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부모님의 은혜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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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부모님의 은혜

2020.03.18

때로는 험하고 때로는 즐거웠던 긴 인생 여정(旅程)이 이제 마지막 코너를 돌아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인생 50’이라던 키워드가 ‘100세 인간’이라는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사회적으로 정착된 듯하니, 이왕이면 여기까지 왔으니 3년쯤은 더 견뎌볼까 희망하고 있습니다.

일제 때 5년 동안 고락을 함께한 서울 거주 중학 동기생들이 매월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 5~6명이 남았을 때 어느 날 모임에서 화제가 인생의 마지막 장(章)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집중되었습니다.

어느 한 친구가 “치매에 걸려 모든 것을 잊고 황홀(恍惚)하게 가고 싶다”고 해 다른 친구들이 핀잔을 주었습니다. 결국은 이 친구를 포함해 세 사람이 치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때까지 모임에 나오는 동기생들은 한 친구를 빼고 다 건강했습니다. 이 한 친구는 난청(難聽)으로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불평이 심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친구라 상당히 고가(高價)인 수입 보청기를 용도에 따라 복수 세트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와 TV를 볼 때 주파수가 다른 보청기를 사용하면 훨씬 편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화할 때 사용하는 보청기가 유리로 된 식탁 위에 식기를 놓는 소리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짜증을 낼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고충과 불편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노쇠에 수반하는 신체의 여러 기능 감퇴에 관한 화제가 이어졌습니다. 어느 친구는 청력의 감퇴를, 어느 친구는 시력의 감퇴를, 또 다른 친구는 기억력의 감퇴를 가장 불편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다 일리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누구 한 사람 보행의 불편에 관해 이야기한 친구가 없었습니다. 제가 2년 전부터 척추관절 협착증으로 보행이 불편해져 휠체어를 사용하게 된 뒤로부터, 보행 능력에 따른 삶의 질 변화에 민감해진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일반생활에서 겪는 여러 고충과 불편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 때 제가 살던 고향 남해(南海)의 작은 시골 마을에 벙어리 노총각 한 분이 있었습니다. 청력을 완전히 잃고 말을 하나도 못 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웃는 얼굴로 짜증을 내는 일이 거의 없는 명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20대 초반의 머슴이 한 사람 같이 살고 있었지만 아마추어 농부인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는 농지인데도 농사철에는 항상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에 많이 의존했습니다. 그럴 때 단골 일꾼의 한 사람이 ‘벅보’라고 어머니가 이름 지어 부르던 이 노총각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장사와 사무직 일만 하시던 아버지는 일본 패전 전에 돌아와 처가가 있는 마을에 정착하여 소작(小作)에 맡겼던 농지 일부를 직접 경작(耕作)키로 한 초보 농사꾼이었습니다.

‘벅보’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처음 알게 된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장애인의 여러 고충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중학생 때 입주한 두 번째 하숙집 젊은 여자 도우미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발목에 심한 장애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 무렵 중학 한문 시간에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옛 중국의 성인(聖人) 공자의 효경(孝經) 일부를 배우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어 나오는 ‘불감훼상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의 가르침은 구순(九旬) 후반인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대목입니다.

‘신체의 머리카락이나 피부 등 일체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 이것을 손상하지 않게 적극 노력하는 것은 효도의 첫걸음’이란 이 가르침이 아직 DNA 이론이 나오지 않은 까마득한 옛날에 나온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부모님은 두 분 다 70대 중반까지 사셨으니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하신 편입니다. 두 분 다 의치(義齒)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신 건강한 치아의 소유자였습니다. 제가 90이 되던 해 정기 신체검사 때, 70대로 보이는 치과 담당 의사가 저에게 이렇게 깨끗한 치아를 가진 90 노인을 치과의사 평생 만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좋은 치아를 가지셨던 부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제 누님은 90 초반에 돌아가셨는데, 저와 다섯 살 아래 동생 등 삼남매는 부모님의 장수 DNA를 이어받은 모양입니다.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될 부모님의 깊은 은혜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여 평소의 무관심에서 온 불효에 대한 가책(苛責)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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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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