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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이 2천년? 3천년? 오락가락 도동항 향나무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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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나무 (측백나무과) Juniperus chinensis

울릉도의 관문, 도동항 동편 암벽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고색이 창연한 향나무의 모습입니다. 수령이 약 2,000년에서 3,000년으로 설왕설래하는 우리나라 최고령 향나무입니다. 높이 4m, 둘레 2m, 경상북도 지정 보호수로서 척박한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천년의 세월이 거듭하는 동안 울릉도를 말없이 지켜보아 온 울릉도의 상징 노거수(老巨樹)입니다.

울릉도의 특이한 식물상을 보기 위해 몇 차례 울릉도를 탐방하곤 해오다가 올봄에는 두 차례나 다녀왔습니다. 울릉도 가는 뱃길이 매우 빨라지고 편리해진 덕분입니다. 강릉에서 출발하는 울릉도 항로에 쾌속선이 본격 운항하여 항행 시간이 3시간으로 단축되었습니다. 더하여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서울~강릉 간에 경강선 KTX가 개통되어 서울에서 울릉도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진 덕분입니다.

강릉의 안목항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로 가는 3시간여 여정은 항시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날의 일기에 따라 배가 출항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출항한다고 해도 먼바다 풍랑의 세기에 따라 뱃멀미의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울릉도행 배를 타는 순간부터 항시 설렘과 기쁨이 가득합니다. 울릉도에서만이 만날 수 있는 독특한 해안 암벽과 지형, 귀한 야생초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울릉도 면적(72.9 ㎢)은 우리 국토 전체의 0.07%밖에 안 되는 작은 섬입니다. 울릉도는 대략 250만 년 전 신생대 3, 4기에 화산작용으로 생성된 곳이라 합니다. 내륙과는 다른 지형·지질과 독특한 이중화산 형태를 이루고 있어 국가 지질공원으로 인증된 섬입니다. 또한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독특한 지형에 난대림과 온대림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환경에 따라 이 작은 섬에는 무려 650여 종의 자생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중 섬개야광나무, 섬시호, 섬현삼 등 전 세계에서 오직 울릉도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만도 30여 종에 이르고 있습니다. 울릉도는 어느 때, 어느 곳을 가도 신기하고 새롭기만 한 한국의 갈라파고스입니다.

울릉도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내륙 항구는 강릉, 묵호, 후포, 포항입니다. 전에는 내륙에서 울릉도에 가는 배가 입항하는 중심 항이 도동항이었지만 지금은 후포에서 출발한 배는 사동항에, 강릉에서 출발한 배는 저동항에 입항합니다. 강릉에서 출발한 배를 타면 맨 처음 반기는 명물이 저동항 촛대바위입니다. 울릉읍 저동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저동항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일출 풍경이 절경이라 합니다. 그러면 도동항에 입항할 때에 맨 처음 시선을 끄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별로 다를 수는 있지만 아마도 도동항 동편 암벽 위에 우뚝 서 있는 향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도동항에 내려 동편을 바라보면 암벽 위에 솟아난, 양쪽으로 줄이 달린 향나무가 눈에 바로 들어옵니다. 이 향나무가 국내 최고 수령(樹齡)이라 합니다. 한때는 수세(樹勢)가 왕성했지만, 긴긴 세월에 닳고 닳아 이제는 인간이 받쳐준 가녀린 두 줄에 의지하고 있는 노거수(老巨樹)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울릉도에 올 적마다 궁금한 것이 이 향나무의 수령입니다. 과연 이 향나무의 수령은 얼마나 될까? 이곳 주민마다, 인터넷에 올려 있는 자료마다 2,000년에서 4,000년까지 설이 다양합니다. 이곳에서 관광가이드 겸 택시기사를 하신다는 분의 말씀은 X레이 투시 검사 결과 2,500년으로 판명되었다고 자신 있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확실한 그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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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령 2천년, 3천년으로 설왕설래하는 도동항 동쪽 암벽 위 향나무 모습

향나무는 높이 약 20m까지 자라는 교목입니다. 새로 돋아나는 가지는 녹색이고 3년생 가지는 검은 갈색입니다. 7∼8년생부터는 비늘 같은 부드러운 잎이 달리지만, 새싹에서는 잎사귀에 날카로운 침이 달려있습니다. 꽃은 단성화이며 수꽃은 황색으로 4월과 5월에 피고 열매는 구과(毬果)로 원형이며 흑자색으로 다음 해 9~10월에 익습니다.

향나무는 잎이나 줄기에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도 쓰였으며 향료 또는 고혈압, 심한 복통, 곽란 등의 치료제로 쓰였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원예 품종으로 개발해서 들어온 가이스카 향나무와 달리 향이 좋아 향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조각, 가구재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만드는 데 귀하게 쓰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 노송나무라고도 불립니다. 옛날 우리 시골 동네 우물가에는 꼭 향나무가 몇 그루씩 있었다고 합니다. 임금들 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제194호 창덕궁 비원의 향나무는 수령이 750년이라고 합니다.

도동항의 향나무 수령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울릉군청의 홈페이지(www.ulleung.go.kr) <문화관광>을 봐도 3,000년과 2,000년으로 각각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광가이드/ 울릉읍 /울릉도 향나무》에는 ‘행남해안길 초입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나무인 울릉도 향나무가 서 있다. 높이는 4m에 불과하지만, 수령은 무려 3,000여년이나 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레저&스포츠/행남해안 생태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나무》에는 ‘우리나라 최고령 향나무로 수령이 약 2,000년으로 높이 4m, 둘레 2m, 경상북도 지정보호수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최근 경북 모 지방지의 보도 자료(2019.01.28.)를 검색해보니 「최근 국립산림과학원 산하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최병기 연구관 외 4명이 도동항 향나무 수령 측정을 위해 다녀갔다. 이번 방문에는 노거수 연령 측정 권위자인 서정욱 충북대 교수도 참가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노거수는 천공(나무를 뚫는)을 통해 나이테를 측정할 수 있지만, 도동항 향나무는 이 작업에서 측정이 어려워 시료를 채취해 나이를 측정·연구 중이다. 결과는 2월께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도동항 향나무는 비공식적 측정으로 지난 2013년 산림청 녹색사업단의 측량 결과 2천300살로 추정됐다. 만약 2천년이 넘으면 우리나라 최고의 수령이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사를 쓴 기자님에게 E-메일을 보내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를 문의하였더니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답신이 왔습니다. “아직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조사를 발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라고.

아직도 도동항 향나무 수령은 오락가락, 오리무중입니다. 확실한 것은 100년 인생인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길고 긴 세월을 이겨 내 온, 아직 살아있는 나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 길고 긴 세월이라 100년 인생살이에 10년, 20년이 중요하지 장구한 지구 역사의 세월에서 보면 2천년이건 3천년이건 그게 그것인 모양입니다. 긴 시간과 공간의 시각으로 보면 그게 그것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짧은 눈으로는 좀 더 확실하고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 속성이 아닐까? 긴 안목과 담대한 거인(巨人)의 시각으로 보면 ‘삼척항’이나 ‘삼척항 인근’이 거기서 거기로 다를 게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짧은 인생의 단견(短見)으로 2천년인지 3천년인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아직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습니다.

