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내린 닻, 참닻꽃.[박대문]

 

 

허공에 내린 닻, 참닻꽃.

2021.09.24

 

참닻꽃 (용담과) Halenia coreana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이요 변화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생(生)은 그 자체가 변화에의 적응입니다. 만남과 헤어짐도 오는 봄, 가는 봄도 시간의 흐름이며 상황의 변화입니다. 따가운 한더위가 어느 세월에 가려나 싶었는데 어느 사이 소슬바람 새어들고 요란한 매미 소리 대신에 청량한 귀뚜리 소리가 들려옵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알게 모르게 세월이 흘러 계절이 변한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이 산과 들의 풀과 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없이 한 자리에 묵묵히 자리 잡고 살아가는 식물이기에 아무런 감(感)이 없는 개체로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 생각입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감각이 없는 중환자를 식물인간이라 부르지만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봅니다, 계절과 시간, 온도의 변화에 대한 인지능력은 식물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봄이면 싹 틔워 꽃 피우고 가을이면 열매 맺어 씨앗을 남긴 후 겨울이 되면 떠날 줄 압니다. 철부지(不知) 인간은 멋모르고 살아갈 수 있지만, 철부지 식물은 바로 죽음입니다. 싹 틔울 시기, 꽃 피울 시기를 놓치지 아니하고, 꽃 피우는 시각마저도 꽃에 따라 아침, 낮, 저녁을 가려 맞추는 것이 식물입니다.

 

하늘이 높아져 맑고 푸르니 가을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요즈음은 다양한 원예종이 보급되어 철 구분 없이 피는 꽃도 많지만, 산과 들에 자생하는 산들꽃은 각각 시기를 맞추어 제때 꽃을 피웁니다. 여름철 한더위에는 꽃 피우기를 주춤하던 산들꽃이 가을이 되니 세월의 변화를 어찌 아는지 하나둘 꽃을 피웁니다.

 

 

한여름에 보기 힘들었던 산들꽃이 가을이 되어 풍성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면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도 듭니다. 꽃이 필 즈음에는 이파리와 줄기가 무성하지만, 곧 이어 가을 지나면 시들어 떠나야 하는 생(生)이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 탓일까요? 해가 갈수록 한여름에 불같은 열정으로 자라서 꽃 피워 열매만 남기고 떠나는 가을꽃의 무성한 이파리와 줄기를 보면 왠지 서글픔이 더해 갑니다. 특히 한해살이풀꽃을 보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청명한 초가을, 참닻꽃을 찾아 화악산을 올랐습니다. 꽃 모양이 매우 특이하고 오묘한 생김새가 신비스러운 모습의 꽃입니다. 꽃 아래에 갈고리 모양을 닮은 네 개의 꽃받침이,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배를 갯바닥에 동여매는 닻을 닮았다고 해서 닻꽃이라는 이름을 얻은 꽃입니다.

 

가녀린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날카로운 네 갈고리의 꽃 모습이 마치 허공에 내린 닻처럼 보입니다. 가는 세월을 매어두려고 내린 닻! 차가운 이른 봄부터 뿌리 내려 자리 잡고 함께 부대껴온 땅덩이며 함께 자란 이웃 풀꽃과 나무들을 차마 떠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주저앉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단단히 동여매 두려는 심사인가? 닻을 내려, 가는 세월을 꽁꽁 매어 두려는 듯 산 능선 곳곳에 닻꽃을 주렁주렁 매달았습니다. 태산처럼 밀려오는 풍랑에도 끄떡없이 배를 매어 두는 항구의 닻처럼 붙잡아 두고 싶은 인연, 함께 했던 지난날의 숱한 사연들이 세월 따라 흘러갈까 염려되어 곳곳에 닻을 내렸나 봅니다.

 

 

정녕 흐르는 세월이 아쉽고 애달파 매어 두려는 것인가? 서로 간에 정든 사이의 작별은 자연이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을 터이니, 어찌 말 없는 식물인들 함께 지냈던 숱한 인연을 지워버린 채 홀로 훌쩍 떠나고 싶겠는가? 소슬바람 불 적마다 가녀린 줄기에서 한들거리는 꽃송이가 땅에 박히지 못하고 풍랑에 밀리는 닻처럼 허공에서 휘둘리고 있으니 무슨 수로 세월을 매어 두랴? 네 갈고리 날 세운 닻꽃 앞에서 흐르는 세월 붙잡고 오늘의 하산길도, 흘러가는 시간도 잠시 잊어버린 채 하늘 보고, 꽃 보며 머물고 싶은 것이 나 혼자만의 마음일런가? 어찌 말 없는 들꽃인들 함께 보낸 인연들을 훌쩍 지우고 떠나고 싶겠는가? 세월 붙잡아 머물고 싶은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한마음이리라.

 

허공에 내린 닻, 참닻꽃

 

닻꽃은 정부가 정한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의 북방계 식물로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멸종위기식물 목록에 등재된 국제적 희귀식물입니다. 줄기는 곧추서고 4개의 능선이 있으며, 꽃은 줄기 끝과 잎겨드랑이에 취산꽃차례로 달립니다. 처음에는 꽃이 연한 황록색으로 피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붉은 빛이 돕니다.

 

 

현재 알려진 국내의 자생지는 1,400m 이상의 고산지대인 화악산, 대암산, 방태산과 설악산뿐입니다. 생육 조건이 까다로워 다른 풀들이 무성하지 않고 볕이 잘 드는 척박한 곳에 자생합니다. 척박하지 않은 곳에서는 주변에 키가 크거나, 생육이 왕성한 식물에 밀려나므로, 적절한 인위적 간섭이 있는 길가나 군부대 참호 통로, 공사 현장 등이 아니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꽃입니다.

 

닻꽃은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등에도 분포하고 있습니다. 국내 자생 참닻꽃도 중국, 일본 등의 닻꽃과 같은 종으로 여겨 2012년부터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으로 관리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2020년 유전자(DNA) 분석 결과, 국내 자생 닻꽃이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신종으로 밝혀져 종명(種名)이 기존 ‘닻꽃(Halenia corniculata)’에서 '참닻꽃(Halenia coreana)'으로 변경됐습니다. 참닻꽃은 닻꽃과 달리 꽃뿔이라고도 하는 거(距)가 더욱더 길고 좁으며 안으로 굽는다고 합니다. 이제 참닻꽃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소중한 우리 꽃이 되었습니다.

 

허공에 내린 닻

 

세월을 묶자.

바람결에 휘둘리지 말자.

주렁주렁 매단 참닻꽃 송이송이.

 

뿌리 내린 정든 땅,

먹 밤, 장대비 함께해 온 주변 초목들,

쌓은 인연 떨구고 떠날 수 있나?

네 갈고리 날 세워 허공에 박는다.

 

소슬바람에 흰 구름 날고

단풍 물결 휩쓸면

한 톨 먼지로 떠나야 하는

한해살이풀의 애잔함이여.

 

초목 또한 생(生)일진대

세월 붙잡고픈 갈망이야 어찌 없으리.

허나, 허공에 내린 닻이 바람을 견디랴.

하릴없이 휘둘리는 몸부림이 애처롭기만 하다.

 

(2021. 9월 참닻꽃 앞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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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가 있다.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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