작한 블루베리 농사

2020.08.24

             
재미 삼아 블루베리 농사를 시작한 것이 1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은퇴하고 농사를 한다 하면 마치 귀농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은 일자리가 생겨 제주에 왔다가 제주의 매력에 빠져 그대로 눌러앉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죠. 팔기 위한 것은 아니고 집 안에서 소비하고 친지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텃밭 농사 또는 취미 농사라고 할 수 있겠죠. 블루베리는 따서 생과로 먹기도 하고 잼이나 즙을 만들어 먹기도 하지요.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를 하니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아 주변에서 팔라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블루베리는 10대 건강식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쳐왔으며 주성분인 안토시아닌이 안구건조증에 좋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블루베리를 오래 먹어서 안구건조증이 없는 것은 물론 시력도 그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블루베리는 그리 흔한 과일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공급이 넘치는 상황이죠. 블루베리를 재배하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해외에서 블루베리가 든 요구르트나 디저트, 케이크 등을 먹어보면서 그 맛과 색에 끌리게 된 후로 머릿속에 늘 블루베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쇼 무대에서 셀린 디온이 부른 '블루베리 힐'이란 50년대 재즈도 약간의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10년 전 제주에 내려와 넓은 땅을 구하고 보니 좋은 나무와 꽃을 심어 근사한 정원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뭔가 실용성이 있는 작물을 재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주변 지역을 드라이브하다가 블루베리 농장 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내도 저도 흥미가 솟아 무작정 들어가보았습니다. 블루베리에 관심을 표하자 농장 주인은 매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면서 우리가 재배를 하기로 하면 적극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분은 해군장교 출신으로 10여 년쯤 후배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그의 협조 약속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정원 아래쪽 빈 터에 잡목과 잡초를 제거하고 작은 밭을 일구었습니다. 그다음에는 그 후배가 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도와주었습니다. 80평 남짓한 밭이었는데 묘목 간 간격을 3미터로 잡아 대략 30주를 심는데 같은 품종이 아니라 줄마다 다르게 해서 여섯 품종을 심었습니다. 품종을 다르게 하는 것은 첫째 수확시기를 다 다르게 하여 한꺼번에 모두 수확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다른 품종 간 수분(受粉)이 되어야 나무가 더 튼튼하고 열매가 좋아지기 때문이라 합니다. 블루베리는 포도와 다르게 송이로 따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낱개로 따는 것이므로 한꺼번에 모두 다 따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여름 수확기 두세 달 간 순차적으로 한 줄씩 따야 따기도 쉽고 따서 처리하기도 쉽습니다.