(2019. 6월. 울릉도 도동항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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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환경에도 견디는 점포

2019.06.26

집에서 반경 300미터 이내에 다섯 개의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그중 두 곳이 지난봄에 문을 닫았습니다. 최근에 한 개의 편의점이 새로 생겼지만 이 간단한 통계에서는 제외하고 생각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래된 점포가 편의점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점주는 그대로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두 점포나 문을 닫은 원인은 짐작해 볼 뿐입니다. 아마도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휴수당의 추가 지급 등도 중요 이유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남아있는 한 편의점에서 점주로 보이는 이에게 물었습니다. “신문을 보면 최저임금과 주휴수당 문제로 아르바이트 직원을 변칙적으로 고용한다는데 실제 그런가요?” 웃으며 손님을 대하던 그가 낯빛을 바꾸며 말했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해요? 노동부 직원이세요?”

이런 궁금증을 지니던 차에 한 맥줏집에 관심이 갔습니다. 은평구 연신내 상권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점포 면적은 작습니다. 지인과 함께 처음 가 본 지가 삼사 년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창업한 점포가 얼마 못 가서 문 닫는 사례가 많은 점을 감안하면 비교적 잘 운영해 온 곳입니다. 깔끔한 집이라는 첫인상을 가졌지만 별다른 특색은 못 느꼈습니다. 최근에 점장과 몇 차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주휴수당 문제를 물었더니 답은 이랬습니다. “우리 가게는 사정이 좋은 편이어서 아르바이트 직원의 근무 형태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변 다른 점포들은 대다수가 일을 쪼개서 이전보다 많은 사람을 쓰고 있습니다. 근무 시간을 서너 시간 단위로 나누는 것이 그 한 방법입니다.”

그의 답에 호기심이 더 발동되었습니다. 작은 점포인데 인건비가 상당히 올라도 유지에 어려움이 없다 하니 말입니다. 살펴보니 철저한 저가 전략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메뉴판은 종이 한 장입니다. 탁자 옆에 붙여 놓았습니다. 안주는 열 가지 남짓으로 웬만한 맥줏집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종류가 적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리나 가공이 단순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주방이랄 것도 따로 없습니다. 매장 한쪽에 작은 싱크대와 약간의 도구가 있을 뿐입니다. 그 장소는 일반 주택의 조리 공간보다 넓지 않아 보입니다.
탁자는 조밀하게 배치하여서 한 번에 예순 명 정도까지 수용이 가능합니다. 통로는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폭이지만 탁자 사이마다 나지막한 칸막이가 있어서(통로 쪽에는 칸막이가 없습니다) 앉았을 때 어느 정도 독립성이 느껴집니다.

가격도 이런 환경에 걸맞게 책정하였습니다. 낮은 가격입니다. 병맥주의 가격은 다른 곳보다 쌉니다. 안주는 종류가 적고 손질하기도 단순하니 가격을 낮출 수 있습니다. 메뉴나 가격은 누가 정했느냐고 물었더니 점장이 점주와 상의하면서 결정했답니다. 가장 비싼 닭날개 튀김을 보지요. “주변 다른 점포에서는 아홉 조각에 구천구백 원 받는 것을 보고 여덟 조각을 한 접시로 하고 팔천 원으로 정하였습니다.” 가장 낮은 가격의 하나인 쥐포구이는 작은 쥐포 두 쪽에 삼천 원입니다. 저가격 점포라는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손님 입장에서 그다지 불만족스러운 점은 없습니다. 가격 대비 품질은 괜찮은 편이지요. 어떤 프랜차이즈 맥줏집처럼 극단적으로 낮은 가격을 유지하느라고 품질도 지나치게 낮춘다든가 한 품목은 없습니다.

손님이 붐비는 시간에도 직원 두 명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데에 무리가 없으니 인건비 부담도 적습니다. 두 사람이 상황에 따라 역할 분담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주방 담당과 홀 담당의 분담이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손님이 좀 적은 시간에는 한 사람이 근무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일하다가 틈을 내어 빈 탁자에 앉아 저녁을 같이 먹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도 손님 탁자의 벨이 울리면 한 사람이 이내 움직입니다. 이런 저가형 점포에서는 그렇게 해도 그다지 흠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우아한 식당에서와 같은 서비스를 기대할 손님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입에 음식을 머금은 채로 손님을 응대하지는 않습니다.

점장에게 인테리어는 어떻게 설치했는지 물었습니다. “보다시피 인테리어랄 것도 없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목수 한 명이 저와 수시로 상의하면서 작업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천장에도 나름대로의 손길이 닿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가격 정책에 들어맞습니다. 전략의 실행이 훌륭합니다. 사업전략이란 어떤 전략인지도 중요하지만 이곳처럼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전략이 일관성을 갖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규모가 큰 기업에서도 일관성 있는 실행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예를 들면 저가전략인지 품질우위 전략인지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경우) 이 작은 점포에서는 잘 해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병맥주보다는 생맥주가 훨씬 많이 팔립니다. 그 가격이 재미있습니다. 표면 가격이 낮습니다. 보통의 점포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작은 잔을 사용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단가로는 주변보다 결코 싸지 않습니다. 이 가격과 양이 이 점포에서 맥주 마시는 사람들의 행동 특성과 맞아떨어집니다. 손님들이 자주 들락날락합니다. 앉아서 긴 시간 마시는 사람들보다는 지나가다가 들러 잠시 대화하면서 마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작은 잔이 어울립니다. 표면 가격이 낮으니 손님에게서 심리적 저항을 받지 않습니다.

종업원들은 기본을 지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손님이 벨로 부르면 직원이 빨리 답을 하고 잰걸음으로 다가갑니다. 손님이 마시고 나간 탁자는 즉시 치웁니다. 다소 한가한 시간이 되면 화장실 청소도 합니다. 심야 시간에는 탁자마다 있는 종이 냅킨 통을 다시 채웁니다. 문 닫는 시간이 되면 바닥 청소도 합니다. 이런 일들을 직원이 한 명인 시간에 손님 응대도 하면서 해냅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냐구요? 당연한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해도 잘 하는 축에 듭니다. 그러지 못하는 점포나 기업이 많으니까요.

