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야 나오렴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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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야 나오렴

2021.01.05

우리 집 안방의 문이 6개인 장롱 문 가운데 창 쪽으로 있는 문 하나는 늘 열려있습니다. 그 문 쪽에 양복저고리 및 바지들와 넥타이가 걸려있고, 문 안쪽에 거울이 달려 있어 옷을 입거나, 넥타이를 매고 나서 매무새를 살피기가 편리한 점도 있을 뿐 아니라 통풍을 시켜서 양복의 좀을 막는 효과도 있으려니 생각해왔습니다.

길이 5m 폭 1m 높이 20cm 남짓한 장롱 천장에서 방 천장까지의 공간에는 부모님 제사 때나 쓰는 병풍이 포개진 채 누워 있고, 나머지는 빈 공간입니다. 여름에 모기를 잡으려 할 때 모기가 그 속으로 숨어들면 잡기를 포기하곤 했습니다.

지난달 어느 밤이었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 누운 채로 핸드폰의 유튜브를 켜고 잠을 청할 만한 볼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령집거미.
흐릿하게나마 기억되는 내 방의 거미의 모습.

핸드폰의 불빛은 희미했으나 칠흑의 어둠 속에서 장롱의 반짝이는 표면 칠에 반사되어 장롱 위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밝기는 되었습니다.

그 순간, 다리의 길이가 5cm쯤 되어 보이는 제법 큰 거미 한 마리가 장롱 위의 빈 공간에서 문이 열린 장롱 쪽으로 기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잠이 확 달아난 채로 나는 거미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미는 천천히 장롱 안으로 기어 내려와 아래 위 두 칸으로 나누어진 양복걸이 중 위 칸의 양복저고리로 내려왔습니다. 거미는 다섯 벌인 양복을 좌우로 몇 번 왔다갔다 하더니 이번엔 아래 칸 옷걸이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래 칸 옷걸이에서는 내려오자마자 저고리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금방 나오겠지 하며 기다렸으나 거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와락 겁이 났습니다. 거미가 장롱 밖으로 나오면 바로 곁이 내가 누운 곳입니다.

거미가 독거미라면 어쩌지? 물려도 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의 얼굴 위로 기어 올라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옷을 갉아먹지는 않을까? 천장 구석에 거미 가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새끼를 치면 어쩐담?

온갖 생각이 스치면서 이 녀석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켜고 파리채를 챙겼습니다. 그리고 장롱 아래 칸 거미가 숨어들어간 양복저고리 틈새부터 수색에 나섰습니다. 눈에 띄기만 하면 파리채를 후려칠 작정으로 저고리와 옆 칸의 바지까지 모두 헤집어 봤지만 거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수선을 떤 뒤 일단 거미를 장롱 안에 가두었다가 아침에 수색을 다시하고, 그래도 없으면 살충제 스프레이를 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롱 문을 닫고 잠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은 채 거미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에 이사 온 뒤 22년째이지만 이 방에서 한 번도 거미나 거미줄조차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큰 거미가 방안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원래부터 큰 거미였나 아니면 작은 거미 때 들어와 살면서 자란 것인가? 그러면 거미의 나이는 몇 살쯤 됐을까?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더러 모기가 장롱 뒤로 숨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것으로 먹이가 충분했을까? 올 겨울 모기가 없어 이상하다 했는데 거미 덕분이었나? 내가 잠자는 새에 나를 물어 피를 빨지는 않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친 채 아침을 맞았습니다.

벌레와 곤충이라면 질겁하는 아내는 간밤의 거미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좋냐?”고 잔뜩 겁먹은 소리를 했습니다. 아내는 "어찌됐든 잡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닫힌 장롱 문을 열어 상하 양복은 물론 양말 내복까지 모두 거실로 꺼냈습니다.

조심조심 옷을 열고 털면서 거미를 찾았으나 호주머니나 가랑이 깊숙이 숨었는지 종적이 없습니다. 옷을 열어 놓으면 저절로 기어 나올지 모른다며 나오기만 하면 내려칠 자세로 파리채를 들고 거실을 맴돌았으나 여전히 거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옷가지를 다시 장롱 속에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프레이 알러지가 있는 아내 때문에 살충제를 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유튜브에서 거미에 관한 글과 동영상을 찾아 나섰습니다.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 파리를 잡아서 거미줄에 던지고 거미의 동태를 살피던 기억이며, 해질녘 왕거미가 정교하게 거미줄을 치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던 기억들도 떠올랐습니다.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 절지동물이고, 거미줄의 원리가 방탄복의 원료인 극세사(極細絲) 제조에 이용되며, 일본에선 거미싸움 전국대회가 열리고, 국내에 거미를 애완동물로 기르는 사람이 10만 명, 거미줄을 치는 거미는 정주형(定住型), 거미줄을 안 치고 이동하면서 먹이를 사냥하는 거미는 배회형(徘徊型)이라니 거미줄이 없는 내 방의 거미는 배회형이 아닐까 등등, 내가 거미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거미에 관한 생물학계의 연구는 그 대상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다고 합니다. 그 모두가 인간에게 유익한 것들이라니 거미가 좋아졌고,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다시 장롱 문을 열고 지냅니다.

다시 나타난다 해도 나는 절대 파리채를 잡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거미의 생활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거미가 지난번 파리채를 들고 설쳐대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 뒤로 나는 아직 거미와 만나지 못했습니다. 거미야 제발 나와 주렴!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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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주간한국,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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