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원리주의의 극성[허찬국]

 

 

 

종교적 원리주의의 극성

2021.09.07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 그리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일반적입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정교분리의 대척점, 즉 정교일치(政敎一致)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려는 탈레반이 나라를 장악하며 카불 공항에서는 대규모 탈출극이 벌어졌습니다. 더 많은 피란민들이 인접국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도피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이슬람을 국교로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탈레반은 이전 통치기간(1996년-2001년)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며 성직자가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이란과 유사한 신정통치를 시도하였습니다. 종교경찰이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잘 지켜지는지를 감시·단속했고, 다른 이슬람 종파나 이교도들은 특별한 노란색 표식을 의복과 집에 부착하도록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유태인들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각종 범법에 대한 벌로 신체 절단, 공개 처형과 같은 처벌이 자행되었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동행 없이는 외출이 안 됐고 취업 및 각종 사회 활동이 제약됐으며 교육 기회가 박탈되었습니다.

 

 

이슬람이 탄생한 7세기 사회상을 이상향으로 여긴 탈레반이 보기엔 나라가 이슬람 천당에 접근했을지 모르나 상당히 궁색한 천당입니다. 농경 사회이나 경작할 땅이 많지 않고 쉽게 개발할 자원이 없는 나라는 소득 수준 기준으로 최빈국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웃 이란이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정점에 둔 신정체제를 시작한 1970년대 초부터 양귀비 재배를 엄격히 금지하자 아프가니스탄은 이를 기회로 삼아 아편 생산을 늘리며 최대 수출국이라는 지위를 지켜갔습니다.

 

그런데 원리주의 행태는 이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원리주의의 천적이라 할 자유주의(liberalism)가 세계관이나 정치구조에 뿌리 내리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징후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liberalism’은 ‘진보’라는 현대적 의미와 달리 종교적 독선과 집단적 편견을 배척하고,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며 개인의 선택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18~19세기에 유럽에서 태동한 가치체계를 뜻합니다.

 

필자는 8월 9일 본 칼럼(미국을 위협하는 ‘빨강 코로나’)에서 미국의 최근 델타 변이 위기의 중심에 백신 접종이나 마스크 착용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이를 선동하는 공화당 정치인들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보수적 기독교 원리주의자(Christian fundamentalist)들이 많습니다. 다음 언론 인터뷰 발언이 그런 입장을 잘 보여줍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사탄이 이를 가리려는 것이다. 마스크는 핍박의 상징이다.’(주1 참조)

 

 

지난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영국과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 팀 간 월드컵 예선 경기가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영국 선수들이 앉은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의미의 ‘무릎꿇기(Kneeling)’를 하자 축구장을 메운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습니다. 경기 시작 후 영국의 흑인 선수가 첫 골을 넣자 종이컵을 운동장 안으로 던지며 인종적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영국이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축구연맹(FIFA)도 재재조치를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헝가리의 트럼프’라고도 불리는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자국을 ‘기독교를 믿는 백인’의 나라로 규정하며 극우파적인 행보를 보여 왔지요. 유럽연합(EU)에서도 미운털이 박혔지만 2010년 이후 계속 집권했습니다. 지난주 축구장 관중은 그곳의 기세등등한 퇴보적 경향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기독교’와 ‘백인’을 핵심으로 하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횡횡하고 있습니다. 백인이 타 인종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ism)도 기독교 원리주의와 관련이 큽니다. 인종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유태인들에게 ‘예수를 죽인 자들’이라 외치며 박해했습니다. 트럼프와 추종자들은 백인 정체성 정치에 크게 의존했고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을 주요 지지층으로 삼았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여성의 임신중절을 선택할 권리를 위협하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973년 연방대법원이 내린 Roe vs. Wade 사건의 판결에 의해 임신 12주 내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헌법이 보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다수인 반대 진영은 이를 뒤집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습니다. 지난주 연방대법원은 여성들의 임신중절 결정권을 크게 제한하는 텍사스주(州) 법의 효력 정지 요청을 기각하며 상당히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공화당이 장악한 텍사스가 제정한 법은 임신 6주 이후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강간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예외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텍사스 법이 위헌 소지가 있으나 기술적인 이유로 시행을 막을 수 없다고 5대 4로 결정했습니다. 6주가 지나도 임신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니 사실상의 낙태금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간 여론 조사를 보면 Roe vs. Wade 판결을 뒤집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 꾸준히 60% 가까이 유지된 반면 찬성은 30%대 초반에 그칩니다. 정치적인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공화당 정치인들의 자축은 단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원리주의적 충동은 살아있습니다. 단지 그 영향이 아프가니스탄과 비교해 제한적일 뿐입니다. 요즘 새삼스럽게 정교분리 원칙과 민주적 선거라는 안전장치가 돋보입니다.

 

주:(https://www.nbcnews.com/think/opinion/covid-mask-vaccination-mandates-aren-t-christian-persecution-ncna1278067)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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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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