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형의 죽음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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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형의 죽음

2020.03.20

요즘 제주도에는 기상학적 겨울이 없어졌지만, 1960년대에는 눈도 많이 오고 무척 추웠습니다. 따뜻한 옷가지를 마련할 형편이 안 됐고 겨울 난방을 생각할 수 없었던 때였으니 청소년의 열기로 버티던 시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봅니다. 같은 반 친구와 그의 형 및 누나 등 셋이 자취하는 집으로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공장으로 지어 쓰던 목조주택인데 다다미방 같은 구조였습니다. 온돌이 아닌 데다 성긴 유리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서 무척 추웠습니다.

방구석에 오버코트를 뒤집어쓴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형이었습니다. 방에 들어간 나를 힐끔 뒤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고는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후에도 가끔 그 집에 갔지만 그의 형은 언제나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을 쓰거나 읽었습니다.

친구는 형이 대학에 다닌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근접하기 어려운 친구 형의 분위기를 보며 당시 인구에 회자되던 ‘창백한 지식인이구나’ 하고 그 이미지를 머리에 담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와 나는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어 오랫동안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친구는 해병대에 입대해서 청룡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제대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측량 관련 사업을 했습니다. 재회한 것은 2000년대였고 그 후 한국을 방문할 때 가끔 전화통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 옛날 정을 나누곤 했습니다.

지난 11일 아침 그가 오사카에서 카톡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어젯밤 형이 돌아가셨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비행기 예약이 어렵구나.”

소설가 현길언(玄吉彦) 선생의 부음이었습니다. 한 문학가의 타계 소식이기도 했지만 나에겐 50여 년 전 그 ‘다다미방의 친구 형’의 창백한 모습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10대의 기억이란 게 이렇게 끈덕집니다.

친구의 형은 제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지만 학구열을 못 이겨 제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교사와 대학생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그 후 제주대와 한양대 교수로, 또 소설가로 널리 활동했습니다. 1980년대 작가활동을 활발히 할 때 의례적인 모임에서 간혹 만나면 참 자상하게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대화는 지적 교류보다는 언제나 동생 얘기로 귀착되었습니다. 그에겐 동생의 친구이고 나에겐 친구의 형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한양대 교수를 퇴직한 후 2005년 시사 및 문학 계간지 ‘본질과 현상’을 창간해서 2019년 겨울호(58권)까지 펴냈습니다. 아마 지난 15년이 현길언 선생에겐 돈과 글을 찾아 헤매었던 5000일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몇 년 전 모임에서 만나자 그는 환경문제에 관한 글을 요청해서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원고를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예’하고 약한 대답만 한 채 저세상으로 보냈으니 나는 야박한 동생의 친구였나 봅니다.

2년 전인가, 투병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작년 그의 제자들에게 묻혀 경기도 안산에서 병색이 완연한 그를 만나 점심도 하고 카페에서 차도 마시며 시간을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의 고향 서귀포시 수망리는 4·3의 상흔이 심했던 곳입니다. 열 살도 안 됐던 그가 체험한 이때의 아픈 경험이 그의 문학과 생각의 기저를 이뤘다고 합니다. 제주 4·3을 다룬 그의 문학이나 논문은 보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진보의 비판 대상이 됐습니다.

제주에는 또 한 사람의 4·3 작가가 있습니다. 4·3을 제주인의 수난사적 관점에서 다룬 ‘순이 삼촌’의 작가 현기영(玄基永)입니다. 제주가 낳은 두 소설가 현길언과 현기영의 서로 대조되는 4·3 작품 세계 속에 ‘메우기 힘든 이데올로기의 골짜기’와 ‘공존할 수 있는 제주의 아픔’이 섞여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길언 선생의 부음란에는 장지가 ‘가톨릭대학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한 것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빈소로 가다가 거부당해 돌아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더불어 명복을 빕니다. 요즘 부음을 들으면 애석하다는 생각보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속한 20세기 기억들이 사라지기 때문인가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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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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