불경기에 임금 제도의 급격한 변화까지 겹쳐 어렵다는 때에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작은 점포가 있다는 사실이 대견해 보였습니다. 어떤 점포는 다른 방법으로 비용을 줄입니다. 물론 불경기라 해서 저가격만이 해법은 아닙니다.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남다른 품질이나 서비스로 손님을 끌어모으는 곳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격도 서비스도 아닌 나만의 고집스런 영업 방침으로 손님을 대하는 점포도 보았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그런 전략을 반기는 고객이 있어야 하고, 점포 운영의 세세한 부분까지 그 전략에 들어맞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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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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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삼(三) 숫자에 담긴 이야기들

2019.06.25

지난 16일에 치러진 FIFA U-20 월드컵 결승전에서 우리나라 대표 팀이 대회 사상 첫 우승이라는 온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고 우크라이나에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페널티킥으로 1:0으로 앞설 때 3:1 승리를 기대하며 시청했던 경기가 1:3 패배로 마감되는 것을 보며 문득 석 삼(三)이라는 숫자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주와 인간 세상의 기본적 구성 요소인 하늘, 땅 그리고 사람을 일컫는 천지인(天地人)은 삼재(三才)라고 부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의 빛은 삼광(三光)이라고 하며, 사람이 꼭 지켜야 할 강령은 삼강(三綱)입니다.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하며,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일이 없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말입니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기념식에서 만세를 부를 때 만세삼창(萬歲三唱)을 했습니다. 이는 만세를 세 번 거듭해서 외친다는 말로 만세가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두 번으로도 어중간하기 때문에 세 번을 외쳐야 마음에 와 닿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놀이에서 순서나 승부를 정할 때 '가위바위보'를 ‘삼세번’ 했던 추억도 떠오릅니다. 삼세번은 일반 생활을 넘어 사회규범이나 정치문화에서도 많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잘못했을 때 두 번까지는 용서를 해주어도 세 번째는 용서 없이 혼을 내 준다는 규범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법원에서 판사가 사건을 마무리하며 선고할 때 방망이를 세 번 두드리며, 국회에서도 의장이 의결을 선포하거나 휴회할 때 방망이를 세 번 두드립니다. 

불교에 부처님의 세 가지 보물을 칭하는 삼보(三寶)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불보(佛寶)는 석가무니와 모든 부처를 일컬으며, 두 번째 법보(法寶)는 불교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담은 불경이고, 세 번째 승보(僧寶)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도덕경(道德經)에는 도(道)는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으며, 3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신산(三神山)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삼신산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신산으로 발해만 동쪽에 있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일컫는데,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소년과 소녀들 수천 명을 보냈다고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신산은 중국의 삼신산에 대비해 금강산, 지리산 그리고 한라산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삼국지에서 촉한의 임금 유비가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맞아들이기 위해 그가 거주하던 초가집으로 세 번 찾아가 간청한 고사로 삼고초려(三顧草廬)란 말도 자주 듣던 말입니다. 또한 적벽대전 후에 위(魏), 촉(蜀), 오(吳) 세 나라가 가마솥의 발처럼 맞서 겨루는 것을 삼국정립(三國鼎立)이라고 합니다. 육군, 해군, 공군으로 구분하는 군대 전체를 일컫는 말은 삼군(三軍)입니다.

한자성어인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도 자주 들어온 말로 우리 속담에는 ‘굳게 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 있고, 바위 같은 굳은 결심도 끝까지 지켜내기 어렵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늦게 도착했을 때 ‘후래자(後來者) 삼배(三盃)’라고 소리치며 석잔 술을 연거푸 마시게 하는 관습도 있습니다. 이는 친구들 사이에 정을 가득 채우기 위한 관행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누리는 세 가지 즐거움으로 인생삼락(人生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 맨 앞에 나오는 인생삼락은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유수종사기(游水鐘寺記)에서 삼락으로 ‘어렸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찾아오는 것’, ‘가난하고 어렵게 지내던 곳에 출세해 오는 것’, ‘나 혼자 외롭게 찾던 곳을 마음 맞는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을 꼽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삼락은 책 읽고 글 쓰며 항상 배우는 선비정신인 ‘일독(一 讀)’, 사랑하는 이와의 변함없는 애정은 ‘이 호색(二 好色)’ 그리고 벗과 함께 어울리는 풍류는 ‘삼 음주(三 飮酒)’입니다. 상촌 신흠은 삼락으로 ‘문을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는 것’ 그리고 ‘문을 나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석 삼(三)이라는 숫자에 담긴 말들의 다양한 의미들을 떠올려보며, 내 삶에 어울리는 삼락(三樂)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내 삶에서의 삼락으로 아픈 데가 없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건강’, 집안이 화평하고 가족이 건강한 ‘가화(家和)’ 그리고 할일이 있고 봉사에 적극 참여하는 ‘보람’을 꼽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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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재욱

양정고. 서울대 생물교육과 졸. 한국생물과학협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약용작물학회 회장 역임. 현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과총 대전지역연합회 부회장. 대표 저서 : 수필집 ‘나와 그 사람 이야기’, ‘생명너머 삶의 이야기’, ‘생명의 이해’ 등. bangjw@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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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selblad Announces Its Smallest Medium Format Camera Ever

By Jessica Stewart on June 21, 2019


Hasselblad is allowing photographers to enjoy the quality of its medium format cameras in increasingly small sizes thanks to a new design. When paired with the soon-to-be-released CFV II 50C digital back, the Hasselblad 907X  medium format camera body will provide unparalleled photography quality in a small package. In fact, the 907X  is Hasselblad’s smallest medium format camera body ever.




 

핫셀블라드, 역대 가장 작은 중형 카메라 출시


   핫셀블라드는 새로운 디자인 덕분에 사진작가들이 점점 더 작은 크기로 중간 크기의 카메라 품질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곧 출시될 CFV II 50C 디지털 백과 짝을 이루면, Hasselblad 907X 중형 카메라 본체는 작은 패키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진 품질을 제공할 것이다. 실제로 907X는 하셀블라드의 역대 최소 중형 카메라 본체다.


CFV II 50C는 50메가픽셀 CMOS 센서(43.8 x 32.9mm)의 중간 형식을 가지며 1957년 이후 제작된 대부분의 V 시스템 카메라와 호환될 수 있다. 매끈한 복고 디자인은 기울일 수 있는 후면 스크린을 갖추고 있어 사진작가들이 고전적인 허리 레벨의 촬영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다. 완전 통합 배터리는 전체적인 디자인을 더욱 소형화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USB-C 포트를 통해 카메라 안에서도 충전할 수 있다.


907X는 모든 X 시스템 렌즈와 호환되며, 어댑터를 사용하여 Hasselblad의 H 시스템, V 시스템, XPan Lenses까지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이 회사는 또한 제3자 어댑터와 렌즈와 호환될 것이라고 발표하여 진정으로 다재다능한 시스템을 만들 것이다.




핫셀블라드(Hasselblad)는 또한 사진 경험을 향상시키기 위해 제어 그립과 외부 광학 뷰파인더를 포함한 액세서리의 롤아웃을 예상한다. 아직 가격이나 정확한 출시 날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하셀블라드는 2019년 후반에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Hasselblad CFV II 50C와 907X 중형 카메라 본체는 휴대성이 뛰어난 전문 카메라를 제공한다.


황기철 콘페이퍼 에디터 큐레이터

Ki Cheol Hwang, conpaper editor, 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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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FV II 50C has a medium format 50-megapixel CMOS sensor (43.8 x 32.9 mm) and can pair with most V system cameras made since 1957. The sleek, retro design features a tiltable rear screen that will allow photographers to pursue the classic waist-level shooting style. A fully-integrated battery has helped make the overall design even more compact and can be charged in-camera via the USB-C port.


The 907X is compatible with all X system lenses and by using adaptors, the range can be expanded to Hasselblad’s H System, V System, and XPan Lenses. The firm has also announced that there will be compatibility with third-party adaptors and lenses, making for a truly versatile system.


Hasselblad also anticipates a rollout of accessories, including a control grip and external optical viewfinder to enhance the photography experience. While there’s no word yet on pricing or an exact release date, Hasselblad has said that it will make an announcement later in 2019.


