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가 맺어준 뜻밖의 인연 [권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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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맺어준 뜻밖의 인연

2021.02.16

며칠 전 낯선 번호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혹시나 이상한 전화일까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화기 건너편에서 "권오숙 선생님이십니까?"하는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순간 ‘아! 셰익스피어 강연 의뢰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2010년 거의 국내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인문학 강연인 ‘아트 앤 스터디’에서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대중 강연을 의뢰받아 시작한 뒤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 심지어 제주도까지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각종 지자체 문화센터, 도서관, 학교, 방송 등 강연 장소나 매체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캠퍼스 밖에서 셰익스피어 대중 강연을 자주 하다 보니 어느 방송 진행자는 내 소개를 하면서 ‘셰익스피어 전도사’라고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소개가 좀 과하다 싶기도 했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초등학교부터 영국문화원까지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갔으니 그렇게 틀린 표현은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화도 당연히 그런 전화구나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는 클래식 작곡가 류재준이라고 합니다."하는 상대의 소개에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어라? 클래식 작곡가가 내게 왜 전화를 해?’ 류재준 선생님은 지금 72분짜리 교향곡 작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향곡의 테마가 셰익스피어 소네트 33번과 60번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팬데믹 상황에서 영감을 얻어 교향곡의 소재를 택했다는 설명도 했습니다. 셰익스피어도 1592년부터 3년 동안 페스트 때문에 극장이 폐쇄되어 공연을 하지 못하고 주로 시를 쓰며 보냈거든요. 선생님은 그 교향곡에 합창곡과 솔로곡으로 삽입되는 셰익스피어 소네트 33번과 60번 텍스트에 대한 자문을 구했습니다.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바로 다음 주가 설날이고, 현재 쓰다 만 논문에, 출판사로부터 재촉 받고 있는 번역에, 안 그래도 스케줄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터였거든요. 게다가 나는 셰익스피어 희곡 전공이지 소네트 전공자가 아니잖은가? 그러나 무엇보다 클래식에 문외한인데 작곡에 어떤 도움말을 해줄 수 있을지... 그 걱정이 가장 앞섰습니다. 허나 셰익스피어 관련 일이라면 거절을 하지 못하는 습성이 발동되어 덜커덕 승낙을 하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인터넷으로 류재준 작곡가에 대해 리서치를 시작했습니다. 정중하게 도움을 청한 그분은 국내외 대단한 명성을 지닌 작곡가였습니다. 이미 독주곡, 협주곡, 합창곡뿐만 아니라 교향곡까지 많은 작품이 창작, 연주되었고, 서울 국제음악제 예술 감독도 역임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곡을 작곡한 탓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음악제 예산이 몇 년 동안 지원되지 않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2013년에는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 금난새, 장영주, 조수미 등 국내 유수 음악가들이 수상한 바 있는 ‘난파 음악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최초의 수상 거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난파 선생님의 친일 행적 및 상의 공정성과 도덕성에 대한 회의”가 수상 거부 소감이었습니다. 화려한 이력과 강직함을 보여주는 기사들을 읽고 나니 부담감은 더 커졌습니다.

작업은 작곡 작업실에서 컴퓨터로 곡을 함께 들으며 진행되었습니다. 거의 까막눈이라 할 수 있는 내가 수많은 악기를 위한 십여 줄의 교향곡 악보를 들여다보고 연주를 직접 들으며 의견을 말했습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는 14행의 연시(戀詩)로 아주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는 정형시입니다. 각 행은 약강조(弱强調)의 운율이 다섯 번 반복됩니다. 내가 눈여겨봐야 할 점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작곡에서 이런 약강조가 흐트러진 부분은 없는지, 작곡의 필요로 인해 특정 구절이 반복될 때 과연 어떤 구절이 반복되는 것이 맞는지...등등.

10시 반에 시작한 작업은 2시 반에 가까워서야 끝났습니다. 거의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작업을 한 셈입니다. 가슴 설렐 정도로 웅장한 피날레를 듣는 순간 안도감과 뿌듯함이 함께 몰려왔습니다. 이 곡은 올 가을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연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특히 셰익스피어 본 고장인 런던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작곡가님도 셰익스피어가 세계적으로 지닌 명성을 잘 알고 있고, 특히 셰익스피어를 신성시하는 영국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아주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도 혹여 놓친 부분은 없을까 착잡하긴 했지만 내 부족한 지식이 이런 위대한 작업에 일조할 수 있음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을 겪으면서 큰 병도 얻으셨던 분의 이 거대한 행보는 내게 거센 채찍이 되었습니다. 방학 중 느슨해졌던 내 일상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좋은 영향력을 나눈 셈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준 이 뜻밖의 인연이 고마울 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나의 나날들을 참 다채롭게 해줍니다. 모쪼록 작업이 잘 마무리되어 찬란하게 무대에서 연주될 날을 고대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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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권오숙

한국외대에서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국외대, 서울과학기술대 외래교수,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연구이사. 주요 저서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다』 『청소년을 위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와 후기 구조주의』,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등. 『햄릿』, 『맥베스』,『리어 왕』,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 『살로메』 등 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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