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강박’ 아주머니의 죽음 [추천시글]

 

‘저장강박’ 아주머니의 죽음

2021.05.17

 

강화도의 순환 도로를 달리다 보면 ‘로드 킬’ 당한 동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주로 개나 고양이, 족제비 같은 동물인데요. 민첩하게 길을 건너는 고양이도 보았고 비 내리는 여름밤에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아스팔트 길을 건너 산으로 대이동 하는 두꺼비들도 목격했습니다. 길은 사람에게나 있는 개념이죠.

 

그 개념을 잊은 사람들 때문에 ‘민식이 법’이 생겨 요즘 초등학교 주변은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시속 30킬로미터 제한이 전국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강화도에서도 내비게이션은 초등학교가 가까워지면 오백 미터 전방에서부터 다급한 경고음을 냅니다. 그럼에도 며칠 전 인천에서 네 살배기 딸을 유치원에 보내려고 어린이보호구역(스쿨 존)에서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던 서른두 살의 젊은 엄마가 눈 수술 후 앞이 잘 안 보였다는 50대 운전자의 승용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이런 참사를 접하며 오래전 프랑스에서 살 때 시골길에서, 자정이 넘어 오가는 차가 전혀 없는데도 빨간 불에 정확히 서는 차들을 보며 그것이 그들 사회의 ‘인간 존중’이라는 철칙이라고 느꼈습니다. 실험해보니 우린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자동차를 외면해야 대부분 서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며칠 전 김포 대곶면 대명리에서 양곡 쪽으로 가는데 서울 번호판의 25톤 대형트럭이 꽉 막힌 길에서 1미터 뒤로 바짝 붙어왔습니다. 절대로 먼저 갈 수 없는 길이었는데요. 그러더니 어느새 1차로로 들어왔습니다. 내가 절벽처럼 큰 차에 시야가 막혀 차로를 변경해 추월했더니 트럭도 갑자기 2차로로 바꾼 뒤 45도로 꺾어 또 1차로의 내 앞으로 돌진해왔습니다. 워낙 별난 운전을 많이 보아 침착히 대응은 했지만 블랙박스에서 '살기(殺氣)'를 찾아 난폭운전으로 신고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작년 여름엔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새벽에 빈소로 급히 가려고 경인고속도로 입구로 차로를 바꾸자 트럭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고 서더니 운전대에서 내려와 왜 갑자기 깜빡이를 켜냐고 따졌습니다. 상복을 입고 있어서 이게 안 보이냐고 했더니 그제서야 물러서더군요.

 

대대적인 캠페인으로 교통사고는 많이 줄었지만, 인명에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희생자의 하나가 내가 잘 아는 강화도의 팔순 독거 할머니였습니다. 부음은 몇 달 뒤인 요즘 들었습니다. 봄이 되면 이 밭 저 밭을 돌아다니면서 머위나 쑥, 민들레, 질경이 등 봄나물을 캐다가 읍에 내다 팔거나 식당에서 허드렛일하며 아주 열심히 살아온 분입니다. 밭 주변에는 밀고 다니는 아주머니의 유모차가 늘 보였었는데요. 나는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밭에 김을 매거나 모종을 정식할 때 불러 용돈을 드리며 일손을 도움받았습니다. 아주머니가 김을 매면 그 밭은 개가 밥그릇을 핥은 것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아주머니는 생활력이 강했고 신심이 깊어 인근 기도원에서 철야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남편을 일찍 여읜 아주머니는 혼자 힘으로 아담한 슬라브 단층집을 지었고 마루는 교인들의 심방 예배를 위해 아주 널찍하게 만들었죠. 옥상에 올라가면 앞바다가 훤히 펼쳐졌습니다.

 

​아주머니의 특징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습관이었어요. 하루는 지나가다 보니 웬 대형 컨테이너가 집 앞마당에 보이기에 잠시 들렀습니다. “방도 많은데 웬 컨테이너예요. 저에게 넘기시죠”라고 했더니 넣을 물건이 많아 어렵게 구해 온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머니댁의 방 구경을 할 때는 건넌방을 열려고 했더니 말렸습니다. 그래도 열었더니 꽤 넓은 방에는 발을 딛기 어려울 정도로 옷가지들이 거의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다 뭐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팔 거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옷만이 아닙니다.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얻어온 찌개를 끓이고 또 끓여서 식사했습니다. 약 팔백 년 전에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백성들이 몽골과 이런 정신으로 39년 간 싸웠겠지, 역사를 잠시 떠올렸습니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할머니들이 그렇듯이 이 아주머니도 언제나 낡은 유모차 위에 짐을 놓고 거의 구십 도로 구부러진 몸을 의지해 이동했고 일이 끝나면 어두컴컴한 밤길로 퇴근했습니다. 밤저녁에 지나가다 짙은 복색의 아주머니를 보면 차창을 열고 차 조심 하시라고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작년 겨울 운명의 날에 로드 킬 뺑소니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뒤에 오던 차가 마침 목격하고 신고해서 다리를 건너려던 운전자가 붙잡혔다는 게 동네 지인의 말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다니는 순환도로는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보도 공사를 하고 있어 길이 울퉁불퉁했기에 그날 아주머니는 차도로 걸어갔다고 합니다.

 

 

고인은 가난한 삶에서 아무것도 버리려 하지 않았지만, 생명 있는 것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마루에는 늘 잘 기른 화분에 꽃이 가득했죠. 기르기에 힘에 부치는지 내게 수십 개나 되는 ‘다육이’를 다 가져가라고 성화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고 커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 개도 받아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저장강박증((compulsive hoarding syndrome)'일까 하고 비웃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장강박은 정돈이 안 된 물건으로 넘쳐나는 공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물건 수집과 다르다고 합니다. 깔끔한 아주머니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뉴스엔 서울 어느 구청에서 100톤을 수거한 저장강박 가구의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글쎄요. 가난한 사람은 본디 버리지 않는 게 습관이 되었을까요? 전신재 수필가가 '가난에 대하여'에서 쓴 것처럼 부자들은 상품에 둘러싸여 상품을 소비하면서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물건 하나하나에 정을 들이며 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출발부터.

 

 

​아주머니가 세상을 뜨자 앞마당의 컨테이너 옆으로 잡초의 키가 커졌습니다. 아무쪼록 가난과 싸워온 아주머니가 저세상에서는 어떤 강박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이승의 짐을 털어놓았기를 기원합니다. 집 앞을 지날 때, 마음만 먹으면 문을 두드릴 수 있어 내겐 마을의 일부였던 아주머니의 작고로 풍경 퍼즐의 큰 조각이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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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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