      


When paired together, the Hasselblad CFV II 50C and 907X  medium format camera body make for a highly portable, professional camera.



The CFV II 50C digital back is compatible with most Hasselblad models from 1957 onwards.




Its tiltable rear screen allows for flexibility in shooting styles.


Hasselblad will also be releasing accessories to enhance the medium format camera.Hasselblad 907X and CFV II 50C




Learn more about the exciting announcement from the world leader in medium format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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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0만원이 뚫는 작은 구멍

2019.06.24

“결국은 또 돈이네요."
영화 ‘친구2’에서 유호성이 김우빈에게 같이 부산을 접수한 후에, “따르는 식구가 더 많은 쪽이 대장을 하는 걸로 하자.”고 하자, 김우빈이 탄식하듯 내뱉은 말입니다. 주먹과 의리의 건달 세계도 결국은 돈에 의해 굴러간다는 걸 암시하는 대사입니다.

최근 김제동 씨의 고액 강연료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보며, ‘이 사람은 너무 자주 정치적인 공격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90분 강의에 1,550만원’은 요즘 같은 때에는 아젠다 세팅이 가능한 액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돈을 지불하는 주체가 재정 자립도가 낮아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지자체라는 점 또한 이 이슈의 파괴력을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칼럼을 쓰면서 각종 매체들이 이와 관련한 내용을 기사로 올린 것을 쭉 살펴보았습니다. 노골적으로 김제동 씨를 옹호하는 주장을 쓴 기사와 정치적으로 공격을 하는 기사, 이렇게 명확히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옹호를 하는 쪽은 “강연료는 시장이 결정한다. 그게 보수가 그렇게 신봉하는 자본주의 논리 아니냐?”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공격을 하는 쪽에서는 “이 정도면 문재인 정권의 화이트리스트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듣다 보면 이쪽 주장도 맞고 저쪽 이야기도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진실을 가리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바로 돈을 보면 됩니다. 김제동 씨의 과거 강연료는 얼마였는지와 지금 논란이 된 강연료와 얼마만큼의 차이가 나는지, 그리고 그렇게 차이가 나는 시점이 언제였는지를 알면 대략적인 답이 나옵니다. 물론 연예인의 몸값은 인기에 따라 수시로 오르고 내립니다. 따라서 이 부분도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김제동 씨가 출연하는 프로그램 중에 논란이 된 프로그램은 있었으나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은 없는 것 같습니다. 즉, 새롭게 인기를 끌 만한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김제동 씨의 경우 불상의 이유로 과거보다는 최근에 금전적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렇다면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전에는 강연료가 얼마였는가?”라는 점입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 책정된 금액이 ‘회복’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김제동 씨 개인에 대해 다뤄져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지자체의 방만한 운영이라고 생각됩니다. 모르긴 해도 실무자가 “이번 강연에 김제동 씨를 섭외했습니다.”라고 보고했을 때, 지자체장이 “오, 김제동 씨가 온다고? 잘했어, 수고했어!”라고 말했을 겁니다. 지자체에서 연예인을 섭외할 때, 돈 문제는 두 번째 고려사항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나랏돈을 펑펑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보다 김제동 씨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이유는 유명인과 연관된 뉴스가 더 잘 팔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보수 세력이 김제동 씨 이슈를 부각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실 자신들도 그럴 자격이 없다는 잘 알면서도, “우리도 나쁘지만, 너희도 똑 같다.”라며 진흙탕 싸움을 시작한 셈입니다.

여기에 “너희는 더 했잖아? 너희들이 그런 지적을 할 자격이 있니? 우리는 너희만큼은 아니거든.”이라고 얘기하는 순간 진보 진영은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쌓아 올린 프레임에 역행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판사의 망치나 목수의 망치가 동등한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 운운한 김제동 씨의 발언이 지금 자신이 받은 1,550만원 강연료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보가 보수를 공격할 때 썼던 프레임 중 하나가 도덕성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면 공정하고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 얘기가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들을 옥죄는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탁현민 전 청와대 행정관이 자신의 강연료를 알아보고 있는 한 국회의원에게 “가능하면 사양하지만 학교는 100만원, 지자체나 단체는 300만원, 기업은 1,550만원 균일가를 받는다."고 얘기해서 또 한 번 구설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기사는 확대 생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과거 여성 비하 발언과 BTS의 프랑스 공연 섭외 이야기로 앞의 기사를 가리고 있습니다. 김제동 씨의 경우, 연예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비슷한 수준의 연예인이 행사에서 받는 액수를 고려하면 강연료 1,550만원이 과하긴 해도 터무니없는 금액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탁 씨가 기업에서 받는 강연료 1,550만원은 유시민 이사장이 과거 썰전에 출연해서 ‘1,000만원이 넘는 강연료는 뇌물’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얼마 전에 모 신문사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로 있는 후배와 저녁 모임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SBS 기자로 2017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캠프를 출입했던 모 기자가 청와대 행정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올해 초 증권사 임원으로 입사한 것을 두고 “해도 너무한다.”는 얘기를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증권사 임원 연봉이 3억에서 4억 정도 되니, 방송사 기자도, 청와대 행정관이라는 직함도 결국은 돈 벌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니냐는 한탄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해먹는 인간들은 항상 존재하는구나’라는 아쉬움을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권력의 주변에 있다가 사사로이 자리를 꿰차는 모습을 수십 년 동안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라서 새삼 놀라울 것은 없었으나, 이번에는 실망감이 큰 이유는 아마도 기대가 컸던 탓일 겁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정직해서 항상 그 값을 치르게 됩니다. 내 능력에 맞는 돈을 받는 건지 아니면 다른 후광으로 감당 못할 돈을 받는 건지는 본인이 더 잘 알 겁니다. 물론 지금은 그게 다 내 능력처럼 보일 테지만, 권력이 유행처럼 지나가도 자신의 강연료가 그대로 유지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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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의 ‘눈물’, 부러웠다

