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객석 꽉 채운 마스크 얼굴들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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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객석 꽉 채운 마스크 얼굴들

2020.02.24

며칠 전 제주도 행 보잉777 비행기를 탔습니다. 체크인이 늦어 제일 뒷좌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탑승객이 줄었다더니 소문과는 달리 그날은 비행기가 만원이었습니다.

자리를 찾아 긴 통로를 걸어가는데 내 눈에 비친 기내 풍경이 너무 기괴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객실 승무원도 모두 하얀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검정색 마스크를 낀 젊은 승객들도 많았습니다. 눈만 껌뻑거리는 마스크의 얼굴들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집에 마스크를 사다 두었는데, 그날 깜빡하고 갖고 가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비행기 객실 안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나에게 음료를 건네던 승무원은 아마 마음속으로 ‘이 승객이 무슨 배짱으로 마스크도 안 하고 비행기를 탔을까?’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문득 조종석에 앉은 기장과 항법사도 마스크를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우한(武漢)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감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메이커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시진핑 중국 주석도 문재인 대통령도 모두 마스크를 낀 모습으로 자주 나옵니다.

동서양이 모두 마스크 대란에 직면했습니다.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 가장 심합니다. 2월 초 세계보건기구(WHO)의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이 “세계의 개인 보호 장비 시장이 붕괴에 직면했다.”고 경고할 정도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재고가 바닥났습니다.

세계적으로 마스크 수요는 평소의 100배 증가했고, 가격은 20배로 뛰었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도 떼돈을 버는 사람은 나옵니다. 10,000%의 성장률을 기록한 마스크 업체들이 얼마나 더 호황을 누릴지 모르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오래 계속되면 마스크를 착용하고 비행기를 타는 게 ‘뉴 노멀’(new normal)이 될 터이니, 마스크 수요는 곧 꺼질 거품이 아닐 것입니다.

마스크의 역사는 오래됐습니다. 가면도 마스크입니다. 얼굴을 보호하거나 숨기기 위한 가면, 상대에 위협을 주기 위한 가면, 제례의식에 쓰는 가면, 오페라 등 예술에 사용되는 가면 등 고대 동서양 사회에서는 다양한 마스크가 있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검투사’는 로마 시대 경기장에서 가면을 썼음을 말해줍니다. 한국의 탈도 일종의 마스크입니다.

크리스토스 린터리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 교수는 의료전문 인류학자입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예방용 마스크를 대거 보급해 쓰게 한 것은 110년 전 청나라 때 만주 지역에서였다고 합니다. 1910년 가을 만주에는 폐렴흑사병이 들불처럼 번져서 6만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서양의학을 거부하던 청나라 정부는 다급하게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의사 우롄더(伍連德)를 초빙하여 사태 수습을 의뢰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우롄더는 폐렴은 쥐가 전염하는 게 아니라 공기 전염이라고 주지시키고 수술용 마스크를 모든 한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청소원에게까지 착용토록 명령했습니다. 또 환자와 그 보호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의 일본인과 중국인 의사들도 그의 조치에 회의적이었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고 환자를 돌보던 프랑스 의사가 죽으면서 마스크의 위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발병하고 24시간 안에 모두 죽어 나가는 이 전염병은 5개월 만에 수그러들었습니다. 마스크는 더 큰 재앙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고, 그 이후 전염병이 창궐하는 세계 곳곳에서 그의 이름을 딴 우씨(俉氏)마스크 착용이 일반화되었습니다. 2002년 중국 남부지역에 사스(SARS)가 창궐했을 때 홍콩인 90%가 마스크를 쓰고 살았다고 합니다.

마스크는 이제 아시아인의 필수품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스크는 전염병 예방에도 필요하지만, 미세먼지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작년 홍콩 민주화 데모는 마스크가 일종의 데모 장비였습니다.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연대감을 상징합니다. 마스크 착용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신호임과 동시에 남에게 전파하지 않겠다는 신뢰의 의사 표시입니다. 홍콩 데모에서 시위 군중의 마스크 착용은 단결을 위한 연대감의 표시였습니다.

WHO 마스크 사용 지침을 보면 보통일이 아닙니다. 마스크를 쓰기 전 비누나 알코올로 손을 문질러 씻어라, 착용한 마스크를 손으로 만지지 말라, 축축해지면 새 마스크를 갈아 껴라, 1회용 마스크를 재사용하지 말라, 마스크를 벗을 때는 앞부분을 만지지 말라 등 만만치 않게 까다롭습니다. 이렇게 쓰고 버려지는 마스크는 새로운 쓰레기가 될 것입니다.

마스크가 뉴 노멀이 되는 사회가 되면, 기능도 다양해지고 가격대도 천차만별이 될 것입니다. 마스크에 따라 사회적 계층이 구분되는 사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마스크가 새로운 문화 아이템으로 자리 잡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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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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