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풍경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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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풍경

2020.03.23

제가 사는 영동(永同)에는 아직도 오일장이 섭니다. 3자가 들어가는 날과 8자가 들어가는 날 장에 나가보면 풍성하지는 않지만, 장날 냄새가 납니다. 외지에서 온 장사꾼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좌판을 벌여 놓은 것들 하며, 건물 앞에는 촌에서 나오신 할머니들이 산나물이며, 사과나 배, 대추 밤 같은 과일이며, 도라지, 더덕 같은 걸 신문지를 펼쳐 놓은 크기의 좌판에 늘어놓고 있습니다.

장터에서는 젊은 주부들이나 남자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배낭을 멘 나이든 분들이나, 외국에서 시집온 젊은 다문화 주부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젊은 층은 굳이 장날 나오지 않고 아무 때나 마트에 가는 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장터 가장자리에 있는 집들도 담장을 치고 대문을 달았습니다. 예전에는 방문을 열면 장터가 훤히 보이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집은 장터를 마당처럼 사용하고 있어서 아침에 일어나 세숫대야에 물을 떠서 세수하거나, 머리를 감은 모습은 예사였습니다. 여름날에는 장터에 멍석을 깔고 별을 헤아리다 잠이 들기도 합니다. 장터에 사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종일 장터를 누비게 됩니다.

컴컴한 새벽이면 쇠전으로 가는 소몰이꾼이며, 소 장수들의 걸음이 빨라집니다. 가깝게는 금산, 무주, 진안이며, 장수. 멀리는 남원이나 상주에서 밤을 꼬박 걸어온 소몰이꾼들이 쇠고삐를 말뚝에 매어 놓고 해장국 집으로 향합니다.

쇠전거리에서는 새벽부터 커다란 가마솥을 밖에 걸어 놓고 걸쭉한 해장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흥정을 마친 소장수며, 소몰이꾼들은, 막걸리 반주 삼아 해장국을 맛있게 먹습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읍내에서 장짐을 실은 트럭이 장터 어귀에 도착합니다. 때를 맞춰 기다리던 읍내 장사꾼들이 자기 짐을 찾아서 등짐을 지거나, 지게, 혹은 손수레에 싣고 자기 자리로 갑니다.

잡화나 옷 장수들은 가게 안에 자리를 잡고, 양품이나, 신발 장수들은 난전에 차일을 쳐 놓고 자루며, 박스에 담아 온 상품들을 진열하기 시작합니다. 때를 맞춰 참외며 수박을, 바지게에 가득 진 농사꾼들이 도착합니다. 바지게에 있는 수박이나 참외는 버드나무 가지나, 줄기가 긴 풀잎에 덮여 있습니다. 열무며, 부추나, 미나리, 풋고추, 호박, 등을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인 채소 장수들도 자리를 잡습니다.

축제에 먹거리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장터에도 먹거리가 풍성합니다. 쇠전거리 옆으로는 국수며 국밥을 파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그 앞에는 풀빵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십여 명 줄을 지어 앉아 있습니다. 손바닥 크기로 자른 장작토막으로 불을 때서 풀빵틀을 뜨겁게 만드느라 부채질을 하면서 밀가루 풀을 풀빵틀에 붓습니다. 삶은 팥을 반 수저 정도 떠놓고, 갈고리로 한 번 뒤집으면 고소한 풀빵이 됩니다.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장에 따라 나온 아이들이 콧물을 훌쩍이며 멈추는 곳이 풀빵 장수들 앞입니다.

군복을 검은색으로 염색해 주는 염색장이며, 옥수수나 쌀이며 보리쌀 등을 튀겨주는 튀밥장이, 고무신이나 냄비며 솥을 떼우는 장이들은 장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불을 지피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장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라서 11시쯤이 되어야 장터에 사람들이 가득 찹니다. 장날 뒷산에 올라가서 장터를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차일들이 헝겊으로 장터를 모자이크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이사이 어디서 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장을 보고 있습니다.