2019.06.21

1996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1916~1996)의 영결식이 유서 깊은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영결식을 지켜보던 독일의 헬무트 콜(Helmut Kohl, 1930~2017) 총리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결국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눈물을 ‘진주보다 아름다운 눈물’이라 칭송하면서도, 왜 그가 눈물을 흘렸을까 의아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필자는 헬무트 콜의 ‘눈물’이 진정 두 거인이 나눈 깊은 우정의 결정체라 생각하였습니다. 삼십오 년 전인 1984년의 역사적인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이자 격전지였던 프랑스령 베르됭(Verdun)에서 전쟁 발발 70주년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프랑스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독일군 전몰자묘역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움으로 다가왔는데, 거기에 더하여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총리는 전몰자기념비 앞에서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묵묵히 조의를 표하였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독일 총리 헬무트 콜이 보여준 아름다운 우정을 지켜본 전 세계 시민들은 그 아름답고 품위 있는 용기에 숙연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프랑스·독일, 독일·프랑스’ 국가 원수들이 전몰자묘역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모습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쌀쌀하였던 날씨도 잊게 하였다고 전해옵니다. (FAZ. 1984. 9. 22.). 그만큼 지켜보던 이의 마음도 온기로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1960년대 초,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었던 독일의 연방군(Bundeswehr)과, 프랑스의 군대는 조약에 따라,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상대국 영역에 진입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필자는 독일의 시민들이 높은 적대감을 가지고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프랑스는 그 어느 나라의 전쟁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승패가 오갔던 아픈 전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본보기가 187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Kaiser Friedrich Whilhelm I.) 황제대관식을 겸한 독일의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 총리가 이끈 ‘보불전쟁(普佛전쟁, Deutsch-Franzoesischer Krieg)의 승전 기념식을 독일에서 거행하지 않고 굳이 패전국 프랑스, 그것도 프랑스의 자존심인 베르사유궁(宮)에서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패전의 결과로 프랑스는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프랑스), Elsass-Lothringen(독일)]이라는 드넓은 국토를 승전국 독일에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독일이 승전 기념식을 자국의 심장에서 거행하는 오만함의 극치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심정은 ’먹물처럼‘ 새까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독일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국민은 서로 끝 모를 증오심만을 키웠던 것입니다. 1960년대 독일에서 지내던 필자도 양국 간의 깊은 증오심을 일상생활에서 수도 없이 실감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양국이 ’역사라는 공간’에서 30년이라는 절대 길지 않은 시간에 두 나라 정상들이 그것도 서로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장소인 전몰자묘역에서 화해의 ‘손에 손을 잡는’ 행동이 충격적일 만큼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역사적인 장면에 독일도, 프랑스도, 세계도 놀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는 헬무트 콜에 대한 저서 《헬무트 콜과 역사의 외투(Helmut Kohl und der Mantel der Geschichte)》 (Gernot Sittner, Sueddeutsche Zeitung Edition, 2016)를 읽고 나서, 그 우정의 뿌리가 헬무트 콜의 엄청나고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헬무트 콜은 그의 총리 임기 16년(1982.10.~1998.10.), 즉 192개월 동안 프랑스를 무려 79번이나 방문하였답니다. 좀 더 수치화하면 독일 총리는 그의 임기 중, 두 달 반마다 이웃 나라 프랑스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여기에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을 찾은 횟수를 고려한다면, 아마 두 나라 정상은 두 달이 머다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상상을 초월한 전무후무한 국가 정상 간의 ‘빈번한 교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헬무트 콜이 노트르담 성당의 영결식에서 ‘마음의 친구’를 영면의 길로 보내는 심정이 남달리 애절하여 눈물이 절로 흘렀을 것으로 짐작하였습니다.

요즘 들어 고인이 된 프랑수아 미테랑과 헬무트 콜, 두 정치 거목을 자주 떠올리는 것은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사이의 거리감이 너무 멀어져,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프랑스 간의 역사는 우리와 일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도 어떤 해법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필자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만남’에서 찾았으면 합니다.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이렇게 ‘황망’한 상태에 이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나 외교와는 거리가 멀어, 필자의 생각은 대중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풀뿌리 대중의 생각에도 일말의 의미가 있다면, 우리 대통령이 일본과의 접촉을 소홀히 하지 말았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 한반도를 멀리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기에 일본과 이웃해야 하는 지정학적 조건이라면 이제는 서로 함께 사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나 유럽 여러 곳에서나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담고 있는 공통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하되 잊지 않겠다(Forgive it, but never forget it.)'는 다짐입니다. 용서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서술적으로 남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 1854~1900)가 했던 “항상 당신의 적을 용서하라, 그것만큼 적을 괴롭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Always forgive your enemies, nothing annoys them so much)”는 글귀가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헬무트 콜의 진주와도 같은 눈물이 부럽게 다가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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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없는 짓

2019.06.20

산길을 걷다가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대부분 그냥 내버려 두고 지나갑니다. 저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가끔 산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기도 합니다. 쓰레기를 주울 때, 주운 것을 버릴 곳까지 들고 갈 때 영 겸연쩍습니다. 내가 수고하여 여러 사람을 기분 좋게 하니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주워도 될 것 같은데 괜히 열없이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쓰레기를 줍는 것에 어떤 심리가 들어 있어서 그런 걸까요? 왜 그렇게 느끼는지 심리가 궁금합니다.

길바닥을 봅니다. 길바닥마다 시커먼 껌이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심지어 방금 깐 보도블록에도 흉한 자국을 붙였습니다. 그 지저분한 모습을 바라보면 얼굴이 찌푸려집니다. 씹은 껌을 바닥에 뱉을 때 열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시내 길을 가다 보면 보행자용 교통신호등이 있을 곳이 아닌데 설치된 것이 자주 있습니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곳, 건널목 너비가 좁아 굳이 신호등이 필요 없는 곳에 신호등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대개 빨간 불이 들어와 있지만 다니는 차가 없으니 그냥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뒤통수는 간지럽습니다.

한적한 시골길에는 차가 별로 없는데도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저는 대개 그냥 지나갑니다. 이때도 뒤통수가 가렵습니다. 빨간 불일 때 건너면 안 된다고 배운 것이 머리에 박여서 그런지 지나가지만 머릿속이 영 불편합니다. 어느 방송에서, 멀찌감치 숨어서 운전자가 어떻게 하나를 지켜보고, 우직하게 차를 세우고 불이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신호등을 달아 놓고 신호를 지키는지 숨어서 지켜볼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건널목 신호등은 없애고, 한적한 길에는 깜빡이등을 설치하는 게 옳겠습니다. 사람들을 괜히 열없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열없다’는 “좀 겸연쩍고 부끄럽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나옵니다. ‘열적다’는 사투리이고요.

예전에 국회의원 총선거,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여야 국회의원은 특권을 없애겠다는 약속을 많이 내걸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의 ‘특권 내려놓기’ 법안은 결국 물거품이 됐습니다. 선거가 지나자마자 자기가 뱉은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죠. 아니 일부러 잊어버렸겠죠? 참 열없는 짓입니다. 그 열없는 짓을 넘어, 요즘 국회에서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세비는 꼬박꼬박 챙겨갑니다. 국회는 10월 국정감사, 이어서 예산 심의, 내년에는 총선이라 손 놓을 게 뻔합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20대 국회가 법안을 심의할 시간은 지금부터 9월까지뿐입니다. 내년에도 7천여 개 법안이 한꺼번에 폐기되겠지요. 법안을 심의하지도 않으면서 새 법안을 계속 제출합니다. 국민이 열을 받습니다.