이런 걸 모르고 그냥 덤벼들었더라면 두고두고 고생할 뻔한 것이니 그 후배 농장주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10여 년이 지난 요즘도 가끔 들러서 효율적인 가지치기나 적정량의 꽃을 유지하는 방법 등을 지도해 좁니다. 가지마다 피는 꽃을 다 그대로 두면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릴 열매가 수만 많고 크기가 작아 수확도 힘들고 볼품도 없습니다. 블루베리 나무는 잘 유지하면 30년도 더 간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블루베리는 수많은 잔뿌리가 얕게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특성이 있어 그냥 흙에다 심는 게 아니라 피트모스(peatmoss)라는 매우 부드러운 부토를 사용합니다. 피트모스는 물을 오래 머금는 성질도 있어 블루베리에 적합하다고 하죠. 한 그루당 두 포대 정도를 1미터 폭으로 제법 깊게 판 구덩이에 부어넣고 거기에 묘목을 심습니다. 나무에 물을 주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너무 많이 주면 과습(過濕)이 되어 나무가 죽고 너무 적게 주면 잎이 말라서 죽거나 생산력이 감퇴됩니다. 실제로 물을 너무 많이 주어서 낮은 지대에 있던 나무 서너 그루가 죽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기술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극복할 수 있었지만 새들로부터 열매를 보호하는 일이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2년생 묘목들을 심어놓고 나서는 곧바로 방조망을 쳐야 했습니다. 이름은 방조망이지만 방충망으로의 역할도 하고 당시 가끔 출몰하던 노루의 접근을 막아주기도 하였습니다. 비교적 촘촘한 그물망을 높이 3미터로 쳤는데 제법 공사가 컸습니다. 숲에서 지저귀는 새를 생각하면 새라는 것이 귀엽게 보이지만 뜰에 있는 열매를 다 따먹으니 밉기도 하죠. 다른 건 몰라도 귀한 블루베리 열매를 새에게 내줄 수는 없는 거죠. 그런데 방조망을 쳤다고 새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닙니니다. 새 중에도 아주 영리하고 날쌘 놈이 있는데 직박구리란 놈입니다. 이들은 두세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면서 보이는 열매들은 다 따먹는데 어느 날 보니 직박구리 두어 마리가 방조망 안에 들어가서 멋대로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열매들을 따먹으면서 말입니다. 어딘가 뚫린 곳으로 들어왔을 텐데 나갈 때는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어 번번이 작대기를 들고 위협하면서 어렵사리 밖으로 쫓아내야 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방충망의 이음새 부분이 벌어져 새들의 침입에 취약해지는데 블루베리가 익기 시작하면 방조망 안으로 침입하는 직박구리와의 싸움이 큰 일거리가 됩니다. 망 안에 새가 보이면 쫓아내기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새가 들어온 망의 틈을 찾아서 꿰매줘야 합니다. 강풍이 불고 난 다음 날에는 전체적인 방충망 점검을 하고 여기저기 손상된 곳을 찾아 큰 바늘로 꿰매는데 사다리를 들고 안팎을 다니면서 두어 시간씩 수선 작업을 합니다. 다 막았다고 생각하는데 다음 날 직박구리가 망 안에서 또 날아다니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구석구석 면밀히 살피면서 새가 들어온 틈을 찾아내야 하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한참 뒤에 직박구리는 뚫린 구멍이 없어도 들어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세 마리의 새떼가 망 위에서 뜀뛰기를 하다가 이음새 부분이 느슨해지면 그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팽팽하게 조이긴 했지만 이들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새의 폐해도 그렇지만 정작 큰일은 자연재해였습니다. 촘촘한 방충망은 새뿐만 아니라 벌레도 막을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대신에 바람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굵은 쇠파이프로 기둥을 해놓았는데도 강풍에 기울어지고 무너지고 하였습니다. 수년 전 태풍에 방조망이 대폭 손상되어 기둥을 다시 세우고 망을 보완하면서 대수선을 했는데 전처럼 천정을 개폐식으로 하지 않고 고정식으로 하였습니다. 수동 개폐식은 열고 닫는 것이 힘들고 망을 약화시키기에 단순한 고정식으로 바꾸었는데 이번에는 눈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개폐식일 때는 겨울에 천정을 열어두면 눈이 아무리 와도 문제가 없었지만 고정식으로 해놓으니 천정이 눈의 무게에 눌려 방조망이 전체적으로 내려앉은 것입니다. 이렇게 방조망조차 제대로 유지하기가 힘드니 농사가 제대로 될 수가 없지요. 천연재해 때문에 두 해나 수확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이걸 다시 수리를 해야 하나 하면서 실의에 빠져 있다가 블루베리 농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집수리를 하는 중 기술자 한 분이 방조망을 튼튼하게 잘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여 믿고 한번 맡겨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기둥과 천정의 골조를 더 탄탄하게 하면서 둘러씌우는 망도 다른 것으로 했습니다. 강풍이나 눈에 견딜 수 있을 만큼 성기되 새는 못 들어올 만큼 촘촘한 것으로 했습니다. 새의 침투에 취약한 이음새도 없이 하나의 그물을 통째로 덮어씌우는 망이었습니다. 이제 자연재해나 새에 대한 방비는 되는데 문제는 벌레에 대한 방비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두 가지 큰 문제가 해소되었으니 나머지는 해 나가면서 대처해야지요. 벌레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올해부터 막걸리트랩을 사용하여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있습니다. 큰 플라스틱 생수병 각 면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뚫고 병에 막걸리와 에틸렌, 설탕을 섞어 블루베리 밭에 여러 개 매달아 놓으면 벌레들이 냄새를 맡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빠져 죽습니다. 막걸리를 벌레에게 내준다는 것에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마운 마음도 들지요.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마추어 블루베리 농사를 지금껏 해오고 있습니다. 스스로 가꾼 농산물을 소비한다는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 보람을 맛보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이 작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요. 텃밭을 가꾸는 주변의 많은 분들도 제대로 농사의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갈 것입니다. 하물며 농민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이 시장 판매대에 오르기까지 그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이 들어갔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비단 농민뿐 아니라 어민도 그렇고 공산품을 만드는 기술자나 노동자도 그렇습니다. 조그만 블루베리 텃밭농사를 하면서 농어민를 비롯해 우리 소비자를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모든 생산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집니다. 우선 음식을 아껴서 먹고 남겨서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생산자에게 진정한 감사를 표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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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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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의 꿈

