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기억 [김수종]



www.freecolumn.co.kr

어떤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기억

2020.12.17

발레르 마리 르네 조르주 지스카르 데스탱.

이렇게 이름 여섯 단어를 나열하면 헷갈리다가 마지막 두 단어를 보고서야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1926~2020)이란 걸 알게 됩니다. 그가 12월 3일 세상을 떴습니다. 국내 언론들이 기사 제목에 그의 사망 원인을 코로나19라고 일제히 보도한 걸 보며 코로나19가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94세라고 생각하니 언론 보도란 본시 시류를 타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기자를 시작하던 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은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격변의 1970년대 프랑스를 통치한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정치인이고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기억에 남을 만한데 세월이 흐른 탓인지 가물가물합니다.

그의 긴 이름 때문에 한국 기자들이 애먹었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신문사의 외신부(요즘의 국제부) 기자들이 하루이틀 혼란에 빠졌습니다. AP나 AFP 등의 국제 텔렉스에 의존하던 시절 줄줄이 붙어 나오는 그의 긴 프랑스 이름을 어떻게 줄여서 부르는지 몰라서 당혹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과 U-튜브가 있었다면 금방 프랑스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지스카르 데스탱’이라고 쉽게 답을 찾았을 것입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그의 사망 기사를 보며 그의 행적을 복습해 봅니다. 드골이나 퐁피두 대통령처럼 전후의 영웅적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는 아니지만 프랑스를 위해 또 국제사회에 공헌한 정치가였습니다. 귀족, 소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수재였던 그는 일찍이 재무부에 들어가 고속 승진의 길을 걸었고 드골 대통령에 의해 34세에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 재무장관에 발탁되었습니다. 퐁피두 대통령과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어 다시 재무장관으로 일합니다. 우파인 그는 1974년 좌파 바람을 몰고 온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과 접전 끝에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48세로 나폴레옹 이후 가장 젊은 프랑스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81년에는 미테랑에게 패해 권좌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경제에 밝았던 지스카르 데스탱은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와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며 유럽연합(EU)의 초석을 깔았습니다. 또 1975년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미국 정상이 모이는 소위 서방선진국정상회의(G5)를 개최하여 오늘날 국제사회를 이끌어가는 G7정상회의를 정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산업을 일으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는 원자력발전 정책을 추진하여 프랑스 전기에너지의 70%를 충족시키는 세계 일등 원자력발전국가의 기초를 닦았고 고속철도 TGV와 유럽콘서시엄 항공기 제작사인 에어버스도 그의 재무장관 및 대통령 임기 동안 크게 도약했습니다.

그는 이민 허용을 이민족의 침입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국수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인종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또 터키의 EU 가입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2002년 르몽드지와의 회견에서 "터키의 EU 가입은 유럽의 끝을 의미한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지스카르 데스탱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뉴스는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사건입니다. 2018년 그의 나이 92세에 독일 방송사의 여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기자가 올봄 "인터뷰가 끝난 후 지스카르 대통령이 내 엉덩이를 계속 더듬었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20세기 역사를 만들었던 정치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와 교류했던 동시대의 유명한 정치인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로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정도가 생각납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서 20세기가 저만치 더 멀어져간 느낌이 듭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