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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인종차별이 없다고요?

2020.02.28

2년 전 가을에 지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오래 살지 않았던 곳이지만 내 마음은 항상 그곳이 제 2의 고향인 것처럼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어렵고 피곤했던 생활, 모국이 그리우면 태평양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가로 전동버스를 타고 가곤 했던 시절이었지요. 식사를 한번쯤 하고 싶었던 그 해안 절벽에 서 있는 Cliff house란 레스토랑을 못내 그리워하며 로스앤젤레스로 떠나와 미련이 남아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인과 함께 그 레스토랑 창가 식탁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한국을 떠난 지 반세기 세월이 흘러 회상을 해보니 내가 캘리포니아주에서 첫 해외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오라버니의 덕분이었지만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할 때는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인종차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를 삼거나 모욕으로 생각할 만큼 크게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아시아인들이 많지 않던 시대였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인종차별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5년 전 캐나다 토론토 근교 도시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 자신도 많은 인종차별적 발언(“go back to your country”)과 행위 등을 당하거나 목격하여 황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회적 여건이 미국보다 훨씬 못하는 캐나다에 와서 사는 이민자의 삶은 인종차별로도 상당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 캐나다에 정착한 첫해 경험했던 인종차별입니다. 토론토 시내 명품 쇼핑가로 알려진 곳에 위치한 Max Mara 부티크에 의류를 구입하려고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피팅룸(fitting room)에서 수선사(seamstress)가 내 몸에 피팅( fitting)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웬 남성이 피팅룸으로 오더니 수선사를 불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수정할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다른 룸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 그녀가 돌아와 내가 입고 있던 옷의 작업을 마무리했지만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었지요. 옷값을 지불하며 판매원에게 그 남성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가 부티크의 주인이란 것입니다.  

나보다 나중에 온 손님이 주인과 친한 관계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위한 작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옷을 수정하는 작업 도중에 수선사를 데려가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무례한 짓이었습니다. Max Mara가 대중적인 옷도 아닌데 고가의 옷을 구입할 손님이 피팅을 하고 있는 도중 그런 방식으로 손님을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계 최상급의 패션 상품을 파는 미국 베벌리힐스에 있는 백화점이나 로데오 거리에서도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판매원에게 내 직업이 패션디자이너였음을 얘기하며 문제를 지적했더니 판매원도 주인이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대신 사과를 했습니다. 분명 내가 아시아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부티크 주인 남자는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했을 것입니다.  

작년에 위치가 좋아 서민촌으로 이사를 온 후 한국에서 EMS 택배가 왔다는 통보를 받고 동네 지정 우체국에 소포를 찾으러 갔습니다. 카운터에 근무하는 동구스타일 영어 악센트를 쓰는 여자 직원이 박스를 들고 나오더니 땅에 툭 던지듯 내려놓는 것입니다. 박스가 커서 카운터 위에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카운터 입구까지 내가 가져간 카트를 밀어놓았음에도 그녀는 나의 배려를 무시하고 바닥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책이 많아 무거운 박스를 힘들게 카트에 낑낑대며 들어 올리려고 하니 그제야 그녀는 도울 자세를 취했습니다. 처음 겪은 일로 기분이 정말 나빴습니다. 동네가 서민층이 많은 곳이라 하더라도 내가 아시아 여성이 아니었으면 이런 무례한 행동을 결코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다음부터 나는 우체국에 갈 때는 그녀의 봉급으로는 사 입을 수 없는 고가의 옷을 입고 갔습니다.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를 보는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는 많이 친절해졌고 말도 상냥하게 합니다. 어쨋든 EMS택배는 집 문앞까지 배달해주어야 하는 특수 배달이며 수신자가 없을 때만 우체국에서 직접 찾는 것인데 내 택배의 발송인 주소지가 한국어로 한국에서 온 것이었기 때문에 직원이 더 차별을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시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시청에서 시니어를 위한 특별한 도움이나 서비스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했습니다. 건물 안 입구 프런트의 안내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무슨 질문을 하려고 했는지도 영어 단어조차도 까맣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버벅거렸습니다. 그러자 강한 영국식 악센트(영국 본토는 아님)의 영어를 쓰는 이 여성이 갑자기 불친절하게 사람을 무시하는 눈빛을 보이며 재차 물었지요. 이 여성은 분명 뉴펀들랜드(캐나다 동쪽 끝에 있는 주 )주에서 온 여성인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사실 뉴펀들랜드주에서 토론토로 오는 사람들은 일을 찾아 상경하는 것인데 대체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거나 생활이 빈곤층인 사람들이 많아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녀 자신도 토론토에서는 많은 서러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뉴펀드랜드주에서 왔다고 하면 여기 캐나다인들도 은근히 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여성은 내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동양 여자인 걸로 여겨 무시하는 눈빛과 불친절을 보였던 것입니다.

얼마 전 캐나다 원주민(INUK) 후손, 팝 싱어이며 송라이터인 여성, 매니토바에 거주하는 26세의 Kelly Fraser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방송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녀가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태어나고 자란 캐나다 시민으로 상당히 알려진 가수이지만 어려서부터 받아온 인종차별과 왕따의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트라우마와 현재까지 사이버 공간에서조차 괴롭힘(cyber bulling)을 당해오던 그녀는 결국 고통이 없는 곳으로 떠난 것입니다. 어쩌면 그곳이 그녀에게는 최상의 선택, 행복한 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잘 참고 견디는 나도 인종차별만큼은 절대 참지 못하였으며 동양, 그것도 반쪽으로 갈라진 아주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여성이었기에 나름대로 힘들게 살아온 것입니다. 백인들보다 더 우수하고 예절바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해 온 내 평생이 인종차별과의 끝없는 싸움이었으니까요.

뉴스에 의하면 2019년 캐나다가 살기 좋은 국가 2위로 올랐습니다. 인권국가인 양 이민자의 천국으로 포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민자에게 차별을 금하는 정책과 헌법이 있어 인종차별이 전혀 없는, 표면으로는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는 시민으로 사는 것처럼 떠들지만(뉴스에서도) 실제 곳곳에서 인종차별은 끊이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동포끼리 모인 교회, 동포의 식품점, 식당만 다닌다거나 동포가 경영하는 곳에서 일을 한다면 인종차별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생각지도 못했던 차별로 마음이 매우 불편합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국인에 대한 차별만 아니라 동양인에 대한 눈빛이 따갑습니다. 모든 아시아인 황인종에 대한 시선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지요. 역시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곳, 모국어를 쓰며 모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조상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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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에 디자이너로 종사.
현재 구름따라 떠돌며 구름사진 찍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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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gi, conpaper e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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