2020.08.21

     
요즈음에는 텔레비전 프로가 양분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조리하거나 먹는 프로가 아니면 오디션프로입니다. 방송사마다 먹방과 오디션 프로를 경쟁적으로 내보내다 보니 방송사간의 차별성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과거 10여 년 전에는 방송사들마다 ‘막장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내보냈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막장드라마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어떤 ‘음모’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그 시대를 반영합니다. 막장 드라마를 유행시켜서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국민들을 무관심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전 국민이 시청하는 방송에서 고급 음식이나, 과도한 양의 음식 먹는 장면을 앞을 다투어 내보내는 것이나, 일등만 요구하는 오디션 프로를 경쟁적으로 내보내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밥 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가정이 많을 뿐만 아니라, 1등이 아니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다는 식의 방송프로가 과연 공익성이 있는지 띠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는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들이 부족했습니다. 집에 신기한 물건이 들어오면 부모님 몰래 학교로 들고 가서 자랑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서울 사는 삼촌이 쓰고 온 선글라스를 갖고 와서 자랑을 하는가 하면, 그 시절에는 보기 힘들었던 일제 일회용 라이터를 들고 와서 쉬는 시간 내내 불을 켜 보이기도 하고, 일반 껌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던 풍선껌을 씹으며 연신 볼이 터지도록 풍선껌을 불기도 합니다. 그 친구는 풍선껌이란 별명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따라다녔습니다.

이름이 두기인 친구는 부모님이 건어물전을 합니다. 가끔 가게에서 부모님들 몰래 오징어를 들고 와서 조금씩 찢어서 나누어주고는 했습니다. 그 친구의 별명은 일본어로 마른 오징어를 뜻하는 스루메(するめ)를 우리식으로 변형한 ‘쓰리메’였습니다. 건어물전 이웃의 약방집 아들도 경쟁 삼아 부모님 모르게 영양제인 ‘원기소’를 한 움큼씩 들고 와서 두세 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친구 별명은 어른들 사이에서는 약방집 아들이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원기소’였습니다.

이 밖에도 앞이마가 튀어나왔다고 해서 ‘앞짱구’ 잘 웃는다고 해서 ‘합죽이’, 머리에 기생충이 잘 난다고 해서 ‘기생충’, 안경을 썼다고 해서 ‘안경’ 등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뛰어다니며 장난 잘 치는 친구들은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습니다. 그도 저도 특징이 없으면 아버지 이름을 놀림 삼아 부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만화책을 거의 끼고 사는 데다, 이름에 ‘만’자가 들어가서 ‘만화가’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학교 근처에 사시는 담임 선생님이 토요일 오후에 이사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5학년이면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 시절에는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들을 불러서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거나, 텃밭의 고추를 따라고 시키는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못해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소재지 사는 몇 명이 담임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이삿짐을 날라주기로 했습니다. 학생 중에는 소재지에 살지 않는 ‘티밥쟁이’도 끼어 있었습니다. 나이가 두 살 정도 많고 덩치가 가장 큰 ‘티밥쟁이’는 아버지가 장날 뻥튀기를 튀겨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컸는데 수줍음을 많이 탔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다 보니 특별히 친한 친구도 없이 늘 혼자 지내는 편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이사를 가실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셋집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본가였습니다. 이삿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해서 리어카로 이삿짐을 나르기로 했습니다. 덩치가 큰 티밥쟁이가 앞에서 끌고, 우리는 뒤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5리 길을 왕복으로 서너 차례 했습니다.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한참 먹을 나이 때인지라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맹물에 국수를 말아서 간장고명을 얹은 시원한 국수 한 그릇씩 말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달랑 인절미 한 접시가 나왔습니다. 한참 힘을 쓰고 난 뒤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인절미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티밥쟁이는 입맛만 다실 뿐 먹지를 않았습니다.