열없어야 하는 것, 열없을 이유가 없는데 괜스레 열없게 느끼는 것, 잘못된 제도 때문에 애꿎게 열없게 되는 것, 열없어야 하는데 뻔뻔하게도 그러지 않는 것. 그중에서 열없는 짓인데도 열없는 줄 모르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열없는 짓이란 걸 알게 해 줄 수 있을까요. 더 열이 오르면... 다음은 폭발이겠지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고영회

진주고(1977),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1981), 변리사, 기술사(건축시공, 건축기계설비). (전)대한기술사회 회장, (전)대한변리사회 회장, (전)과실연 공동대표,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mymail@patinf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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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본 신록의 지리산

2019.06.19

5월에 지리산을 두 번 올랐습니다. 월초 첫 산행에서 본 청명한 신록(新綠) 천지, 짙은 구상나무 향(香), 그리고 파란 하늘의 매력에 빠져 두 주 후 다시 찾았습니다. 또 첫 산행을 서둘러 마무리해서 남은 아쉬움이 컸던 때문이지요. 야외 활동을 즐기나 높은 산을 오르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정도였기 때문에 이번 산행은 특별했습니다. 초봄에 항암 치료 중인 고향 친구를 포함해 몇 명이 어디 한적한 지리산 둘레길 마을을 찾아 조용히 음풍농월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유명한 산을 한 번도 못 가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단독 산행을 마음먹고 안내 책자, 인터넷 자료를 참고해서 대략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번 다 지리산 북쪽 함양군에 위치한 백무동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1차 때 경로는 백무동-장터목-천왕봉(1915m)-중산리, 2차에는 더 긴 코스인 백무동-세석대피소-천왕봉-유평리(대원사)였습니다. 대전에서 버스 편으로 함양을 거쳐 백무동으로 이동한 후 첫 산행 때는 백무동에서, 그리고 2차 때는 세석대피소에서 일박했습니다. 꽤 깊은 계곡을 끼고 있는 백무동에서 아침 일찍 민박집을 나서 장터목으로 향했습니다. 초반에는 계곡의 물소리로 길벗을 삼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돌길이 이어졌습니다. 백무동 계곡 일대를 연한 초록색이 뒤덮은 풍경은 압도적이었는데 연초록 잔치는 하산할 때까지 끊임이 없었습니다.

장터목 방향 길이 물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하며 더 급해졌지만 오르막이 급한 장터목 직전까지 편한 길도 더러 있었습니다. 고도 600m에 못 미치는 백무동에서 1720m에 있는 장터목을 가야 하니 경사진 길이 당연하지요. 하지만 2차 산행 때 장터목보다 고도가 낮은 세석평전(1540m)에 오르고 나서야 경사진 길이 좀 흩어져 있는 것이 끝부분에 집중된 것보다 더 수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산행 때 천왕봉 근처에서 신고 있던 막 신던 낡은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허둥지둥 중산리 길로 하산해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장비를 좀 더 제대로 갖추고 두 번째 산행에 나섰습니다. 버스가 일렬로 새끼들을 이끌고 길을 건너는 꿩 일행을 위해 속도를 늦추는 미소 짓게 하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백무동에서 세석평전 길은 거의 끝부분까지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는 한신계곡을 가운데 두고 이어졌습니다. 긴 세월 물의 힘으로 다듬어진 바위 계곡 안의 수많은 작은 폭포와 소(沼)들, 그리고 한 번씩 길이 계곡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파란 하늘, 신록, 능선, 계곡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보며 자연스레 감탄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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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계곡>                                 <정상서 본 북쪽 전경>                               <1차 등정 때 과로사한 등산화>

세석평전 전 1km쯤부터 길이 상당히 가팔라지며 체력이 방전되어 지리산의 거친 면을 경험했습니다. 초행이라 대피소에 일찍 도착하려는 생각에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던 탓에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계단 중간쯤에서는 머릿속이 텅 비는 무아지경으로 한참 서있다 다음 걸음을 어렵게 옮겼습니다. 산을 많이 다닌 이들은 웃을 일이겠지만 참 희한한 경험이었습니다.

넓고 완만한 세석평전에 위치한 세석대피소는 탁 트인 경관에 규모도 넉넉해 여유로웠습니다. 우선 생오이 하나로 기진한 몸을 추스르고 있으려니 등산객이 늘며 240명이 정원인 대피소를 쉽게 채울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중 눈길을 끄는 일행은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20명 가까운 장년 팀과 백 명이 넘는 중학교 학생과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오르는 길에 학생들을 지나쳤는데, 그때는 힘들다고 투덜대던 이 친구들이 대피소에 도착해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죠. 삼삼오오 뛰어다니고 대피소의 재래식 화장실을 신기해하며 휴지로 코를 막고 구경하고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의외로 어린 학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세석대피소를 나서 도착한 장터목에서도 뛰어다니며 노는 한 무리를 보았고, 첫 산행 하산 때 중산리 방면 가파른 계단 길에서도 정상을 향하는 두 개의 다른 학교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쉽지 않은 지리산을 어린 학생들의 극기 연마장으로 삼는 것은 천왕봉 정상비에 새겨진 ‘한국인의 기상(氣像) 여기서 발원하다’는 내용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첫 산행 때 정오쯤 천왕봉에 올랐는데 정상비 주변의 넓지 않은 터를 단체 등산객들이 차지하다시피해서 흔한 인증샷 하나 제대로 못 찍고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아직도 이른 시각이어서 사람들이 많지 않아 여유 있게 사방의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처음에 비해 시계가 좀 흐렸지만 옅은 초록색으로 뒤덮여 여러 갈레로 넓게 뻗어 내려간 산등성이들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산행 며칠 후 필자가 천왕봉에 서 있는 사진을 단톡방에서 본 한학자(漢學者) 지인이 조선 중기 학자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1585∼1664)가 지은 천왕봉 시를 알려주었습니다. “티끌 같은 세상 밖으로 벗어나 / 천왕봉 정상에 올라왔네 / 뭇 산은 나지막한 흙덩이로 보이고 / 사방의 강들은 아스라이 술잔 같구나 / (하략. 註 참조)”. 그런데 시구 중 “흙덩어리”를 보니 간송이 천왕봉을 왔다면 봄이 아니었고, “사방의 강들은”을 보니 곳곳에 계곡은 있으나 강은 보이지 않기에 간송이 천왕봉을 왔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함안에 살았던 병약했던 간송이 지리산의 천왕봉에 오른 것을 상상하며 호방한 감흥을 표현한 와유시(臥遊詩)라는 한학자의 설명에 의문이 풀렸습니다. 함안은 진주 동쪽에 위치해 있어 지리산이 좀 멀리 보이기 때문에 산 주변 산천의 모습을 잘 몰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호른 연주가 특히 인상적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곡 4번 알프스’, 매우 극적인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에서 하룻밤’과 같이 산과 연관된 규모가 큰 곡들이 있음에도 신록의 지리산은 저에게 바이올린 음악을 연상시켰습니다. 두 번째 지리산을 향하는 버스에서 올해 초 서울에서 실황 공연을 보았던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연주하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곡 파르티타 2번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10대 초 고전음악에 끌리기 시작하며 바이올린 곡들을 무척 좋아했지만 청년기 이후 첼로 음악에 더 심취해 있어서 바이올린 음악을 찾아 듣기는 오랜만이었습니다. 5월의 연초록 지리산은 때론 날카롭게 아름답거나 슬프지만, 여리고 섬세함이 이어지는 바이올린 음악의 감흥을 깨운 모양입니다. 처음 접하는 웅장한 산이 여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벌써 가을, 겨울의 지리산, 못 가 본 전라북도 쪽 지리산도 보고 싶어집니다.

