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의 매력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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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의 매력  

2020.06.08

-옛날에는, 사내들이 외모도 준수하고 크기 또한 엄장(嚴莊)했다. -<출처: 장미의 이름으로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도서출판 열린책들)>

위 내용은 프롤로그 편 넉 장을 넘기면 나오는 왼편 두 번째 줄인데, 저는 이 문장에 홀딱 반했습니다. 왜냐면 ‘사내’를 만년필로 바꾸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에 꼭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자마자 독서를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는데 수많은 만년필들이 융단처럼 펼쳐졌고, 그중 몇 개는 코앞으로 다가와 둥둥 떠 있었습니다. 그 녀석들은 워터맨사(社)의 3대장(大將)과 셰퍼 라이프타임(Sheaffer Lifetime), 파커51(Parker'51'),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9(Montblanc Meisterstück 149)로 이 글에 나와야 할 만년필들이었습니다.

워터맨의 3대장은 58, 패트리션(Patrician), 헌드레드 이어(Hundred year)입니다. 이들 중 58은 한마디로 <장미의 이름으로>의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입니다. 눈길을 끌 만큼 준수했고 다음 세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습니다. 58의 뜻은 5는 셀프필러, 잉크나 물을 옮기는데 필요한 기구인 스포이트 없이 잉크를 넣을 수 있는 잉크 충전기관이 있고, 8은 8호 펜촉을 달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워터맨의 최상위 라인이었습니다. 자동차로 치면 벤츠S시리즈, 현대의 G90시리즈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58은 1915년에 나왔고 당대에 이 만년필을 상대할 수 있는 만년필은 없었습니다. 단연 워터맨의 최전성기에 가장 어울리는 만년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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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고 붉은 게 워터맨 58, 노랗고 작은게 워터맨 패트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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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맨 헌드레드 이어 1941년

1929년에 나온 귀족이라는 뜻의 패트리션은 이름처럼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58보다 작았고 엄장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마치 58이 윌리엄 수도사 역할을 맡은 숀 코너리라면 패트리션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습니다. 마지막인 헌드레드 이어는 GUARANTEED FOR A CENTURY 백년을 보증한다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지만, 앞의 두 만년필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습니다. 1939년 1세대, 1940년 2세대, 1941년 3세대, 1942년 4세대, 1년마다 디자인이 바뀌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관심을 못 받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워터맨에 비해 후발 주자인 셰퍼, 파커, 몽블랑은 크기와 모양보다는 금(gold)을 적게 사용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1920년 첫 등장한 셰퍼의 라이프타임 만년필은 평생보증에 걸맞게 아주 두꺼운 펜촉을 만들어 만년필에 끼웠습니다. 길이는 손가락 한마디 반 정도에 두께는 제 엄지손톱보다 더 두꺼워 책상에서 떨어지면 마루에 꽂힐 정도였습니다. 무게는 약 1.5그램. 그런데 이 펜촉이 해가 가면서 다이어트하듯 무게가 줄었습니다. 곧 1.4g으로 줄었고, 다시 1.3, 1.24 이런 식 이었습니다. 0.1g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수가 100만개라면 10만 그램, 14K 금 100kg 요즘 금 시세로 환산하면 약 38억 5천만 원(14K 금 1g 66,000원X14/24)이나 되는 큰돈 입니다.

셰퍼 라이프타임 펜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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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920년대 이후, 중간 1924~1926년, 위 1926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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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1920년대 이후, 중간 1920~1926년,  
오른쪽 1926년 이후 점점 얇아지는 펜촉

파커의 금 빼내기는 좀 더 창조적이었습니다. 1941년에 출시된 파커51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펜촉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파커는 뚜껑에 들어가는 금까지 줄였습니다.  

1/10 16K GOLD FILLED – 1943년 산
1/10 14K GOLD FILLED – 1947년 산
1/10 12K GOLD FILLED – 1950년대 산

위의 것들은 이른바 금 뚜껑이라 부르는 금도금 된 뚜껑에 새겨진 것입니다. 1/10은 뚜껑 중량의 10분의 1 이란 것이고, 16K,14K,12K는 금의 순도입니다. 즉 1943년산은 16K 금으로 뚜껑 중량의 1/10로 뚜껑을 씌웠다는, 아주 두꺼운 도금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들어가는 금의 중량은 그냥 두고 16K에서 14K 다시 12K로 순도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 역시 엄청난 양의 금이었습니다. 파커51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만년필의 하나로 1947년에만 210만 개가 넘게 팔렸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가벼운 펜촉과 얇은 금도금의 뚜껑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몰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두 만년필 모두 당대 최고급을 표방하고 나온 터라 처음엔 온갖 정성을 들이고 아낌없이 물량을 투입해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료의 효율적인 투입과 부품간의 밸런스도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차차 원가 절감도 생각하게 되었겠지요.

현대의 원탑 몽블랑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 몽블랑 149는 어떨까요. 이번에도 펜촉의 무게를 재어 보았습니다. 1970년대 초반, 2000년대 초반, 그리고 요즘의 펜촉입니다. 세 개 모두 18K로 각각의, 무게는 1.21g, 1.18g, 1.07g. 몽블랑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펜촉의 무게가 줄어들었습니다. 몽블랑이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된 옛날도 아니고, 기술의 나라 독일의 회사인데 원가 절감 외에 우리가 모르는 기술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몽블랑 149 펜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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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960년대 후반, 중간 2000년대 초,
위 2020년 중간과 위의 것을 보시면 펜촉 뿌리에 원가 절감을 위한 코스트 컷(cost cut)이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기술과 효율에 상관없이 모르면 아낌없이 물량을 쏟아 부은 옛날 만년필들이 좋습니다. 마치 단어를 외운 다음 사전을 찢어 드시던 한 세대 위 어른들과 선배들이 존경스러운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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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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