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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vs 웬수

2020.05.06

“노 기자, 남편이랑 생년월일이 같은 거 맞지요? 참, 그새 나 몰래 갈라선 건 아니겠지요?”
“전 재산이 집 한 채라 갈라설 수가 없어요. 그랬다간 누군가는 살 곳조차 없는 걸요. 생년월일이 같은 건 변함없고요. 하하하~”

며칠 전 퇴근길, 마라톤 동호회 대장과의 통화 내용입니다. LG전자가 ‘부부의 날’을 기념해 진행하는 ‘천생연분 이벤트’에 꼭 참여하라는 전화였습니다. 생년월일이 같은 부부를 위한 이벤트입니다. 로또는커녕 ‘떡볶이 내기’ 사다리 타기에서조차 늘 밀리는 ‘꽝손’인지라 “에이, 당첨될 일이 없습니다”라고 웃으며 끊었습니다.

그런데 이벤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니 선물에 욕심이 생깁니다. 늘어진 피부를 올려주고 주름까지 없애준다는, 그 유명한 ‘ㅍㄹㅇ’ 미용기기를 준다고 합니다. 선착순으로 스무 쌍을 뽑는다니 기대도 좀 됩니다. 우리나라에 생년월일이 같은 부부가 그리 많을 것 같진 않기 때문입니다.

26년 전 경향신문에 입사해 같은 날 태어난 동기를 만났습니다. 생김새, 성격, 취미 등 통하는 것 하나 없는데, 놀라운 인연이다 싶어 붙어 다녔지요. ‘한 쌍의 바퀴벌레’, ‘못난이 쌍둥이’라 부르며 놀리는 선배들도 많았습니다.

결혼 24년 차인 지금은 어떻냐고요? 티격태격이 현실입니다. 긴 세월, 참 많은 일을 겪으며 함께 웃고 울었는데, 툭하면 감정이 상해 싸우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선 자연스럽게 남편 흉을 보고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그 남자도 마찬가지겠지요. 식성과 생활습관이 유사하면 생김새는 물론 감정, 심지어 병까지도 닮는다니 말입니다.

요즘엔 ‘부부싸움의 도(道)’라는 우스개가 허투루 들리지 않습니다. “상대방 특기와 주먹의 강도 등을 미리 아는 것이니 이를 지(智)라 한다. 비록 상대방이 아픈 표정을 짓는다고 해도 이를 과감히 무시하는 것이니 이를 강(强)이라 한다. 때려서 피가 나는 곳은 두 번 때리지 않으니 이를 선(善)이라 한다. 싸움 도중에도 두발이나 의상이 흐트러지면 바로 고치는 것이니 이를 미(美)라 한다. 옆집에서 살림을 부수며 싸우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니 이를 인(仁)이라 한다….”

돌아누우면 남남인 ‘부부’. 이토록 허망한 사이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다시 돌아누워 얼굴을 마주하면 또다시 ‘부부’가 된다지요. 그런데 20여 년 살아보니 같이 잠자리에 드는 것도 힘이 듭니다. 코골이, 잠꼬대, 침실 온도, 몸부림, 화장실 가기 등등 함께하기엔 불편한 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살을 맞대고 살 때도 못 했던 ‘사랑한다’는 말은 점점 더 멀어지는 듯싶습니다. ‘웬수 같은 정’만 쌓이고 있습니다. 멋진 그대, 아름다운 그녀는 물 건너간 지 오래입니다. <탈무드>의 “부부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 칼날 폭만큼의 침대에서도 잠잘 수 있지만,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면, 십 미터나 폭이 넓은 침대로도 너무 좁아진다”라는 문장에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가장 편하면서도 가장 불편한 존재 남편. 시인 문정희와 같은 마음으로 그의 시 ‘남편’을 읊어봅니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돌아 누워버리는/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이 무슨 웬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지구를 다 돌아 다녀도/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 사랑하는 남자는/이 남자일 것 같아/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가장 많이 먹은 남자/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부부간의 사랑을 ‘다반향초(茶半香初)’라고 하지요. 차를 반쯤 마셨는데도 향기는 처음처럼 여전하다는 것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남편에 대한 미운 마음을 옆으로 밀어두고 연애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고,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라는 고백을 백 번쯤 했지요. 지금의 헝클어진 감정을 잘 풀어야겠습니다. 싸우더라도 칼로 물을 베듯 감정을 말끔히 돌려놓을 여유도 가져야겠습니다.

금실상화(琴瑟相和·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조화를 이룸)까진 아니더라도 함께 밥상을 옮길 수 있는 만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겠습니다.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며 한 발, 한 발 생의 마지막까지 걸어가야겠습니다.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함민복 ‘부부’)

“둘(2)이 하나(1) 되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는 부부의 날이 21일입니다. 청소년들이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 사랑을 일구는 것처럼 이날이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누워 남남이 된 부부들이 다시 돌아누워 환하게 웃는 날이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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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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