5월 산행 때 조우했던 학생들 일행의 후미에서는 어김없이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하는 일행과 인솔 교사도 보았습니다. 그들이 중간에 돌아섰던 일에 오래 마음 상해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약 50년쯤 전 중학생이었던 필자가 학교 연례행사로 한라산에 올랐다가 이튿날 비 오는 하산 길에 잠시 딴전 피우다 일행에 뒤처져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산은 항상 그곳에 변함없이 있을 것이기에 언젠가 다시 찾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고, 선조들이 꿈꾸던 기상을 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註,
천왕봉에 오른 것처럼 짓다〔擬登天王峯〕 (의등천왕봉)

티끌 같은 세상 밖으로 벗어나 / 脫出塵埃外 (탈출진애외)
천왕봉 정상에 올라왔네 / 天王頂上來 (천왕정상래)
뭇 산들은 나지막한 흙덩이처럼 보이고 / 千山低視塊 (천산저시괴)
사방의 강들은 아스라이 술잔처럼 보이네 / 四瀆眇看杯 (사독묘간배)
비로소 몸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음을 깨닫고 / 始覺身居最 (시각신거최)
바야흐로 시야를 넓게 하였네 / 方令眼界恢 (방령안계회)
만약 바람을 탈 수 있다면 / 泠風如可馭 (냉풍여가어)
곧장 봉래산에 이르고 싶네 / 直欲到蓬萊 (직욕도봉래)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의 간송집(澗松集)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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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방학 나무하러 다니던 날들.

2019.06.17

요즘에는 동네를 벗어난 산은 숲이 우거져서 길이 아닌 곳은 오르기가 힘이 듭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동네에서 십여 리 안쪽은 벌거숭이 민둥산이었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솔잎까지 땔감으로 쓰려고 갈퀴로 싹싹 긁어가는 통에 붉은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산소의 북데기까지 갈퀴로 긁어다 뗄 정도니까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에 땔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것이 중요한 연중행사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어머님이 저녁 밥상 앞에서 내일부터 ‘여티’에 불탄 나무(불에 그을린 나무)를 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시며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동네에서 20여 리 떨어진 깊은 산속인 ‘여티’에 지난겨울 산불이 났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20여 리나 되는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 마뜩잖았지만, 산불이 난 곳이 정확히 어딘지 궁금하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한 동네 사는 고모님하고 어머니 연배가 비슷해서 항상 두 분이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저는 학교에 갔다 와서 리어카를 끌고 나무 마중을 하는 담당이었습니다. 고모님 댁에도 나무 마중을 하러 갈 정도의 나이가 되는 고종사촌이 있었고, 저의 집에도 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마중은 늘 제 몫이었습니다. 그 점이 억울해서 나무 마중을 갔을 때마다 내일부터는 절대 안 오겠다고 불만은 터트리곤 했지만, 다음날 결국 빈 리어카를 끌고 나섰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풋고추에 된장이며 깍두기 반찬을 싼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산불이 났던 곳까지 가려면 십여 리는 리어카를 끌고 가고, 남은 십여 리는 좁은 산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지게를 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달랑 낫 한 자루만 들고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산딸기도 따 먹고, 입안을 가득 메우는 신맛에 지레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머루도 따 먹기도 하고, 설익은 달래도 한 입 배어 물기도 하면서 불이 난 곳까지 설렁설렁 걸어갔습니다.
불이 난 지역에는 불에 그을린 나무들이 검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이라 꽤 울창해 보였던 숲의 시커먼 땅에는 고사리가 드문드문 서 있었습니다. 어린나무들은 가지가 모두 타 버리고 등걸만 서 있었습니다.

어머님과 고모님은 아까운 나무들이 타 버렸다는 탄식을 터트리면서도 부지런히 낫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산에서 나무를 할 때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 오후 서너 시가 될 때쯤에서야 두 단 정도를 할 수 있습니다. 불과 한 시간 만에 끝난 나뭇단에는 갈대며 떡갈나무며 잡목들이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전문 나무꾼들이 먼 산에서 해 온 나뭇단처럼 불감이 좋은 삭정이뿐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칡덩굴로 묶은 나뭇단을 어깨에 지고 십 리를 걸어가야 하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길이 될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무를 하면서 얼굴이며 손은 숯댕이가되어 버렸습니다. 칡넝쿨로 단단하게 묶어 놓은 나뭇단을 바라봤습니다. 풋나무가 섞이지 않은 실한 나뭇단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만 했습니다.

어머님과 고모님은 나뭇단을 두 단씩 했습니다. 두 단을 한꺼번에 머리에 일 수가 없으니까 한 단씩 이고 가서 오리쯤 거리에 내려놓고, 다시 나뭇단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셔서 남은 나뭇단을 머리가 이고 가셔야 했습니다. 리어카가 있는 곳까지 나뭇단을 모두 들고 가려면 왕복 삼십 리나 되는 길입니다. 어른 품으로 한 아름이나 되는 무거운 나뭇단을 이고 나르셔야 하는 힘든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첫 번째 산모퉁이를 돌 때까지는 칡넝쿨이 어깨로 파고드는 고통을 견딜 만했습니다. 두 번째 모퉁이를 돌 때쯤에는 옷은 모두 땀에 젖어 버렸고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뭇단은 출발할 때와 다르게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고, 어깨를 휘어 감은 칡넝쿨이 살을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저녁에 나무 마중이나 왔어야 했는데, 괜히 촐랑거리며 따라왔다는 후회가 밀려올수록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시원한 산바람이 슬쩍슬쩍 얼굴을 스쳐 갈 때마다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여기서 쉬면 더 이상 못 들고 갈껴. 쪼끔만 참고 가자."
제가 좀 쉬려고 산기슭 쪽으로 몸을 돌릴 때마다 뒤에서 따라오시던 어머님이 만류를 하셨습니다.

쉬고 싶은 걸 참고 한참 걷다 뒤로 돌아서 어머님을 바라보면 어머님은 저보다 더 큰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오시면서도 웃고 계셨습니다. 어머님의 머리에 있는 나뭇단을 바라보면 쉴 수가 없어서 천근만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운 걸음을 다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일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여길 오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결심하면서 고개를 들어 보면 갈 길이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습니다. 그 시절 연탄 한 장에 30원씩 했습니다. 아버님이 피우시는 새마을담배 한 값이 30원, 면사무소에서 퇴근해 오실 때마다 물씬 풍기는 막걸리 한 되에 40원이었습니다.
나무 한 단이면 사나흘 정도 땔 수 있습니다. 연탄 가격으로 나무 한 단 가격을 환산해 보니까 120원 정도였습니다. 남의 집 콩밭을 매줘도 1,500원을 받을 텐데 240원을 벌기 위해 이 고생을 왜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가 했더니, 제가 등에 지고 있는 나뭇단 가격은 100원도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중학교 2학년 15살 어린 나이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과연 친구들 중에 돈 백 원을 준다고 나무 한 단을 들고 십리 길을 갈 친구가 있을까? 어머님하고 고모님은 왜 좀 편한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연탄을 때지, 왜 이 고생을 하실까? 나는 이다음에 커서 연탄만 때며 살겠다는 등 오만가지 불만을 삼키며 걷는 사이에 저 멀리 리어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요? 나뭇단을 부리자마자 벌렁 누웠습니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습니다. 산바람은 또 왜 그렇게 차가운지 더위가 싹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어이구, 우리 아들 다 컸네!”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에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증발해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은 나뭇단을 등에 지고 내려올 때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을 정도의 후회와, 집에 도착해서 나뭇단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뿌듯한 긍지와 보람이 중첩되는 날들로 보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때는 모내기를 끝낸 농촌은 한가한 때라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님은 집에서 노는 것보다 겨울 땔나무라도 하시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그 힘든 길을 다니셨던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집안 살림은 온전히 어머니들의 몫이라서 그 힘든 길을 당연히 받아들이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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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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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의 능선 전투’와 억장 무너진 현충일

2019.06.14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투가 멈춘 지 66년입니다. 오늘까지도 우리는 정전, 휴전, 종전의 개념조차도 정리를 못한 채, 안보 갈등과 대립 충돌 분열을 계속합니다. 저는 지난 40여 년 간을, 군 복무 중 전사(戰史)를 정리하면서 본 많은 자료들 때문에 드러내놓지 못하고 속앓이를 합니다.

