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티’ 메르켈의 은퇴[방석순]

 

‘무티’ 메르켈의 은퇴

2021.10.13

 

‘무티(Mutti, 엄마)’ 메르켈이 16년의 긴 총리직 수행을 마치고 평민으로 돌아갑니다. 2005년 총리에 올랐던 그녀는 독일 역사상 세 번째 장수 총리였습니다. 19세기 독일제국을 유럽 강국으로 이끈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 재임 1871~1890), 2차대전 후 동서로 분단된 독일의 통일 위업을 이룬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2017; 재임 1982~1998)만이 그녀보다 긴 장수 총리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앙겔라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 67). 1954년 통독 이전의 서독 지역 함부르크에서 출생. 태어난 해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 브란덴부르크의 템플린으로 이주.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물리학 전공. 물리학 박사로 12년 동안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 근무. 정치인 이전 그녀의 이색적인 경력입니다. 동독 출신(성장) 첫 여성 총리를 세운 독일 국민의 안목과 선택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메르켈의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EU(유럽연합)의 선도 국가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메르켈은 지난달 말 총선에 출마하지 않은 채 이삿짐을 쌌습니다. 총리직은 물론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던 자신의 오래전 공언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먹게 되면 물리게 마련, 정치 역시 국민의 입맛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달 독일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가 속한 기독교민주·기독교사회 연합(기민·기사련)은 24.1%의 득표를 기록, 25.9%의 사회민주당(사민당)에 근소한 차로 밀려 제1당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녹색당이 14.8%로 3위, 자유민주당(자민당)이 11.5%로 4위. 현재로서는 사민당 대표 올라프 숄츠가 녹색당과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 메르켈의 뒤를 이을 전망입니다.

 

메르켈의 은퇴는 독일은 물론 EU에도 한 시대의 마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27개 회원국의 숱한 이견과 잡음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탁월한 리더십과 뚝심으로 유럽의 통일 화폐 유로를 지켰고, 유럽의 통일 사회 EU를 지켜냈습니다. 때로는 강철 같은 단호함을, 때로는 솜 같은 유연함을 발휘하며. 2008년 남부 유럽의 채무국들에게 강경한 자세로 긴축 정책을 요구했고, 동시에 적절한 재정 지원을 펴 경제위기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통합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재임 1969~1974)와 헬무트 콜이 기초를 닦고 메르켈이 완성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메르켈의 모든 정책이 다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메르켈은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난민 문제 해결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2015년 난민 수용에 앞장서서 독일의 빗장을 풀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국 내 반대파와 난민을 기피하던 이웃 EU 회원국들의 비난을 자초했습니다. 그녀의 정치무대 은퇴에는 난민 수용 결정으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자극, 극우세력을 키워냄으로써 화를 자초한 것이라는 분석도 따릅니다. 징병제 폐지, 동성 결혼 인정, 원자력 발전소 폐쇄 등도 지지와 반대가 엇갈리는 정책들입니다.

 

 

특이하게도 메르켈은 이미 취해진 결정의 단호함에 비해 논란이 큰 국내 여러 문제에서 가능한 한 충돌을 피해 먼저 폭넓은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섣부른 결정은 뒤로 미루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정치가 양극단으로 흘러갈 때도 가급적 말을 아꼈습니다. 그리고 문제에서 '정치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상황을 진정시키려 애썼습니다. 그 편이 도리어 국민을 안심시키고 신뢰감을 얻는 방법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을 중시하는 물리학자다운 과학적 정치 접근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럽의 한 비평가는 메르켈을 꾸밈없는 겸손함과 실용주의의 복합체라고 표현했습니다. 적절한 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 기간 정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메르켈의 정치무대 은퇴는 마치 어느 친목회 회장 임기를 마치는 듯 조용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의 뒤를 가리기 위해 후계자를 낙점했다거나 어느 마을에 자신을 길이 기념할 새집을 짓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세계 각국 정·재계 거물들의 재산 은닉, 탈세, 돈세탁을 고발해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키고 있는 ‘판도라 페이퍼’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도 없어 보입니다. 부패와 권력 행사로 유죄 판결을 받은 니콜라 사르코지(프랑스), 탈세 의혹을 받고 있는 토니 블레어, 금융 로비 의혹에 휩싸인 데이비드 캐머런(이상 영국) 등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지도자상입니다.

 

총리 시절에도 그러했듯이 메르켈은 이제 주말마다 손수레를 끌고 사람들 틈에 끼어 여느 아낙처럼 장 보러 다닐 것입니다. 그게 메르켈의 타고난 소박함인지, 독일 국민의 원래 건전한 성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붙어 다닌 ‘무티’의 본성이, 그렇게 불러준 독일 국민의 품성이 다 그러한 것이겠지요.

 


 

거짓과 말장난, 허세와 기만으로 얼룩진 사회, 우리도 ‘무티’와 같은 진솔한 리더를 가져보고 싶습니다. 아니 눈을 부릅뜨고 그런 리더를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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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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