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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과 음력에 관한 추억

2020.02.18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달이 2월입니다. 보통 28일이니 소위 큰달이라고 부르는 정월이나 3월 등에 비해 사흘이나 적습니다. 그러나 4년에 한 번 윤일(閏日)이라 하여 29일이 있습니다. 바로 금년이 그 윤일이 있는 해입니다.

호적상 제 생일은 2월 29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양력 생일은 4년에 한 번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 생일은 음력으로 지내왔으니 이런 불편은 전연 느끼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상급생이 된 어느 날 담임교사가 제 양력 생일에 관한 애기를 하여 비로소 이 재미있는 생일 관련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뜻밖에도 제 원 생일은 양력으로 2월 26일이라 하셨습니다. 출생신고를 할 때 누군가의 실수로 26일이 29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1924년이 29일의 윤일이 있는 해였기에 당시 아무도 이 잘못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60년대 초 서울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 바로 음력 제 생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오래된 민속 전통에 따라 아버지의 기제사 날이 제 생일과 겹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유로 다음 해부터 제 생일을 양력으로 치르기로 했습니다.

호적에는 2월 29일이 생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직장 동료나 친구들이 의아해 물어올 때도 있었습니다. 출생신고 때 실수라는 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호적에 있는 생일 날짜를 정정하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절차를 거쳐야 정정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주민등록제도가 생겼을 때도 그대로 두어 제 주민등록증 앞자리 숫자는 240229로 되어 있습니다. 여권과 운전면허증에도 물론 2월 29일로 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공식으로는 태양력이 사용되었지만 많은 조선인 가정에서는 전통 민속명절, 개인 생일잔치, 농사 일정 등 생활의 많은 면에서 음력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한일합병 전 조선의 고종도 태양력(太陽曆)을 정식으로 채택했으나 백성들이 이에 익숙해지기 전에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일본의 메이지(明治) 정부는 1872년에 국제적으로 통용하는 태양력을 채택하여 철저하게 보급했습니다. 예를 들어, 중추의 명절 추석도 양력 8월 15일로 옮겨 보름달 없는 이날에 고향과 산소를 찾는 귀성(歸省) 혼잡을 빚게 하고 ‘봉오도리’(추석 춤놀이)를 합니다.

우리가 살던 경상남도 남해(南海)의 약 40호 되는 시골 마을에서 양력설을 쇠는 집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선 학교에 가기 전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외갓집으로 가 세배를 올리는 것이 설날의 순서였습니다. 삼남(三男)인 아버지가 처가가 있는 동네로 이사왔기 때문에 외갓집이 가장 가까운 친척집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웃 어른들을 찾아 새해 인사를 올렸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과세 잘 했니?”가 시골 설 덕담이고, 가끔 세뱃돈도 받았습니다.

설의 축제 분위기 속에 입춘(立春)이 다가오면 아버지가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고 쓰인 큰 한지 두 장을 대문에 붙이고 집안 기둥과 곡간 등에도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등 한시(漢詩) 구절을 써 붙였습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3월 삼짇날과 한식(寒食)이 있고 이어 5월 단오, 7월 칠석, 그리고 8월 추석(秋夕), 10월엔 시사(時祀)와 동제(洞祭) 등 음력을 기준으로 한 전통 민속 행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동화(同化)정책이 조선인의 음력 사용에 민감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극히 소수의 조선인만이 양력설을 지냈습니다만, 일제 당국은 ‘이중과세’(二重過歲)라 하여 음력설 쇠는 것을 단속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滿洲) 진출이 시작된 1930년대에 노골화(露骨化)된 이중과세 금지 운동은 일본의 야욕이 심화된 1940년대에는 식량부족 탓도 있어 격화되었습니다. 이제는 음력설을 공개적으로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을 반(班) 조직을 통한 금지운동 외에, 노골적으로 한복에 대한 단속도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 한복을 입어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농촌의 나이 많은 분 중에는 한복을 입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복을 입은 시골 노인이 설 준비 차 오일장에 갔다가 당국 감시원의 먹물이 든 물총 세례를 받는 봉변도 있었습니다.

학교는 양력 정월 초하루를 중심으로 2주간의 겨울방학이 있고 관공서는 1월 1일 외에 일본 궁중 전통행사가 있는 3일과 5일이 공휴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음력 설날은 평일로 아무런 혜택도 없었습니다. 설날을 전후해 거의 유일한 아이들의 오락이라 할 수 있었던 연날리기는 주로 이 방학을 이용하여 준비하고 각종 연날리기 대회도 개최되었습니다. 이렇게 애용한 연은 정월 대보름날을 마지막으로 연줄을 끊어 날려 보내면서 모든 액(厄)도 같이 가라고 비는 것이 그 당시 우리들의 습관이었습니다.

이렇게 설움 받던 음력설을 비록 전후(戰後)의 식량난 속이지만 공개적으로 경축할 수 있었던 1946년 음력 정월 초하루는 광복의 기뿜을 새삼 만끽한 날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집집마다 설음식을 정성껏 차리고 화려한 한복차림도 자랑스럽게 나타났습니다.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도 나라를 찾았다는 기뿜을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군사정권은 다시 이중과세를 문제 삼고 음력 정월 초하루 공휴일 지정을 거부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던 1985년에야 비로소 정부는 ‘민속의 날’이란 어색한 이름으로 음력 정월 초하루를 공휴일로 장했습니다. 4년 뒤 이날은 ‘설날’로 바뀌었습니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처음으로 설날 중심으로 3일 연휴제를 실시하고 대신 신정의 3일 연휴를 하루로 줄였습니다. 이로써 설날은 3일 연후의 추석과 더불어 떳떳하게 민속의 대 명절이 되었습니다.

‘이중과세’ 논란이 일부 식자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지만, ‘춘절’ 연휴라 해서 2주 이상 대대적으로 경제활동을 중지하는 중국이나 규모는 작지만 역시 구정을 공휴일로 즐기는 대만, 그리고 자기네들의 설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유대인 등의 예를 볼 때, 민족의 전통을 전연 무시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라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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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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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ngi, conpaper E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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