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약과 비수가 되는 언어 [권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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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약과 비수가 되는 언어

2020.11.10

창밖에 늦가을의 땅거미가 지고 있습니다. 빨강으로 노랑으로 고동으로 물들었던 잎들이 하나 둘 떨어져 다소 스산한 느낌입니다. 그 숲으로 새들이 날아듭니다. 날아온 새들이 가지에 앉으면 잎새 사이에 숨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한두 마리가 푸드덕 하고 날아오르면 뒤이어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오릅니다. 장관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 광경이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수차례 펼쳐집니다.
그런데 창밖에 이런 풍광을 지닌 집에서 십여 년 살았지만 그런 광경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나방의 죽음> (“The Death of the Moth”)에서 다음 구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 눈에 그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떼까마귀도 그들의 연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나무 꼭대기 주위로 날아올라 마치 수천 개의 검은 매듭을 가진 거대한 그물이 허공에 던져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잠시 뒤 나무에 천천히 내려앉아 나뭇가지마다 가지 끝에 검은 매듭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그물이 다시 공중으로, 이번에는 더 커다란 원 모양으로 던져지는 것 같았다. 허공으로 던져졌다가 나무 위에 천천히 내려앉는 것이 아주 신나는 듯 시끄럽게 울어댔다.

죽어가는 나방이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을 그린 이 에세이에서 울프는 그와 대조적으로 생명력 넘치는 주변 광경을 묘사합니다. 그중 한 장면인 울프의 이 묘사를 읽었을 때 정말 마음에 한 편의 그림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한 떼의 까마귀가 나무 위에 날아와 앉았다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모습을 허공에 던져진 그물에 비유하여 생생하게 시각화시킨 것입니다. 울프의 이런 절묘한 묘사에 감탄하고 난 뒤 갑자기 우리 집 창밖에서 일상적으로 연출되고 있었던 그런 풍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삼 울프와는 달리 무디고, 무감각한 필자의 관찰력에 좌절하면서 울프의 글이 내 눈에 어떤 마법을 걸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작가들은 남다른 관찰력으로 평범한 우리 곁의 일상을 보고 전혀 새롭게 그것을 그려냅니다. 그들의 펜을 통해 일상은 전혀 새롭고 낯선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을 러시아 형식주의 학자들은 문학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라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조이럭 클럽>으로 잘 알려진 중국계 미국 작가 에이미 탠(Amy Tan)도 <모국어>(“Mother Tongue”)라는 에세이에서 “어떤 감정과, 시각적 이미지와, 복잡한 생각과, 단순한 진리를 불러일으키는 언어의 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언어가 지닌 이런 힘은 종종 마법에 비유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원로원 귀족의 영애 데스데모나가 늙은 무어인 용병 장군 오셀로와 비밀 결혼을 하자 그녀의 아버지 브라밴쇼는 원로원 회의에서 오셀로가 “마법”을 사용하여 딸의 정신을 홀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브라밴쇼의 주장에 오셀로는 자기가 데스데모나에게 사용한 마법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였다고 답합니다. 아버지에게 들려주는 오셀로의 인생이야기를 엿듣고 데스데모나는 굴곡진 그의 삶에 연민과 동정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연민하는 데스데모나의 따뜻한 마음씨에 오셀로도 사랑을 느껴 급기야 두 사람은 비밀 결혼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언어가 지닌 마법과 같은 힘을 보여주는 한 편의 동화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하는 언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면 그건 사람의 이성적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독약이 됩니다. 오셀로의 부관이 되고 싶었으나 캐시오라는 젊은 부관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이아고는 오셀로와 캐시오를 한꺼번에 파멸시키고자 합니다. 이아고는 오셀로와 캐시오가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것 같다는 의처증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데스데모나가 캐시오와 부적절한 관계인 것처럼 오셀로의 마음에 의심을 불어넣어 그들을 한꺼번에 파멸시킵니다. 베니스의 이방인이자 데스데모나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피부색도 다른 오셀로는 이아고의 마법 같은 언어에 하릴없이 휘둘리고 맙니다.
이를 보고 이아고는 "무어 놈은 벌써 내 독약으로 변하고 있어."(3막 3장 330행) 라고 비웃습니다. 이제 이성적 판단력이 마비된 오셀로는 순결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부정한 여자라고 생각하여 목 졸라 죽입니다. 이렇게 교묘한 이아고의 언어는 존재하지도 않는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창조해 냅니다. 그래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의 무서운 힘을 보여줍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부정적 언어의 힘이 빚어내는 비극을 너무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현대의 이아고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유튜브를 통해, 각종 SNS를 통해 떠돌아다닙니다. 그런 거짓들은 이아고의 독약 같은 말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진실처럼 믿게 만듭니다. 주로 정치 리더들에서부터 젊은 연예인들까지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 그들의 타깃이 됩니다.
그러면 뒤이어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사람들의 비수 같은 언어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댓글과 트위터 실어 나르기 등을 통해 그 만들어진 이야기의 주인공의 마음에 칼을 겨눕니다. 그들의 칼날은 너무도 날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진 칼질은 상대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할 때까지 절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그린 한 가정의 비극은 이제 현대의 인터넷 기술을 등에 업고 무차별적으로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독약 같고 비수 같은 언어가 무고한 사람들을 베어 쓰러뜨리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필자가 그 흔한 블로그도, 트위터도, 카카오 스토리도, 인스타그램도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누군가에게 칼질이 될까봐 댓글 하나 달지 않는 이유입니다. 불특정 다수의 칼날이 언제, 어떻게 나를 타깃으로 할지 모름을 인지하고 우리의 언어 행위가 좀 더 신중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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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권오숙

한국외대에서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국외대, 서울과학기술대 외래교수,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연구이사. 주요 저서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다』 『청소년을 위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와 후기 구조주의』,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등. 『햄릿』, 『맥베스』,『리어 왕』,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 『살로메』 등 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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