구경꾼들이 겹겹이 원을 그리고 서 있는 곳은 가보나 마나 약장수들이 있는 곳입니다. 약장수들이 원숭이에게 장난감 같은 자전거를 타게 하거나, 그네를 타게 하는 모습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큰 구렁이 같은 뱀을 들고 오는 장사꾼들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용기에 담은 무슨 액체를 온갖 상처에 모두 바를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팝니다. 어느 때는 손바닥 크기의 물병에 들어있는 약을 팔기도 하고, 외국에서 수입해 왔다는 구리무(cream)나 분을 팔기도 합니다.

약장수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긍금증을 잔뜩 심어 놓은 다음에 약을 선전한다는 점입니다. 색동저고리에 치마를 입은 원숭이가 20분 후에 아리랑 춤을 출 테니까 기다려 달라거나, 오늘은 뱀이 알을 낳는 날이다, 뱀이 알을 낳으면 백 개씩 낳는다. 이따 알을 낳으면 소주잔에 한 개씩 넣어 줄 테니까 기다려 달라는 등, 구경꾼들이 자리를 못 뜨게 만듭니다.

맨 앞자리에 편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는 잊을 만하면‘구경하면 고추 떨어지니까 어여 가라’는 말은 합니다. 다른 동네에서 구경을 온 아이들은 약장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둥이 먼지를 털면서 일어납니다. 장터에 사는 아이들은 약장수 말을 듣기는커녕, ‘빨리 뱀이 알 낳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재촉을 합니다.

“아저씨 말 그짓말이쥬? 지난 장날에도 원숭이가 아리랑 춤춘다고 떠벌리기만 했잖유. 순 공갈쟁이!”

약장수가 화를 내면 당찬 아이들은 구경판을 깨버리는 말을 남겨 놓고 도망치기도 합니다.
그늘에는 이른 아침에 감자며, 콩이나, 수수나 조 같은 것을 지게에 지고 와서 일찌감치 팔아 치운 아저씨들이 한두 명씩은 있습니다. 벌겋게 취기가 오른 얼굴을 밀짚모자로 덮고 땅바닥에 눕혀 놓은 지게에 비스듬히 기대어 낮잠을 잡니다. 그 옆에는 아낙네가 저고리 섶으로 젖가슴을 살짝 가리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손부채질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파란색 광약을 파는 장수도 입술에 게거품이 일도록 떠듭니다. 헝겊에 광약을 묻혀서 냄비 뚜껑이며, 퍼렇게 녹이 슨 놋주걱이며, 놋주발을 문지를 때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신기함에 걸음을 멈추기도 합니다.

파장 무렵은 장을 보러 온 아낙네들이나 할머니들은 이미 자기 동네 어귀쯤 도착해 있을 시간입니다. 장사꾼들은 부지런히 종이상자며, 나무로 짠 사과 상자나 보에 물건을 싸기 시작하고, 부지런한 장사꾼은 짐보따리를 둘러메고 짐차가 있는 곳으로 바쁘게 갑니다.

중절모를 뒤통수에 걸치고 비틀거리며 걷는 노인의 손에는 신문지로 싸서 지푸라기로 묶은 간고등어나, 돼지고기 같은 것이 들려 있습니다. 선술집이나 식당에서는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고, 술국으로 끓인 시래깃국이나, 콩나물국으로 안주를 하고 손바닥으로 입술을 쓱 문지른 사람들도 노을 속으로 파고듭니다.

파장마다 빠지지 않는 최고 구경거리는 싸움입니다.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삿대질하며 고함을 지르거나, 서로 멱살을 움켜잡고 잘잘못을 따지거나, 아침에 입고 나온 새 옷에 흙먼지를 인절미 콩고물처럼 묻혀가며 드잡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드잡이하는 사람들을 말리던 사람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서 패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파출소 순경들이 달려오거나, 고소하겠다며 진단서를 떼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장터는 오늘 낮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캄캄한 침묵 속에 잠겨 듭니다. 지금은 추억을 삼킨 터만 남아 있는 장터에 장이 서지 않습니다. 넓은 장터에는 벼를 말리는 천막이 깔렸거나, 자동차들이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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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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