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복지의 그늘[방석순]

무한 복지의 그늘

2021.03.11

 

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청계산에 오르는데 벌써 산에서 내려오는 이들이 등산로 입구에서 강한 바람을 뿜어내는 기구로 옷과 배낭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습니다. 압축공기를 뿜어내는 에어 컴프레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자동차 수리센터, 세차장, 골프장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던 물건인데 등산로에서도 보게되어 무척 신기했습니다. 또 한편 ‘원, 그깟 손으로 털어내도 될 먼지를 털라고 저런 것까지 설치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즘 서울 인근 등산로 입구에는 으레 에어 컴프레서가 설치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그런 물건이 눈에 띄지 않는 등산로가 이상해 보일 정도입니다. 이제는 너도 나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으로 먼지를 털게 되었습니다. 또 등산로 곳곳에는 멍석같이 두툼한 깔개도 덮여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것인지 산을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얼음이 녹는 초봄에도 등산로가 질지 않아서 좋습니다.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서 산행객들이 에어 컴프레서로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길거리의 편의시설도 날로 늘어갑니다. 한여름에는 주요 도로 횡단보도마다 따가운 햇볕을 가릴 수 있게 그늘막이 펼쳐집니다. 더위를 덜라고 버스정류장에 송풍기가 설치된 곳도 있습니다. 한겨울에는 찬바람을 피해 가라고 비닐 장막이 생겨납니다. 긴 걸상 바닥에 열선이 깔렸는지, 버스를 기다리느라 잠시 앉은 사이에 엉덩이가 따뜻해지는 정류장도 있습니다. 지하철, 버스에 이어 정류장에도 공공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통신료 부담을 덜어줍니다. 정부나 지자체의 선심과 복지 경쟁 덕분에 도시민들은 물샐 틈 없는 무한 복지를 누리는 모양새입니다.

 

 

도심 주요 도로 건널목마다 겨울에는 바람막이, 여름에는 그늘막이 설치된다

그런데 열네 살 소정이는 추운 겨울날 오빠가 오랫동안 입어서 소매 끝이 다 해진 낡은 점퍼를 걸치고 학교로 간답니다. 쥐꼬리만 한 수급비로는 할머니와 먹고살기에도 버겁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보일러가 꺼진 차가운 방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야 한답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소정이에게 따뜻한 옷과 난방비를 지원해달라고 TV 시청자들에게 호소합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돌보기 위해 오늘도 차가운 겨울바다 물속으로 자맥질을 합니다. 돈이 없어 더 잘해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속상해 눈물짓습니다. 9살 동준이는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집안일을 거들면서 또 그런 할머니가 불쌍하고 딱해서 눈물짓습니다. 연탄으로 데우는 낡은 방바닥은 온기가 시원찮아 곰팡이가 피고 음습하기만 합니다. 월드비전은 동준이와 할머니의 겨울나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코로나에 갇혀 지내며 여기저기 TV 채널에서 보게 된 사연들입니다. 몸이 아파도 치료할 수 없고, 어둡고 침침한 냉골에서 추위에 떨며, 입을 옷과 먹을 양식을 걱정하는 불우한 처지의 어린이나 노인들을 도와달라는 호소가 끊이질 않습니다. 처음엔 그저 참 딱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연일 그런 영상물을 대하게 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도대체 그 엄청난 국가 예산은 다 어디에다 들이붓고 저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내버려 두는 건가 싶습니다.

 

최근의 버스 정류장 서비스 3종세트 송풍기, 온열벤치, 와이파이

 

근래 국가예산은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 올해는 558조 원에 이르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덩어리가 보건ㆍ복지ㆍ고용 부문으로 199조7천억 원, 전체 예산의 35.8%입니다. 지난해에 비하면 전체 예산은 8.9% 늘었고, 그중 보건ㆍ복지ㆍ고용 부문은 11%나 늘었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기묘한 논리의 경제정책과 복지 최우선의 사회정책으로 다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정권의 예산 편성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그 막대한 예산으로 육아 친화적인 환경 조성을 위해 출산 전후 휴가급여를 올리고, 신혼부부의 임대주택을 확대한다고 합니다. 어린이집 통학차량을 늘리고,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 대상을 확대한다고도 합니다. 노인 일자리도 만들고, 고용지원금을 지급하고. 그런데 저 불우한 이웃들에겐 왜 복지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들에겐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정부나 지자체의 복지 경쟁도 눈에 드러나 칭찬받을 만한 곳으로만 쏠릴 뿐 사회의 구석진 곳, 어두운 곳엔 나 몰라라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산행 중에 덮어쓴 먼지쯤 손으로 타올로 얼마든지 털어낼 수 있습니다. 그깟 버스 기다리는 몇 분 동안 엉덩이를 덥히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좀 더 따뜻하게 몸을 잘 싸매고 다니면 얼어 죽을 염려는 없습니다. 그늘막이 없어도 작은 양산 한 개, 쥘부채 한 개면 따가운 햇볕을 웬만큼 가릴 수 있습니다. 버스 기다리는 몇 분 동안 더위를 식히라고 정류장에서 찬바람까지 틀어주는 복지는 아무래도 너무 과해 보입니다. 정말 예산이 부족하다면 그런 푼돈이라도 아껴서 불우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햇살이 눈부실수록 그늘이 짙은 법,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무한 복지의 그늘도 그렇게 짙기만 합니다. 표를 위한 전시행정, 선심공세가 아닌, 좀 더 세심히 이웃을 돌보는 진정한 복지 시책이 아쉽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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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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