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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문화적 테러, 창경궁 앞 공중변소

2020.06.29

오래전 프랑스에서 독일 점령군이 저지른 어느 만행의 현장에서 보았던 “참혹히 당한 것을 용서하되, 절대 잊지는 말자(Forgive, Yes. Forget, Never.)”라는 구절을 생각하면 가끔 ‘공중변소’ 한 곳이 떠오릅니다.

근래 서울 시내 종로구에서는 창경궁(昌慶宮)과 종묘(宗廟)를 다시 잇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원래 창경궁과 종묘는 서로 연결되어 역사가 살아 숨 쉬던 터전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 문화 유적이 ‘갈기갈기 찢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조선총독부가 ‘근대화’라는 구실로 신작로(新作路)를 내면서부터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말살한 일제 만행의 생생한 현장입니다.

아마도 일제는 거대한 규모로 건축된 경복궁(景福宮)과 그 앞에 넓게 펼쳐진 육조거리(六曹, 현 광화문 거리)의 역사성을 지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조선이 경복궁을 축조한 것은 1395년입니다.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이 1420년에 세워졌으니 그보다 사반세기(四半世紀) 전의 일입니다. 일제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테고, 그래서 우리네 고궁을 참혹하게 난도질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에 있던 옛 ‘총독부 건물’은 온전히 일제의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일제는 조선조 성종(成宗, 1457~1494) 때 건립한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여앉히고 벚꽃놀이 거리까지 조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창경궁을 창경원(昌慶園)으로 강등·격하시켜 조선인이 스스로 역사의 흔적을 발로 짓밟게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제는 서울의 도로망을 설계할 당시 전찻길과 차도를 역사적인 조선 궁궐 담벼락에 바짝 붙여 건설하면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 광장을 협소하게 조성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 문화 유적을 말살하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전차를 타고 홍화문 앞을 지나가는 조선인에게 저도 모르게 조선 왕조에 대한 공경심을 잃도록 획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선의 민족정신과 독립 의지를 말살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문화유산 훼손과 관련해 더 큰 오욕의 현장이 있었습니다. 성종 15년(1484)에 건립된 홍화문은, 조선 시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보물 제384호로 지정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유적입니다.

그런데 바로 몇 년 전까지 홍화문 바로 길 건너편에 ‘공중변소’가 있었습니다. 현재의 서울대학교암병원 출입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말입니다.

어린 시절 필자는 권농동(勸農洞)에 살면서 혜화동 소재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등·하굣길에 그 오욕의 현장인 공중변소를 아무 생각 없이 몇 번 드나들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지곤 합니다. 일제가 이처럼 한 나라의 문화 유적 앞에 버젓이 ‘공중변소’를 세운 것은 세계 식민 역사에서 ‘문화재 난도질’의 가장 저열한 본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곳 ‘변소’라는 장소는 바로 쌍디귿 (ㄸ)이 붙은 쌍욕을 조형화한 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고궁의 출입문인 홍화문 바로 앞에 굳이 ‘공중변소’를 설치한 일본 제국주의자의 천박한 문화의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낯 뜨거운 발상에 놀라움만 앞설 뿐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그 ‘공중변소’가 위치했던 자리에 그들의 부끄러운 만행을 알리는 ‘표지판’이라도 세워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혹히 당한 것을 용서하되, 절대 잊지는 말자”라는 교훈을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지금은 사라져버린 고궁 앞 ‘공중변소’에 서린 서글픈 역사의 혼(魂)을 달래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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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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