그중 이승만 대통령이 ‘제1차 육해공군 전몰장병 합동 위령제’에 참석, 유가족을 위로하는 흑백사진을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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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 우리나라 현충일의 모태가 된 ‘제1차 육·해·공군 전몰장병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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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상주가 되어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1952년 전선이 고착되어, 지루하게 소모전이 진행될 때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슴에 상장(喪章)을 달았습니다. 대통령이 유가족과 함께 상주(喪主)가 되었습니다. 굴건제복을 안 했고, 대나무 막대기를 짚지 않았을 뿐입니다. 소복을 입은 여성이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앙다문 채 먼 곳을 응시하고, 한 여성은 슬픔을 참느라 고개를 숙이고, 다른 여성은 착잡한 표정으로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어린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남편을 나라에 바친 청상(靑孀)이거나, 아들을 잃은 어머니일 겁니다. 이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아주 젊었더라도 지금은 90전후, 품에 안긴 아이는 전쟁 중에 살아남았다면 70을 넘겼을 겁니다. 국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상주로서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유가족을 위무하는 모습에 분위기가 숙연합니다. 대통령이 (상주의 죄지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장병들의 충성을 앞장서서 기리고 있습니다.

또 한 장은 위령제보다 한 해 전인 1951년 8월 강원도 양구군 북방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 때 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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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8월 한여름의 피의능선. 모든 가지가 포화에 찢기고, 부러져 겨울처럼 앙상하다. 전쟁 후 높이까지 낮아졌다고 한다. 

종군기자도 아니면서 군대를 따라 진격・후퇴를 함께한 신의균 씨가 찍었습니다. 여기에 피의 능선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당시 보병 제5 사단 제36 연대장 황엽 대령(후에 보병 제5 사단장을 역임, 소장 예편)의 얼굴도 겹쳐 떠오릅니다.

피의 능선 전투는 아군-미군 제 2사단에 배속된 한국군 보병 제5 사단 36연대-이 싸워 이겼습니다. 승전에도 불구하고 엄청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군 신문 성조지는 이를 ‘피의 능선 전투’라 보도했습니다. 두 차례의 전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치열했습니다. 아군은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 북방과 도솔산을 연결하는 선(당시는 칸사스 선이라 칭했음)에서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이보다 북쪽에서 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 ‘피의 능선’입니다. 적군은 이 지역을 아군에게 빼앗기면 북쪽으로 멀리 밀려나야 하므로 방어에 사력을 다했습니다.

보병 제36 연대가 미 제2 사단에 배속됐습니다. 적으로부터 피의 능선을 탈취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미 육·해·공군의 막강한 화력을 지원받았습니다. 어마어마한 화력 집중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땅속 진지는 끄덕도 안 했습니다. 육탄 공격 이외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국군이 북한군의 총격에, 총검에 죽어갔습니다. 고지를 뺐고 빼앗기고, 적을 죽이고, 아군도 죽었습니다. 6일 간의 전투 끝에 피의 능선을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적의 역습으로 곧바로 밀려났지요. 닷새 뒤 아군이 재공격에 나서 나흘 만에 재탈환했습니다. 그 이후 아군이 계속 점령, 오늘에 이릅니다. 이 전투에서 36연대에서만도 158명이 사망했고, 224명이 실종 되었으며, 1,071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연대가 괴멸 수준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얼마 뒤 피의 능선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사령관 김웅과 군단장 방호산을 숙청했습니다. 그만큼 피의 능선 손실이 북한군에게는 아팠습니다.

1977년 가을부터 피의 능선 전투를 지휘했던 연대장 황엽 씨를 종로 5가 전매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중국집에서 잡탕밥을 시켜 먹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피의 능선에서 꼬박 삼일을 굶으며 싸웠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퍼붓는 포화 때문에 식사를 능선까지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처절했던 피의능선 전투입니다.(보병 제5 사단 부대역사에 실렸음)
피의 능선은 적이 2개월에 걸쳐 요새화한 다음, 상자로 된 대인지뢰(註 흔히 목함 지뢰라고 부름)를 2,000발 이상 매설하고 북괴 제2, 제5 군단의 포병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때 연대는 미 전차 대대를 배속받았으며(중략)… 미 포병부대의 치열한 사격에도 적의 거점이 파괴되지 않아서 병사들의 육탄공격에 의존하여야 했다. 이 전투에서 1,000명 넘게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수목이 거의 없어질 정도로 가한 아군의 치열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폭발하지 않은 적의 지뢰와 근접전으로 인한 손실이었다. 골짜기는 피바다를 이룰 정도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생략)

피의 능선 전투 전적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강원도 양구군의 분지가 펀치볼(전적비에는 판치볼로 되어 있음)을 닮았다고 하여 펀치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까지 가는 길은 험했습니다. 전투 전적비를 찾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겨울 난방도 없던 시외버스를 타고 가며 강아지 떨 듯 덜덜 떨었습니다. 펀치볼 전투 전적비 비문의 일부입니다.
인류의 평화와 자유의 반역자 북한 괴뢰 제2 군단이 평화롭던 이 강산을 피로써 물들이게 되고 조국의 가쁜 숨이 경각을 다툴 때에 임들의 몸이 방패가 되어 우리 민족을 살렸고 임들이 흘리신 피는 이 나라를 건졌도다.
여기 임들의 빛나는 충성과 영웅 무쌍한 무훈을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이 돌을 세우나니 비록 이 비석은 모래알이 될지라도 임들의 그 위대한 공훈은 해와 달로 더불어 길이 빛나리라.

지난 현충일 서울 현충원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습니다. 피의능선에서 죽어간 이들의 형제자매, 후손들과 제1차 육해공군 전몰장병합동 위령제 사진 속의 어린 아이가 노인이 되어 참석하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이날 6・25 때 북한에서 공을 세워 북한 최고 훈장을 받은 이가 광복군이었고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6・25 전쟁 때 북한을 위해 공을 세워 김일성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의 훈장에는 북한군이 죽인 국군과 우리 부모형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피가 묻어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 영토를 유린한, 용서 못 할 짓도 그의 공적(功績)이 되었습니다. 6・25 때 북한군에게 부모를 잃은 고아와 자식을 나라에 바친 부모와 남은 형제들의 피멍 든 가슴에서부터 원망과 분노와 한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겁니다. 재향군인회도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북한군이 핵무기로 무장한 채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6·25 이후 닥친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순간입니다. 전몰장병합동위령제 사진 속 “피 흘리신 호국의 영령 앞에 다시 한 번 맹서하자”는 구호가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보여 줍니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대한민국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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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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