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조선의 셰익스피어 사용법 [ 추천시글]

 

식민 조선의 셰익스피어 사용법

2021.07.27

 

지난 7월 18일부터 24일까지 제11차 세계 셰익스피어 학회(World Shakespeare Congress)가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물론 팬데믹 상황이라서 모든 발표와 토론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필자는 그중 '셰익스피어 아시아에 오다'(Shakespeare Cometh Asia)라는 세미나에서 발표와 토론을 하였습니다. 이 세미나에는 주로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의 학자들이 참가하여 자국의 초기 셰익스피어 수용사를 소개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쇄국정책으로 서양 문물의 소개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늦은 편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도 중국에서는 이미 1839년에, 일본에서는 1841년에 그 이름이 등장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에서야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이는 『조양보』(朝陽報)에 실린 새뮈얼 스마일스(Samuel Smiles, 1812~1904, 영국)의 『자조론』(Self-Help) 번역을 통해서였습니다.

 

 

3·1 독립 운동 이후 일본 식민 정부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자, 문예 전문지와 일간지가 대거 창간되어 국민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이때 계몽주의자들은 유명 문학 작품 등에서 인용한 격언 형태로 근대 사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려 하였습니다. “용기업난 놈은 목숨이 끈허지기 전에 수업시 죽음닌다.”(『소년』 제4호(1909), 『줄리어스 시저』 2막 2장),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약간 사람만 밋고, 아모에게던지 못된 일을 하지 마시오.”(『소년』 제19호(1910), 『끝이 좋으면 다 좋아』 1막 1장)와 같은 셰익스피어 대사들도 같은 목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런 짧은 경구 형식이 아닌 셰익스피어 극의 일부분이 처음 번역 소개된 것은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의 「브루투스의 웅변」입니다(『학지광』 3호(1914)). 셰익스피어의 로마 사극 『줄리어스 시저』에서 브루투스가 시민들에게 시저 암살의 이유를 밝히는 3막 2장의 연설 장면입니다. 정노식은 원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던 브루투스의 대사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로마 시민들의 대사를 생략하고 하나의 연설문으로 만들어 번역 소개하였습니다. 짧은 서문에서 정노식은 세계사의 유명한 웅변을 소개하여 웅변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참고로 삼게 하고자 번역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3·1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 운동 투사였던 정노식의 행보로 볼 때 사실은 그가 그 대사에 담긴 “독재에 대한 항거”, “시민의 자유”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음은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돌아온 1920년대에는 셰익스피어 번역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모두 일본어 번역본을 번역한 이중역이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희곡 형태의 셰익스피어 원작번역이 아니라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과 메리 램(Mary Ann Lamb, 1764~1847, 영국) 남매가 아동용 이야기책으로 각색한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를 옮긴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에서 연극을 공부한 현철(玄哲, 1891~1965)이 1921년 5월부터 국내 최초의 희곡 형식 완역본을 『개벽』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올해는 진정한 의미의 셰익스피어 번역이 국내에서 시작된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물론 현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번역도 일본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이자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가로 유명한 쓰보우시 쇼요(坪内逍遥, 1859~1935)의 『하물레토』를 번역한 것입니다.

 

현철은 쓰보우시가 일본에서 그랬듯이 한국 근대극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많은 연극 이론을 소개하고, 현대적 의미의 '극'이 존재하지 않았던 척박한 상황에서 희곡 창작을 위해서는 좋은 외국 극 번역과 모방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5편의 극을 번역하고 모방 극을 창작하였습니다. 일종의 연극 기관인 동국문화협회를 발족했고 연극인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시도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현철에 대한 평가는 양극으로 나뉩니다. 한국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일본 신극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이식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합니다.

 

 

필자는 램 남매의 각색본 번역이 난무하던 시대에, 공연을 염두에 두고 원작의 희곡 형식을 완역했다는 점에서 이 번역이 한국 셰익스피어 수용사에서 갖는 의미를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철이 썼던 수많은 연극 관련 기사에서 주창한 '민족 운동으로서의 연극의 역할'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저 예술로서, 유희로서 연극 운동을 펼친 것이 아니라 식민 조국의 해방을 위한 국민 계몽의 수단으로 연극의 필요성을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초기 수용사 발표를 준비하면서 셰익스피어가 식민 조선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뚜렷한 상이 정립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시민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일본어 셰익스피어 번역을 빌려와야 했던 역사적 아이러니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숙연한 감정에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함께 세미나에 참가한 일본의 중견 학자가 최남선의 행적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소년』, 『청춘』 등의 학예지를 통해 조선의 젊은이들을 계몽했던 최남선의 이후 친일 행보가 흥미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단순한 언급이었기에 토론에서 필자가 응대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최남선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고. 그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에 앞장서다 체포된 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강압적 회유로 친일 캠페인에 동원되었다고. 그에 저항하면 모진 고문과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 친일로 전향한 자도, 반일로 희생된 자도 모두 제국주의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이 말을 하는 순간 필자는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있는 자신을 느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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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권오숙

한국외대에서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국외대, 서울과학기술대 외래교수,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연구이사. 주요 저서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다』 『청소년을 위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와 후기 구조주의』,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등. 『햄릿』, 『맥베스』,『리어 왕』,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 『살로메』 등 역서 다수.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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