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은 만년필입니다[박종진]

만년필은 만년필입니다

2021.03.12

 

2016년 1월 S전자의 P과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자 메일을 받았습니다. P과장은 무선 사업부에서 태블릿 상품기획을 담당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에 끼우는 디지털 펜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의 메일이 오간 뒤 P과장은 팀원 2명과 함께 저를 찾아왔습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만년필, 연필, 볼펜 등 현대 필기구와 사라진 깃펜, 철필까지 인류가 사용했던 5000년간의 필기구에 대한 흥망성쇠가 펼쳐졌습니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열심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라도 더 이야기하려고 했고 저쪽은 조금이라도 이해가 안 되면 그때마다 질문을 하였습니다.

 

 

서로의 머리가 말랑말랑해졌을 때 이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소장님,디지털 펜은 활성화될까요?” 각종 필기구의 연혁을 연구해온 저에게 미래를 알아맞춰야 하는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침착하게 “시기가 문제지만 언젠가는 활성화되겠지요. 요즘 문서 작성은 거의 키보드로 하고 있으니까요.”라고 답했지만, 마음속에선 “아직 한참 멀었어요. 당신들은 헛고생하고 있어요.”라고 잔뜩 희망을 섞어 외치고 있었습니다. 사실 걱정되고 불안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디지털 펜의 활성화 즉 성공은 아날로그 펜의 종말(終末)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참으로 어리석지만 내 생애에 그런 일 없기를 바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갖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연필, 만년필, 볼펜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디지털 펜의 성공이 곧 아날로그 펜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략하게 연필의 역사를 살펴보면 연필은 1564년 영국에서 쓸 수 있는 부드러운 흑연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처음의 모양은 기다란 원통형의 덩어리를 양쪽으로 뾰족하게 만든 다음 손에 흑연이 묻지 않게 실을 둘둘 감아 사용했습니다. 지금처럼 가는 심에 나무를 위 아래로 붙여 자루 연필의 모양을 갖춘 것은 1600년대 후반으로 약 130년이 지난 후입니다.

 

​만년필은 1883년 워터맨 만년필부터 그 실용적인 역사가 시작되는데 처음의 모양은 연필을 닮았습니다. 셔츠에 꽂을 수 있는 클립이 장착되고, 돌려 잠그는 나사식 뚜껑이 만들어져 지금 같은 만년필의 형태가 된 것은 1910년대 중반으로 약 30년이 지난 후입니다. 볼펜이 처음 특허를 얻은 것은 1888년으로 만년필과 불과 5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이것은 실용적이지 못했습니다. 실용적인 것은 1940년대 중반에 등장했고 이 역시 처음 모습은 만년필을 닮았습니다. 지금처럼 심이 누르면 들어가고 나오는 볼펜다운 볼펜은 1950년대 중반에 등장 후 약 10년이 지난 뒤입니다.

 

 

​요약하면 어떤 새로운 것은 처음부터 자기 모습을 갖추고 탄생하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자기 모습을 갖추고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디지털 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진은 디지털 펜 중 가장 유명한 A사(社) 디지털 펜으로 딱 봐도 연필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위 A사의 디지털 펜, 아래 연필

 

앞서 말한 자기 모습을 갖추기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소개하지 않았지만 어떤 것은 만년필을 닮고, 또 어떤 것은 볼펜을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펜이 크게 성공하면 제 걱정처럼 아날로그 펜들은 사라질까요?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만년필이 생겨도 연필은 사라지지 않았고, 볼펜이 등장해도 만년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필기구들은 어느 하나를 없앨 만큼 모든 면에서 경쟁하고 대결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이었고 이들의 성공은 기존 필기구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며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펜 역시 자기 길을 찾아야 성공하겠지요.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연필은 연필이고, 볼펜은 볼펜이며 만년필은 만년필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자유컬럼그룹

www.freecolumn.co.kr

케이콘텐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