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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나온 말 “오래도 살았다”

2020.09.07

  “벌써 75년이라, 오래도 살았다.”
  “누구 말이에요?”
  “나 이야기야.”
  “아니, 아버지는 별 말씀도…."

광복절 아침 식탁에 앉으면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무심코 나온 제 말끝에 자연히 계속된 딸아이와의 대화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살았다”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 해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니,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 살았다”는 말에는 어딘지 부정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듯해 애써 피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애비가 갑자기 “오래 살았다”는 말을 하니 딸아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 아침에는 이 말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튀어나왔습니다.

75년 전, 일본의 패전으로 노예생활 같은 군 복무에서 풀려나 수많은 동포의 귀국 꿈을 앗아간 현해탄을 건너 구사일생으로 부모님이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때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한마디였습니다.

그때 부모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일은 제 일생에서 가장 뜻있는 효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적이고 죽음으로 연결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인 징병(徵兵) 1기생에 해당하는 제가 소집되어 용산부대에 입대한 것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이 임박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던 1945년 3월이었습니다.

4주의 기본훈련이 끝나고 배치된 곳은 일본군이 연전연패(連戰連敗)하던 남방이 아니라 후방인 도쿄(東京) 북쪽의 시골 마을에 신설된 부대였습니다. 고향 집에 소식을 보내라는 명령과 군사우편엽서 한 장을 받고, 언제 배달될지 모르지만 우선 일선에 배치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아시겠지 하고 일본어 편지를 썼습니다.

시골 마을 공회당을 고쳐 급조한 병사에서 우리 조선인 신병 30여 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7~8명의 일본인 고참 군인과 ‘농경부대(農耕部隊)’라는 생소한 부대 이름이었습니다. 광복 후 발간된 일본 단행본에 의하면, 일본 패전 5개월 전에 노동력이 필요해 급조한 특수 목적 부대로 일본 본토에 다섯 소대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명색이 군 부대라면서 무기라고는 목총 한 자루도 없고 대신 낫, 곡괭이, 삽 등 노동 기구만이 주로 농촌 출신인 우리 신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 많은 신병들 중에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본군이 필요했던 것은 오직 우리들의 노동력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착 다음 날부터 훈련이 아닌 고된 노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용어로 ‘타코쓰보(문어 항아리)’라는 1인용 참호(塹壕)를 파는 일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농지가 아닌 야산 비슷한 땅이어서 참호 만들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농촌 출신 신병들은 생소한 일본말 호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사훈련보다 이 노동이 훨씬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저와 광주(光州) 출신의 신병 한사람이 통역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노동을 면제받지는 못했습니다. 한 1주일 지나니 온몸이 피로의 극에 달해 하루는 아침 조례 시간에 실신하여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일본군 상관들의 설명은 없었지만, 이 참호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를 미군의 이 지역 상륙에 대비하기 위한 것임은 누구 눈에도 뻔하였습니다. 당시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은 거의 끝나 일본군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전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3월과 5월 두 차례의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일본의 주요 도시는 미군의 B29 폭격기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제공권을 거의 확보한 연합군은 전투기를 동원하여 일반 시민의 생활까지 위협했습니다. 우리도 작업 도중 몇 번 기총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이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왔으니 부모님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반세기가 넘어 저도 모르게 “오래 살았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다만 이 말의 약간 부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평소에는 애써 이 말 하기를 조심했을 뿐입니다.

아이들도 세배 때의 인사말에 “오래 사세요”라는 표현에 “건강하게”라는 말을 꼭 붙여 사용할 정도로 신경을 쓰는 나이입니다. 일반인이 이 말을 쓸 때도 퍽 조심하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5~6년 전 외손자의 대학 졸업기념 전시회 참관하러 가족들과 대전에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역전에서 택시를 타는데 운전기사가 저를 보고 “90세 되셨지요?” 하고 제 나이를 정확하게 맞혔습니다. “해병대 출신인 우리 아버지가 금년 90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철도기관사가 되는 것을 꿈꾸어 오던 외손자는 군 복무를 마친 뒤 4년 전 철도기관사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 교외를 다니는 지하철과 열차의 기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가 어려운 취직 시험에 합격했을 때 저는 “오래 산 보람이 있다”고 정말 기뻐했습니다.

3년 전, 동네 외과병원에서 젊은 물리치료사가 의사의 처방전을 보면서 “1924년생이시네요. 정말 오래 사셨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탄복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부정적인 분위기는 조금도 못 느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장성해 독립해 나갔고 한때 걱정했던 저의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오직 코로나19 바이러스 소동으로 그나마 누렸던 조그마한 자유가 제한되어 아쉽습니다. 1년에 두세 번 가족들과 휴가여행을 즐기고, 가족 생일엔 근처 호텔이나 식당에서 회식을 하는 조그마한 즐거움도 지금 삼가고 있습니다.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소동은 단시일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앞날이 많이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좋은 세상 다 봤다’는 시쳇말이 한층 더 실감 있게 느껴집니다.

제가 회원으로 있는 어느 인터넷 카페에 최근 서울대 의대 모 교수의 ‘죽음학’ 강의를 소개하는 글이 있어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딸아이가 유튜브에서 이 교수의 강의 두 편을 찾아주어 그것도 보았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글을 수년 전 일본 잡지에서 읽은 기억도 있습니다.

저의 선친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만, 저는 이름만 불교도이고 건강할 때 1년에 두세 번 절을 찾을 정도였습니다. 어릴 적에 불교의 지옥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무서워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오래 살았다”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나이여서 터놓고 죽음 문제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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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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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gi, conpaper E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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