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서리[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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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서리

2020.09.10

올해 여름 장마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여름 장마가 길어지면 과수농가의 얼굴은 그늘이 집니다. 토양에 수분이 많아져서 나무는 웃자라지만, 갈색무늬병이라든지, 탄저병, 노균병 등 병해충 피해가 늘어납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흐린 날이 많아서 농약도 효과가 없어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영동(永同)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인 산간지역이라서 여러 가지 과일이 생산됩니다. 포도와 곶감, 호두를 비롯해서 복숭아, 사과, 배, 자두 등 종류가 다양합니다.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고 해서 가격이 싼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터넷이나 도시에서 영동산 과일을 사 먹을 때보다 비쌉니다.

1990년 초에 섬에서 염소를 사육해 볼 작정으로 남해 사량도라는 섬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참고로 그 시절에는 섬 가격이 육지의 임야보다 훨씬 쌌습니다. 배 안에서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동태를 들고 있었습니다. ‘섬에 가면 생선이 흔할 터인데 왜 동태를 사 들고 가지?’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선착장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저녁상을 받았습니다. 명색이 섬인데 생선이라고는 육지에서 파는 어묵 조림하고 된장찌개에 들어 있는 멸치밖에 안 보였습니다. 여주인 말인즉 “여가 생선이 얼매나 귀한데예,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면 죄다 충무나 부산에 가서 팔고 빈 배만 들어온다 안 합니까?” 사량도에서는 어차피 소비가 안 되니까, 집에서 먹을 잡고기만 들고 온다는 말이었습니다.

영동의 과일도 그렇습니다. 생산자들이 옛날처럼 직접 내다 파는 것이 아니고, 서울의 가락시장이나 용산의 청과물시장, 가깝게는 대전의 농수산물 시장 등에 판매를 하는 까닭입니다.

예전에 생산자들이 소비자에게 직거래를 할 때는 요즘처럼 kg 단위로 판매를 하지 않았습니다. 100개를 한 접으로 해서 얼마씩 팔거나, 송판으로 짠 상자 단위로 팔았습니다. 과수원도 한 동네에 두서너 농가밖에 없었지만, 가격은 물가 대비로 볼 때 지금보다 훨씬 쌌습니다. 보리쌀 한 되면 복숭아 한 접 정도를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과일 한 접을 구매하려면 쌀 20kg짜리 두 포는 줘야 할 겁니다.

영동에 처음 포도가 생산되던 1990년대 초에만 해도 상자 단위가 15kg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모든 과일이 3kg짜리 상자부터 시작이 됩니다. 3kg짜리는 생산 원가로 볼 때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정도로 과일 생산단가보다 포장비가 많이 먹힙니다. 비닐 포장은 기본이고, 과일이 상하지 않게 스티로폼 소재로 개당 포장을 하고, 상자도 재질이 단단한 것으로 사용합니다.

요즘에는 과수원 울타리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보다는 들짐승들이 못 들어오게 망을 치는 정도입니다. 가을날 과수원 옆길을 걷다 보면 먹음직스러운 사과며 배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매달려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주인도 보이지 않겠다, 한 개쯤 따 먹고 싶은 충동이 마른입을 다시게 하지만 이내 포기를 합니다. 만에 하나 주인에게 걸리면 절도죄에 해당됩니다.

예전에는 가시가 단단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오래된 과수원엔 탱자나무 가지가 촘촘히 얽혀 있습니다. 그래도 어느 구석엔가 허술한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개가 드나드는 구멍이라고 해서 개구멍이라고 하는 정도의 크기지만, 서리를 하는 아이들도 충분히 드나들 수는 있습니다.

사과나 배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키면 크게 꾸중을 듣습니다. 땡볕에 무릎 꿇고 양손을 들고 있는 얼차려를 받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한나절 일을 시키기도 합니다.

복숭아 과수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친구가 복숭아서리를 하자고 말했습니다. 시간은 오후 2시 무렵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다른 과수원에서 서리하다 주인 아들에게 걸려서 혼이 났던 적이 있어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야, 이 시간이면 낮잠 자는 시간이라 주인한테 안 걸려.”

아는 놈이 도둑질한다고 친구가 자신 있게 하는 말에 서리하기로 했습니다. 보통 과일 서리를 할 때는 자루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친구는 자루를 준비하지 않고 양동이에 물을 담았습니다. 물은 뭐 하는 데 쓸 것이냐는 제 말에, “복숭아를 씻어 먹어야 할 거 아니냐?”라고 당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친구는 익숙하게 개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숭아나무 저 밑으로 주인의 집이 보이는 지점에 앉았습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따 가자.”

저는 금방이라도 주인이 뛰어 올라올 것 같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자기 집 복숭아를 따듯 크고 잘 익은 걸로 골라서 몇 개를 땄습니다. 양동이 물에 복숭아를 씻어서 제게 권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복숭아 한 개만 먹어도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때는 나이도 어린데 네 개쯤은 먹은 것 같았습니다.

   “야, 복숭씨 다 모아. 공짜로 배부르게 복숭 먹고 주인 승질 나게 하면 안 되잖여.”

친구는 한두 번 해 본 서리가 아니었습니다. 양동이 물은 복숭아나무 밑에 버리고, 복숭아 씨를 줍고, 앉았던 흔적을 정리한 다음에 복숭아를 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 과수원이 있습니다. 주인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장남이 이어받아서 사과나무를 심었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예전처럼 빽빽하게 서 있지 않습니다. 가을이면 열리는 탱자 처리가 귀찮다는 이유로 산 쪽에만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도로 쪽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부친들이 복숭아 과수원을 할 때는 동네에서 잘사는 집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과일 가격은 예전보다 열 배 이상 올랐지만 나가는 돈은 스무 배 이상 될 것입니다. 농촌에서는 열심히만 일하면 도시인 못지않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농촌의 실상을 모르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비료가 귀해서 산에서 풋나무와 풀을 베다가 썩혀서 사용하거나, 인분을 밭에 뿌렸습니다. 요즈음은 농약이며 농자재. 상자와 포장지값이 만만치 않아서 돈이 없으면 농사도 못 짓습니다. 귀농을 해서 실패를 하는 가장 큰 이유도 농사에 대한 지식의 부족도 있지만, 농사가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 지속해서 들어가는 농비 때문일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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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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