  “환문이는 왜 안 먹는 거여? 집에까지 가려면 배가 고플 텐데?”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셨지만 티밥쟁이는 얼굴을 붉힐 뿐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인절미 접시에 인절미가 달랑 한 개만 남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이번에도 ‘하나 남은 것은 환문이 먹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티밥쟁이가 침을 삼키며 인절미를 바라봤습니다. 막 먹으려는 찰나에 쓰리메가 "먹기 싫으면 내가 먹지" 라며 잽싸게 낚아채서 입안에 넣었습니다. 그때의 티밥쟁이 표정은 분노와 허망함, 억울함과, 야속함이 복잡 미묘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웃고 떠들며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티밥쟁이는 왜 인절미를 먹지 않았느냐? 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티밥쟁이는 쓰리메를 원망서린 눈초리로 가끔 노려보기는 했지만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쓰리메며, 원기소며, 합죽이도 제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서 객지 사람들이 되어 갈 무렵입니다. 우연히 티밥쟁이와, 그의 동생을 삼거리 길목에서 만났습니다. 머리카락에 기름을 바르고 서울 사람 티를 내고 있는 티밥쟁이보다 동생의 옷차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시절 모 은행의 명동지점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가끔 남태평양이나, 오라오라 같은 나이트클럽에 다녔는데 거기에 출연하는 가수들처럼 차려입었습니다.

  “동생 매니저하잖여.”

제가 안부를 묻는 말에 티밥쟁이는 동생은 가수이고 자신은 메니저를 하고 있다며 부끄럽게 웃었습니다. 매니저라는 말에 갑자기 인절미 접시가 생각나서 놀랐습니다. 가수 매니저와 인절미 한 개도 먹지 못한 티밥쟁이의 얼굴이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는 탓에 동창들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동창으로부터 티밥쟁이의 근황을 들었습니다. 티밥쟁이 동생이 읍내의 무슨 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다는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울의 유명한 작곡가가 직접 찾아왔고 티밥쟁이 동생이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는 겁니다. 몇 개월 후 동생은 레코드 취입을 해야 가수로 성공할 수 있다며, 아버지가 평생을 뻥튀기 기계를 돌려 장만한 몇 마지기의 땅을 팔아 가수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티밥쟁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 일부러 뻥튀기를 하는 곳으로 갈 때도 있습니다. 뻥튀기를 하시는 분들은 종일 뻥튀기 기계를 돌리다보니 얼굴은 항상 연기 그을음에 시커멓습니다.
머리카락이며 눈썹에는 뻥튀기 부스러기가 눈송이처럼 앉아 있습니다. 시커먼 땀으로 검게 절어 있는 수건을 목에 건 얼굴로 우리들을 보면 환하게 웃으며 반깁니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한 주먹씩 내 주는 뻥튀기를 양손으로 받아서 먹으며 집에 가는 길은 정말 즐거웠었습니다.

비록 산골 논이지만 평생 뻥튀기 기계를 돌려 몇 백원씩 받은 돈을 모아서 산 논을 기꺼이 팔 때는 부자지간에 교감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들은 “가수가 돼서 성공하면 더 이상 뻥튀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을 테고, 아버지는 아들이 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힘이 나는 판국에,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가 되겠다는 말을 하니까 앞뒤 가늠해 볼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신세 조졌지 머. 아무나 가수하나.”

문방구 친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대복을 입은 동생의 모습에서 풍기는 잘나가는 가수의 이미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활수준이 좋아지고 농협에 하나로 마트가 생기면서 길가에 있는 가게 삼분의 이는 문을 닫았습니다. 장날에는 티밥쟁이들이 세 명씩이나 있는데 한 명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터 장사꾼들도 눈에 뛰도록 줄어 바람만 허허롭게 돌아다녔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티밥쟁이 동생을 만났습니다. 대전 무슨 유원지 입구에서 꽤 큰 식당을 하고 있다며 꼭 놀러 오라는 말에 형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형은 서울에서 개인 화물차를 모는데 먹고살 만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제 입안에서는 가수는 언제 그만두었느냐는 말이 맴돌았지만 결국 목구멍 안으로 그냥 삼키고 말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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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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