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나라의 만년필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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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의 만년필

2020.09.29

천 리에 떨어져 있어도 자기 집을 찾아오는 우리나라의 진돗개. 군견으로 유명한 저먼 셰퍼드는 독일, 험상궂게 생겼지만 친절한 불도그는 영국. 프랑스엔 발랄한 푸들이 있고 하얀 털에 눈, 코. 입이 까만 몰티즈는 이탈리아. 큰 덩치에 썰매를 끄는 순둥이 알래스칸 맬러뮤트는 미국입니다. 이 밖에도 수많은 개의 종류가 있습니다. 종류가 많은 이유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품종을 개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추석을 앞두고 웬 개소리냐고요? 사실 만년필과 반려견은 상당히 많이 닮았습니다. 먹이를 주듯 잉크를 채워주어야 하고, 목욕을 시키듯 세척(洗滌)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둘은 주인을 알아본다는 점입니다. 반려견이 주인을 보면 꼬리치듯이 만년필을 매일매일 써 주면 펜 끝이 주인의 필기습관에 맞게 닳아 매끄럽고 부들부들한 그 특별한 필기감은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년필도 나라마다 특징이 있을까? 먼저 만년필 종주국(宗主國)인 미국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만년필은 모세관현상을 이용한, 가는 홈을 타고  잉크가 흘러 나와 펜촉을 통해 글이 써지는 것인데, 이 방법은 1883년 뉴욕에서 보험업을 하던 워터맨이라는 사람이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설립한 회사가 워터맨사(社)입니다. 몇 년 뒤 등장한 회사가 화살클립으로 유명한 파커사(社) 그리고 만년필에 평생을 보증하는 개념을 도입하여 만년필의 황금기를 연 쉐퍼. 이 회사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회사들입니다. 미국 만년필의 특징은 “튼튼하고 수리가 쉽다."입니다. 수십 번 분해하고 조립해도 문제없이 잘 작동하고 꼭 전용도구가 아니더라도 분해하고 수리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미국 만년필 회사들이 많이 진출하여 전체적으로 미국과 비슷한데 “보수적이고 점잖다.”입니다. 미국에서 유행이 끝나도 영국에서는 계속 생산되는 것이 많고 대부분의 만년필 컬러는 빨강, 노랑처럼 튀는 색상보다는 자주색이나  남색이 많습니다.

독일은 현대 만년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유행과 이슈를 이끄는 몽블랑과 펠리칸이 독일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전엔 그리 중요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까지 미국에서 개발되는 것을 변형하여 썼고 독일이 발명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29년 잉크류를 만들던 펠리칸사(社)에 100분의 1mm까지 정밀하게 만든 잉크를 채우는 장치인 이른바, 피스톤 필러(piston filler)가 끼워진 만년필이 출시되면서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몽블랑도 이것에 자극받아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이 두 회사는 라이벌 관계을 유지하면서 독일 만년필이 발전하게 됩니다. 독일은 한마디로  “정밀하지만 융통성은 없다.”입니다. 왜냐면 전용도구가 없으면 분해가 힘들고 한 번의 분해도 좋지 않다는 것은 독일 만년필을 딱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생산된 펠리칸 100

         
프랑스는 “세련된 자기만의 고집.”입니다. 잉글리시 불도그를 개량하여 프렌치 불도그를 만든 것처럼 만년필 세계의 주도권이 미국에 있었던 시절에도 프랑스는 프랑스 특유의 세련됨을 잃지 않고 만년필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독일시대인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탈리아는 “화려함 속에 감춰진 약한 몸.”입니다. 이탈리아 역시 초기엔 상표를 보지 않으면 미국 만년필로 보일 만큼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탈리아만의 화려함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파랑은 에게해의 바다를, 빨강은 곧 장미였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잉크를 채우는 장치가 쉽게 고장 나고 몸통이 부러지는 등 내구성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 화려함에 끌려 '내 펜은 괜찮겠지' 하고 지갑을 여는 것이 만년필 세계에 누구나 한번 빠지게 되는 함정 중에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전부 B플러스.”입니다. 동급의 미국이나 유럽의 만년필에 비해 3분의 1정도 저렴한 일본 만년필은 성능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제법 튼튼하고 펜촉도 야물지만, 아내가 모르는 특별 보너스가 생겨도 일본 만년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일본 만년필의 문제 아닌 문제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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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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