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여자 보려고 문을 부순 조선남자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한다. 남을 속여 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여긴다."


한복입은 선교사. 1900년대 초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많은 서양인들은 조선에서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들의 책은 조선을 보는 또다른 관점이 되고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최초로 유럽에 소개한 헨드릭 하멜(1630~1692)은 <하멜표류기>에서 조선인의 민족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 선원으로 일본으로 가던 중 난파해 13년간 조선에 억류됐다. 조선에서 오랜 기간 구금 생활을 하다보니 조선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인이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병자호란의 일을 사례로 든다. "타르타르(청나라)가 얼음을 건너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병사들은 적과 죽기로 싸우기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 매달아 죽은 자가 더 많았다. 그들은 피를 싫어한다. 전투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만다."


사진2. 어린시절 헨리 웰본(왼쪽)과 한국인 보모. 1906년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헨리 웰본의 아버지 아서 웰본은 선교사로 1900년 내한해 선교활동을 했고 1928년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헨리 웰본은 1904년 서울에서 출생해 1919년 미국으로 귀국했으며 1946~1947년 다시 돌아와 주한미군정청 산하 공보부 문관으로 근무했다. 군정청 근무 당시 수집한 사진 등 한국 관련 자료를 그의 딸이 2017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하멜은 조선의 인구가 매우 많다고 느꼈다. "남자는 이미 아이를 몇 낳은 아내라도 내보내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들일 수 있다. 처첩을 몇이라도 거느릴 수 있으며 그래도 흉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자기 여인을 여종보다 별로 나을 게 없이 취급한다.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아내를 내보낼 수 있으며 남자가 아이를 원치 않으면 쫓겨난 여자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 이 나라에 인구가 그렇게 많은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을 소중히 여기며 자식도 부모를 공경하지만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양반 등 일부 계층에 국한되는 일이었다. 종들은 자기 자식들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자식이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주인이 데려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인의 담배 사랑은 유별나다고 하멜은 말한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피우고 심지어는 네다섯 살 먹은 아이들도 피운다고 놀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라고도 했다.


명성황후 민 씨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1851~1921)도 <상투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에서 처음 조선을 밟았을 때는 낯선 풍속과 문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술한다.


"(1888년 3월) 처음 도착한 제물포 항구는 선창이 없었다. 해안은 돌투성였고 나지막한 능선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헐벗은 모습이었다. 한양의 집들도 모두가 끔찍하게 비위생적이고 벼룩이나 이 등의 해충이 득실거렸다. 모든 오폐수가 길 양쪽으로 나 있는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시궁창으로 흘렀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버려뒀던 하수 도랑의 오물은 여름에 온 비에 쓸려 내려간다. 그 비가 그나마 도시를 살려주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조선인들의 긴 머리털은 빗질을 하지 않아 엉망이었다. 목과 얼굴 언저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흉측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겉모습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다를 바 없었으나 대체로 그들보다 키가 컸다. 그런데 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못했다. 언더우드는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애정 결핍 등으로 스물다섯이 넘는 여자에게서는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을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사진3. 사진찍는 사람들. 1904년 잭 런던 촬영. 미국 헌팅턴도서관 소장. 제대로 된 건축자재가 없어 짚과 수숫대로 벽과 담을 쌓았다. 서양인들은 조선의 낙후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서른여덟의 늦은 나이에 조선에서 남편(기독청년회(YMCA)와 연세대를 설립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과 결혼했다. 신혼여행으로 조선 북부 지방을 둘러보았다. 외국인이 지방을 자유롭게 여행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불편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열악한 숙박시설은 그 가운데서도 으뜸이었다. 일대에서 제일 큰 여인숙일지라도 방이 다섯 또는 여섯 개에 지나지 않았다. "마당에는 개, 고양이, 닭, 돼지, 오리 따위가 그득했으며 황소와 조랑말이 한 지붕 아래에서 요란하게 여물을 먹어대는 통에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겨울에는 온돌이 난방과 요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요긴한 구조이지만, 여름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쌀과 콩 따위를 끓이려면 한여름에 펄펄 끓는 난로 위에서 잘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노숙을 할 수도 없었다. 들판에는 호랑이와 표범 등 맹수들이 수시로 출몰하기 때문이다. 이들 외국인의 눈에도 쉽게 띌 만큼 당시 조선에는 호랑이가 흔했다. 언더우드 역시 한양에 온 지 몇 달 만에 집 옆 러시아 공사관에 나타난 표범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조선인의 호기심은 광적인 수준이었다. 특히 외국인 조선인들에게 여자는 어마어마한 흥밋거리였다. 여인숙에 들어서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집 안을 꽉 메웠다. 문은 모조리 구멍이 났다.


황해도 순천에서는 한 사내가 그녀를 보려고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려고까지 했다. 가마꾼 중 덩치 큰 사내가 그의 상투를 잡고 내동댕이 친 뒤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패줬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언더우드는 "상투가 편리하고 효과적인 손잡이 구실을 한다"면서 "미국남자들이 머리를 이런 식으로 묶지 않는 게 참으로 섭섭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들은 서양인이기는 하지만 수십년 동안 한국에서 체류했다. 그들의 기록을 외국인의 편협된 시각이라고 폄훼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배한철기자]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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